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만한 부식 가게마다 있는, 콩나물은 내가 자주 찾는 찬거리 중에 하나다. 검은 보자기를 덮어 쓴 콩나물 동이가 옛 친구처럼 반갑다. 아주머니가 천을 들치면 잠자던 콩나물이 일제히 기지개를 켠다. 가지런하게 선 모습이 수줍은 소녀 같다. 연둣빛 고개는 다소곳이 숙이고 뽀얀 목덜미에 상큼한 풋내를 머금었다. 하얀 다리가 반들반들 예쁘다. 매끈하게 잘 컸다. 마트에 가면 비닐봉지에 담긴 콩나물을 골라 살 수 있지만, 시루에서 갓 뽑아 담는 콩나물을 나는 자주 찾는다. 부식 집 아주머니의 손이 큰지, 아니면 단골이라 덤을 주어서인지 항상 넉넉할 정도로 담아준다. 콩나물의 아싹한 식감과 고소한 맛은 비빔밥에서 빠질 수 없는 재료 중 하나다. 다른 나물과 구색을 갖출 때 콩나물이 제격이지만, 서민들의 밥반찬뿐 아..
둘째 손자 백일이 추석과 며칠을 두고 맞물려 들어있다. 추석에 내려오는 참에 백일을 우리 집에서 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며느리에게 제안을 했다. 번거롭게 서로 오고 가는 불편함도 줄이고, 할머니가 백일상을 차려준다고 하니 좋다고 한다. 손자와는 태어나서 한 번 보고는 두 번째 상봉이다. 보내온 사진으로는 자주 보았지만 직접 안아 볼 생각을 하니 가슴이 설렌다. 건강한 손자를 출산하고 백일 동안 키워낸 며느리에게도 고생했다는 의미를 담아 축하해주고 싶기도 하다. 내려오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백일상차림 음식을 생각한다. 예로부터 백일을 맞이한 아기는 남아男兒와 여아女兒의 구분이 없이 무사히 자란 것을 대견하게 여기며 잔치를 벌여 이를 축하해주던 것이 우리의 풍습이다. 그 유래는 의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옛날에..
치솟는 불길이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만큼 자유분방하다. 주체할 수 없는 욕망을 불사르듯 푸른빛으로 일렁인다. 오직 타오르기 위한 일념으로 장작을 에워싸는 불길, 그 현란한 불꽃의 몸짓에 홀린다. ‘타다닥, 타닥’ 장작이 타면서 불티가 날아오른다. 밤의 장막에 별처럼 박혔다가 화르르 쏟아져 붉은 수정되어 구른다. 잠시 반짝이다 시나브로 흙과 동화되고 만다. 느리게 반짝이다 사라지는 불꽃은 노인의 인생 꽃인 검버섯을 닮았다. 그 꽃도 저렇게 시들거리다가 가뭇없이 사그라지는 것이 아닌가. 이 시간 이 고요. 불길 따라 흐르고 불길 따라 머문다. 어느 순간 나를 내려놓자 내가 없다. 실존하는 형체는 이미 내가 아니다. 환하게 부서져 내리는 불빛에 산화되어 버렸다. 딸네는 매주 금요일이면 아이 셋을 데리고 멀리 ..
새처럼 날개를 펴고 자유로이 날 수 있다면. 가끔 허공에 무시로 집 한 채 지어본다. 가벼운 날개를 지녀야 가능하겠지만 말이다. 몸이 솜처럼 가벼워진다면 마음도 그와 같지 않을까. 요즘 까치 한 쌍이 분주하다. 긴 겨울 보내고 봄 오는 길목에 만난 까치 두 마리. 어느 사이 사랑을 하고 미래를 약속했나 보다. 연못가 뽕나무 꼭대기를 집터로 택했다. 이른 아침부터 부부는 부지런히 집을 짓기 시작한다. 설계도와 조감도는 이미 가슴속에 그려져 있는 걸까. 가장 안전한 각도에 기반을 잡았다. 주춧돌 쌓듯 주어온 나뭇가지들을 얼기설기 받쳐놓는다. 날개엔 힘찬 음표가 달려있다. 눈짓, 발짓, 날갯짓은 그들만의 비밀 언어. 층높이는 이만큼이면 될까. 평수는 얼만큼이어야 할까. 행여 복 한 움큼이라도 새어 나갈까. 한..
