코로나19 팬데믹은 인류를 불안하게 만들고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세상을 알게 해준 어처구니없는 판국이었다.‘언젠가는 종식되겠지’하는 마음조차도 예상을 뒤엎는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느덧 마스크가 필수품이 되었고, 사회적 거리 두기가 코로나 시대와 함께하고 있다. 마음마저 거리를 두게 하는 답답한 일상임에도 소소한 기억들이 생각난다. 올봄 함께 모임을 했던 후배가 고인이 되었다. 명복을 빌며 슬픈 마음으로 추억을 반추했다. 20여 분 간격으로 도착하는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은 갑갑하고 초조하다. 10분 정도 미리 약속 장소에 가는 버릇이 있어 언제나 일찍 집을 나선다. 매달 갖는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5, 6분 걸어 버스 정류장에 도착한다. 시간 여유가 있는 터라 안심하고 기다리는데 안내판에 ..
거리를 나서면 초라한 내 집에 비해 너무 거만한 고루대하가 내 시야를 어지럽힌다. 이런 때에 위압을 느끼면서도 오히려 그 과대광적 거구를 민소해, 내 청빈을 자부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나지막한, 얌전한 집의 향이 남이요, 거기 아담한 뜰이 곁들여 있으면 내 마음은 달라져 문득 선망을 금치 못하니, 정원에 대한 애욕은 도시 천생의 내 업화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뜰과 인생'의 관계는 너무나 밀접하니 이를 사랑하고 갈구함은 인간 자연의 성정이 아닐까. 인생의 안식처를 가정이라 하여 집과 뜰을 연결해 놓은 데 이미 무슨 심비한 의미가 은장 된 듯도 하다. 뜰 없는 집은 사실 내외 불화 이상으로 살풍경일 수 있다. 널찍한 뜰, 거기 몇 주의 고목이 서고 천석의 유아가 있고 화초마다 곁들여 심어졌다면, 사람이..
오늘도 어느덧 어스름이 내리면 가족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모두의 일상이리라. 이는 자못 상쾌한 공기를 들이쉬듯 자연스러운 일이나 한편 가족이 없는 이에겐 공허한 외로움으로 다가서는 건 아닐까. 수년 전 지방으로 출장 갔을 때다. 집 떠날 일이 거의 없는 내겐 오랜만의 출장에서 거래처와 밀고 당기느라 온종일 지친 때. 무거운 몸을 이끌며 들어서는 호텔 방 검은 내 그림자의 앞선 모습이 불현듯 떠오른다. 기다려주는 가족 없이는 설사 집이라 해도 평안을 얻을 수 있을까? 아니 평안은 얻을 수 있다 해도 몰려드는 외로움은 또 다른 시험일지 모른다. 이때 집에 혼자 남아있는 아내도 필경 같은 느낌일 것이다. 지나간 개발시대 휴일 없이 일하는 남편을 하염없이 기다리며 며칠씩 독수공방했던 신혼 때 아내도 ..
만년필 펜촉 사이로 흘러나오는 잉크색이 짙푸르다. 검푸른 그 빛깔 속에 스며있는 이야기는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어제인 양 생생히 떠오른다. 오래전 검사와 피의자로 만난 이가 전해준 만년필이다. 어느 날 교통사고를 일으킨 사람이 검찰로 송치되어 내게 배당되었다. 도로 중앙에서 달려오는 버스를 피하여 돌아선 사람을 치어 중상을 입힌 사건이었다. 버스가 시야를 가려 사람을 보지 못하고 달리다 그만 사고를 낸 것이다. 조사를 끝낸 후 눈물을 흘리며 털어놓는 이야기를 들으니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그 사람은 12살에 고아가 된 후 넝마주이, 구두닦이, 만년필 행상 등 닥치는 대로 해오다가 프로 권투선수로 데뷔했다. 테크닉을 높이 평가받아 한국페더급 랭킹에도 올랐다. 그런데 가난한 형편이라 제대로 먹을 수 없..
