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해음林海音 선생님이 쓰신 을 읽었습니다. 진이 엄마가 선생님께 편지를 보내고 선생님께서 답장을 보내 주셨습니다. 진이 엄마는 정성을 다해서 싸준 도시락 반찬과 밥이 매번 무말랭이와 푸석한 재래 미쌀로 바뀌어 있었고 하루는 도시락까지 바뀐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이건 누군가가 계획적으로 벌을 받을 짓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서, 어린 아들의 영양식을 누가 가로채고 있는지 알아봐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한 개의 달걀부침이든 혹은 닭다리든 남편의 박봉을 알뜰히 저축하여 간신히 마련한 것임을 강조하였습니다. 선생님께서 조사하는 데 도움이 될까 하여 오늘은 진이 눈앞에서 큼직한 쇠고기완자찜을 한 덩이 도시락에 넣어주었다고 하면서 이 일을 밝혀주시기를 간곡히 부탁하였습니다. 진이 어머니의 편지를 읽어 가다가 잠시 ..
종로3가역은 가까이 탑골공원이 있어서 그런지 노인들이 많았다. 거기다 바닥과 벽타일이 낡아서 역사의 묵은 냄새까지 느껴졌다. 그 속에서 꼿꼿한 걸음걸이로 나에게 다가오는 이가 보였다. 고희를 넘긴 내 친구였다. 내 손을 꼭 잡아 인사를 하고 지방에서 올라온 나를 위해 맛집을 찾아놓았다며 환하게 웃었다. 택시를 타고 삼청동 공원 근처에 가자고 했다. 옛 추억이 많은 곳 아니냐며. 감사원으로 올라가는 길은 변화가 없었다. 삼십 대에 교육을 받았던 연수원의 담장도 우리가 함께 걸었던 옛 모습 그대로였다. 점심을 먹고 삼청 공원으로 갔다. 녹음 우거진 산책로가 너무 아름다웠다. 친구는 자신의 집 근처인 숙정문 방향으로 앞서 걸었다. 오랜만에 만나니 이야기가 끝없이 이어졌다. 즉흥시를 써 단체 톡 방에 올리고 주..
산비둘기 피울음 우는 유월 초순, 우리 일행은 챙 넓은 모자와 선글라스와 간단한 점심을 준비하여 길을 나섰다. 임진왜란부터 고종 시절까지 내시들이 살았다는 청도 운림고택을 찾아 나선 걸음이다. 허나 ‘내시’라는 무거운 단어가 뇌리에 박혀 몸도 마음도 가볍지만은 않다. 역사에 해박한 K선생이 그 마음을 알아차리고 청도의 볼거리를 먼저 둘러보고 가자며 여유롭게 트래킹을 이끌었다. 여린 모가 발을 내리는 무논을 지나고 봇물 지줄 거리는 둑을 따라 하염없이 걸었다. 시조시인 민병도 갤러리를 둘러보고 신지생태공원과 선암서원, 그리고 한국전쟁 중에 이승만 대통령이 하룻밤 묵고 가셨다는 만화정과 선사시대 고인돌까지 둘러 본 뒤 임당리 내시고택에 이르렀다. 먹빛 기와담장에 에워싸인 내시고택을 들어서자 덩실한 한옥 몇 ..
도봉구는 웅장하고 수려한 도봉산이 있어서 도봉구다. 도봉구에는 문화유산이 많이 산재해있다. 그중에서도 초안산과 매봉산은 내시들의 공동묘지가 있다. 도봉구민이지만 그리 많이 알려지지 않았던 초안산내시묘에 관심이 간 것은, 덕성여자 대학교에서 ‘도봉구민을 위한 박물관 문화강좌’를 들으면서부터이다. 문화강좌는 처음 접하는 강의이다. 몹시 흥미롭고 경이로웠다. 드디어 현장 답사 가는 날이다. 갑자기 가을비답지 않게 많은 비가 쏟아진다. 수강생들은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다. 하늘은 우리를 기다리는 영혼들의 기도가 있었는지 살랑살랑 불어주는 가을바람이 비구름을 살짝 밀어내고, 말갛고 파아란 가을 하늘을 우리에게 열어 주었다. 울긋불긋 아름다운 단풍은 가을비를 함초롬히 머금고 곱게 물들어 가고 있다. 마치 외로운 영혼..