별 볼일 없는 듯, 별일을 하는 것이 쪽지이다. 쪽지는 단순하고 간편해서 좋다. 휴대폰이 쪽지의 역할을 대신하는 요즘도 나는 볼펜과 메모지를 챙겨 다닌다. 무시로 신속하게 전할 수 있는 쪽지, 오발 전송 등의 문제는 예나 다름없이 돌발적인 해프닝이나 웃음을 자아낸다. 짤막한 한 마디라도 꼭 전하고 싶은 마음을 담은 쪽지의 매력은 순수한 감동이다. 퇴직할 때 빨간 하트모양의 상자를 선물로 받았다. 가볍디가벼운 상자, 너무 가벼워서 내용물이 더 궁금하다. 수수께끼를 푸는 마음으로 열어보니 알록달록한 쪽지들이 가득하다. 아 무슨 말들을 썼을까, 설레는 가슴이 두근거린다. “당신, 맘 단단히 먹고 읽어야겠네.” 남편이 옆에서 겁을 준다. 퇴직하고 떠날 사람이니 무슨 말인들 못쓸까. 삼십팔 여년을 같이 근무한 사..
시계 우리 집에 다섯 개의 시계가 있다. 안방과 주방, 거실과 욕실에 하나씩 있고, 서랍장에는 손목시계가 잠자고 있다. 살아 움직이는 시계 중 세계표준시에 맞게 가는 놈은 하나도 없다. 안방 시계는 10분, 나머지는 5분 빨리 가면서 서두르라고 재촉한다. 가끔 약이 다된 시계는 엄마 심부름으로 옆집에 돈을 빌리러 가는 아이처럼 투정을 부리며 느릿느릿 움직인다. 늦거나 멈춘 게 있어야 정상으로 가는 시계의 고마움을 안다. 세상을 움직이는 시계도 약이 떨어져서 좀 천천히 가거나 한 번쯤 정지했으면 좋겠다. 시계가 쉬면 우리는 가쁜 호흡을 가다듬으며 주변을 돌아볼 수 있다. 핸들 핸들을 잡으면 햇살에 반짝거리는 강을 따라 달리던 장면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자잘한 섬들이 뒤꿈치를 들고 손짓하는 모습도 보인다. ..
봄이 수런댄다. 벚꽃 아래서 노인들이 볕바라기를 하면서 담소를 나누고 있다. 나는 예닐곱 발짝 떨어진 원목 테이블에 앉아 봄맞이 중이다. 달걀 값이 올랐다는 이야기 끝에 시민회관이 튀어나왔다. 신혼 때 그 근처에 살아서 반가웠다. 들려오는 말을 건성으로 듣다 귀를 활짝 열었다. 시민회관 앞 빌딩이 우리 집 자리잖아. 집이 백오십 평이었으니까 엄청 넓었지. 뒷마당에 칠면조랑 닭이랑 길렀어. 날마다 닭이 낳은 겨란을 먹으면 얼마나 맛있는지 몰라. 한 30년 전이네. 완벽한 표준어에 카랑카랑한 목소리다. 슬몃 건너다보았다. 노인은 초록누비옷에 밤색바지, 회색 선 캡을 쓰고 있다. 마스크와 모자만 벗고 저대로 예식장에 가도 어울릴 고운 자태다. 나는 칠면조할머니 이야기를 더 듣고 싶었다. 하지만 노인들은 저택 ..
오억 오천만 년 전, 세상은 일테면 장님들의 나라였다. 캄브리아 대폭발로 진화의 포문이 열리기 전까지, 느리고 평화로웠던 저 식물적 시대는 눈의 탄생이라는 지구적 사건으로 시나브로 종결되어 버린다. 세상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빛을 이용해 시각을 가동하기 시작한 동물들은 생명의 문법을 송두리째 흔들어 버렸다. 조용했던 행성이 먹고 먹히는 먹이사슬로 포식과 피식의 격전지가 되어갔다. 먹히지 않기 위해 외피를 강화하거나 지느러미를 발달시키고, 사냥을 위해 힘센 앞발과 송곳니를 장착하는 등 군비경쟁이 시작되었다. 공격과 방어, 양수겸장의 초병으로서 눈의 역할이 지대해졌다. 한번 켜진 빛 스위치는 지금까지 한 번도 꺼지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눈이 다섯 개나 달린 녀석도 생겨났다. 캄브리아 중기에 살던 오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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