끝 간 데 없는 코로나 사태로 강화된 집합금지 명령이 가족 간의 돈독한 정을 갈라놓았다. 올해는 고향집에서 쓸쓸한 설 명절을 보냈다. 아무리 핵가족 시대라고 하지만 명절에는 함께 모여 즐거운 시간을 가졌는데, 이번 설에는 직계 가족도 5인 이상 만남을 자제하라는 권고로 시골마을은 적막강산이었다. 마을회관은 문이 닫혔고 양지바른 곳곳에는 노인들이 맥을 놓고 앉아 있다. 아랫마을에 사는 친구가 명절도 자났으니 식사나 하자면서 전화가 왔다. 공무원으로 퇴직하고 귀향하여 살면서 주변 일에 앞장서는 친구다. 나 역시 시골에서 허전하게 명절을 보내고 마음이 울적했는데 친구의 연락이 무척 반가웠다. 정해진 시간에 약속 장소에 갔더니 다른 친구 두 명이 함께 나와 있었다. 둘 다 도회지에서 생활하다가 은퇴하고 고향에 ..
모처럼 여유로움이 묻어나는 오후, 호숫가에 섰다. 하늬바람이 일었는지 엷게 이는 물결이 조용히 파장을 만들고 물새가 일렁이며 한가롭게 유영을 한다. 호수는 커다란 거울이 되어 또 하나의 하늘을 담고 있다. 하늘에 뭉게구름 가면 물속에도 똑같이 구름 가고 나도 구름 따라 한없이 떠간다. 잿빛 하늘처럼 내 마음이 허허로워진다. 얼마 안 있으면 추수가 끝난 들녘도 그럴 것이다. 마음도 들판도 공(空)이 된다. 공은 비었지만, 또 뭔가를 담고 채울 수 있는 여유가 있어 좋다. 생물은 물 없이 살 수 없다. 물은 영양소이자 생명의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달을 정복하고 화성을 탐사할 때도 제일 먼저 찾는 것이 물이다. 물이 있다는 것은 생물이 있다고 미루어 볼 수 있고 사람의 생존 가능성을 가늠할 수 있어서다. 인체..
떨켜가 드디어 잎자루의 물구멍을 닫아버렸다. 체념한 잎들이 우수수 떨어진다. 별리의 가을이 못내 아쉬워 흘리는 나무의 눈물이다. 열정의 구멍이 스르르 닫혀버린 내 몸에서 떨어진 잎들이 생의 겨울이 올까 봐 바짝 긴장하고 있다. 의지, 도전, 끈기, 인내, 용기, 목표 그리고 믿음의 잎들. 결기의 겨울을 건너기 위해 잎자루를 야멸치게 내치는 수문장, 떨켜. 떨켜가 수문의 기척을 낼 때까지 봄은 준산빙벽을 오르내리며 오기와 극기로 심신을 단련시킨다. 눈 속의 노란 복수초와 매화의 안위를 살피는 눈, 동장군보다 매서운 봄이다. 내 열정의 구멍마다 풍구를 돌려보지만 기척도 않는다. 구멍이 한 생명을 키우거나 버린다는 것을 생의 구멍을 진중히 여닫아본 사람만이 안다. 다람쥐, 청설모도 겨울을 건너기 위해 나뭇구멍..
반가운 얼굴이 화면 가득하다. 에 푹 빠져있다고 한다. 는 실학자 풍석 서유구가 쓴 음식요리 백과사전이다. 총 7권 4책, 12만 자가 넘는 책으로 ‘정조鼎俎’는 솥과 도마를 뜻한다. 어릴 때부터 서유구는 어머니에게 손수 감저죽을 쑤어 드렸다고 한다. 활시위를 팽팽히 당긴 듯한 눈초리로 쌓아둔 자료를 읽는 작가 김훈. 이후의 작품이 기대된다. 재료 고유의 맛을 살린 다양한 음식 중 ‘전립투氈笠套’가 인상적이다. 당시 집집마다 있었다는 전립투는 요리도구이자 음식 이름이다. 조선 시대 군복에 쓴 전립이라는 벙거지 모양을 본떠 무쇠나 곱돌로 만든 전골 요리용 커다란 식기로 양편에 고리 모양의 손잡이를 달아 들기에 편하게 만들어졌다. 먹고 사는 생활의 엄중함에 자연스레 속해 있는 전투모가 오래전 읽은 그의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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