* 전학 어제와 다름없는 아침이었다. 하늘색 원피스에 양 갈래로 머리를 땋아 내린 내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책가방을 메고 대문을 나서자 탱자나무 울타리 아래 앉아있던 참새들이 포르르 날았다. 골목에서 쏟아져 나온 아이들을 마을 어귀에서 만났다. 큰길에서 모퉁이로 접어들어 좁은 논둑길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조잘대며 걸었다. 학교가 파하면 동무들과 냇가에서 붕어를 잡기로 했다. 아침 조회 시간이 끝나자 선생님이 내 이름을 불렀다. 가방을 메고 나오라 했다. 복도에는 흰 반팔 와이셔츠에 양복바지를 입은 아버지가 서 계셨다. 학교에 오시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평소 같지 않게 나를 보고 웃지도 않으시고 몸을 돌려 앞장서 걸었다. 따라간 곳은 교장실이었다. 기름을 발라 뒤로 빗어 올린 머리 때문에 이마가 유난..
한 해가 또 저물어간다. 소마세월 탓인가 착잡한 마음은 가랑잎처럼 바삭하다. 마음속 갈증을 풀어 줄 청량제가 필요했다. 아내와 함께 길을 나서다 희한한 일을 겪는다. 묘한 기시감에서 헤어날 수 없었다. 편도 2차로에서 내 차는 우회전하려는 참이었다. 1차로에는 직진·좌회전 차량이 줄을 섰다. 1차로 맨 앞에서 대기 중인 차량의 뒷자리 번호 두 개만 비스듬히 보인다. ‘○○53’이다. 문득 앞자리 두 개 숫자는 ‘68’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서 차량번호는 ‘6853이다.’라고 혼자만의 최면을 건다. 아내에게 그 상황을 말하려는 순간 신호가 바뀌고 차량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저만치 앞서가는 그 차량의 번호가 내 생각 대로였다. 착시가 아니었다. 내 안에 어떤 영적인 존재가 있는 건지, 깜짝 놀랐다. 흰..
실금이 가 있다. 들었다 놓을 때마다 사그락 사그락 소리가 난다. 귀에 낯설지 않은 것을 보면 어디선가 자주 들어 본 소리다. 자배기를 조심스레 내려놓는다. 테두리에 감겨있는 철사가 녹슨 걸 보면 금이 간지도 오래되었나 보다. 사연 있는 이 장독대에 나이 먹지 않은 것은 없다. 큰 독, 작은 독, 멸치 젓국 냄새가 배어 있는 독과 소래기, 자배기, 구석에 숨겨둔 약탕관까지 다 내가 헤아릴 수 없는 나이를 먹었을 게다. 간장 수십 독은 퍼냈음직한 아름드리 장독에서는 여전히 진한 짠내가 난다. 대가족 둘러앉은 밥상 냄새가 거기에 있다. 도시로, 외국으로 돌다가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시외가 가까운 동네에 집을 짓고 살게 되었다. 남편은 어릴 때 방학이면 외가에 와서 지낼 때가 많아서 외가에 대한 추억이 소복..
무작정 집을 나섰다. 마스크만 쓰고, 차창 밖으로 스쳐 가는 풍경을 보니 체한 듯 답답했던 명치끝이 조금은 시원하다. 전망대에 털썩 주저앉아 내려다본 풍경은 내 유년 시절을 품어주었듯이 따뜻하다. 그리움이 출렁이며 춘풍에 머리카락이 가볍게 날린다. 언제나 이곳에 오면 바람은 부드럽게 내 감성을 살찌운다. 물 냄새가 가볍게 코끝을 간질이고 두 눈을 감는다. 호수를 내려다본다. 만수(滿水) 위로 수상가옥이 이국적 풍경을 자아내고 있다. 전에 없던 좌대가 낚시꾼을 기다리며, 어릴 적 내 놀던 곳을 가늠해 본다. 아슴아슴한 기억이 저쯤이라고 일러준다. 맞아 저쯤에 우리 집이 있었지, 살짝 들어간 산허리에는 다랑논이 있었고, 그 위로 밭이 있었어, 밭가의 너구리굴도 무서웠어, 그러나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져도 걱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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