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서, 차라리 어두워버리기나 했으면 좋겠는데─벽촌의 여름날은 지리해서 죽겠을 만치 길다. 동에 팔봉산. 곡선은 왜 저리도 굴곡이 없이 단조로운고? 서를 보아도 벌판, 남을 보아도 벌판, 북을 보아도 벌판, 아─이 벌판은 어쩌라고 이렇게 한이 없이 늘어 놓였을꼬? 어쩌자고 저렇게까지 똑같이 초록색 하나로 돼먹었노? 농가가 가운데 길 하나를 두고 좌우로 한 십여 호씩 있다. 휘청거린 소나무 기둥, 흙을 주물러 바른 벽, 강낭대로 둘러싼 울타리, 울타리를 덮은 호박넝쿨, 모두가 그게 그것같이 똑같다. 어제 보던 대싸리나무, 오늘도 보는 김서방, 내일도 보아야 할 흰둥이, 검둥이. 해는 백 도 가까운 볕을 지붕에도, 벌판에도, 뽕나무에도 암탉 꼬랑지에도 내려쪼인다. 아침이나 저녁이나 뜨거워서 견딜 수가 없는..
무관한 친구가 하나 있대서 걸핏하면 성천에를 가구가구 했습니다. 거기서 서도인 말이 얼마나 아름답다는 것을 깨쳤습니다. 들어 있는 여관 아이들이 손을 가리켜 '나가네'라고 그러는 소리를 듣고 '좋은 말이구나' 했습니다. 나같이 표표한 여객이야말로 '나가네'란 말에 딱 필적하는 것같이 회심의 음향이었습니다. 또 '눈깔사탕'을 '댕구알'이라고들 합니다. '눈깔사탕'의 깜찍스럽고 무미한 어감에 비하여 '댕구알'이 풍기는 해학적인 여운이 여간 구수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서 어서 하고 재촉할 제 '엉야―' 하고 콧소리를 내어서 좀 길게 끌어 잡아댕기는 풍속이 있으니 그것이 젊은 여인네인 경우에 눈이 스르르 감길 듯이 매력적입니다. 그러고는 지용의 시 어느 구절엔가 '검정콩 푸렁콩을 주마.' 하는 '푸렁' 소리가..
달이 천심(天心)에 있으니 이만하면 족하다. 물은 아직 좀 덜 들어온 것 같다. 축은 모래와 마른 모래의 경계선이 월광 아래 멀리 아득하다. 찰락찰락―한 여남은 미터는 되나 보다. 단애(斷涯) 바위 위에 우리 둘은 걸터앉아 그 한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자 인제 일어나요" 마흔아홉 대 꽁초가 내 앞에 무슨 푸성귀 싹처럼 헤어져 있다. 나머지 담배가 한 대 탄다. 요것이 다 타는 동안에 내가 최후의 결심을 할 수 있어야 한단다. "자 어서 일어나요" 선(仙)이는 일어났고 인제는 정말 기다리던 그 순간이라는 것이 닥쳐왔나 보다. 나는 선이 머리를 걷어치켜주면서 "겁이 나나?" "아―뇨" "좀 춥지?" "어떤가요" 입술이 뜨겁다. 쉰 개째 담배가 다 탄 까닭이다. 인제는 아무리 하여도 피할 도리가 없다. "자..
바른대로 말이지 나는 약수(藥水)보다도 약주(藥酒)를 좋아하는 편입니다. 술 때문에 집을 망치고 몸을 망치고 해도 술 먹는 사람이면 후회하는 법이 없지만 병이 나으라고 약물을 먹었는데 낫지 않고 죽었다면 사람은 이 트집 저 트집 잡으려 듭니다. 우리 백부께서 몇 해 전에 뇌일혈로 작고하셨는데 평소에 퍽 건강하셔서 피를 어쨌든지 내 짐작으로 화인(火印) 한 되는 쏟았지만 일주일을 버티셨습니다. 마지막에 돈과 약을 물 쓰듯 해도 오히려 구(救)할 길이 없는지라 백부께서 나더러 약수를 길어오라는 것입니다. 그때 친구 한 사람이 악발골 바로 넘어서 살았는데 그저 밥, 국, 김치, 숭늉 모두가 약 물로 뒤범벅이었건만 그의 가족들은 그리 튼튼하지도 못할 뿐 아니라 그 먼저 해에는 그의 막내누이를 폐환으로 잃어버렸습..
가슴 속에 감춰둔 나만의 나무가 있다. 그 나무를 보고 싶었다. 로키산맥 수목 한계선에 산다는 나무. ‘로키’라는 지명의 어감은 적당한 고독을 품은 씩씩한 사나이 같다. 그곳, 해발 삼천 미터 높이에서 산다는 나무는 매서운 바람 때문에 곧게 자라지 못하고 무릎을 꿇고 있다고 한다. 무릎 한 번 쭉 펴지 못하고 구부린 채 살아내는 나무의 다리를, 존경하며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어루만지고 싶었다. 그 옆에서 오랫동안 앉아 깊은 기도를 엿듣고 싶었다. 구부러진 나뭇결 켜켜이 눈물과 고통 끝에 맺힌 진주를 찾고 싶었다. 세계적인 명품 바이올린을 그 나무로 만든다고 한다. 나무가 그대로 살다 죽었다면 나무의 삶을 돌아보지 않았을 것이다. 아픔이 절묘한 선율을 만들어 누군가의 영혼을 일깨우고 고단함을 어루만지기에 나..
2001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 사람 하나 세상에 와서 살다가는 것이 풀잎에 맺힌 이슬과 같고, 베어지는 풀꽃 같다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아침 안개처럼 살다 홀연히 떠나버려도 그로 인해 아파하는 가슴들이 있고, 그리운 기억을 꺼내어보며 쉽게 잊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해질녘 밭에 갔더니 시아버님의 지게가 석양을 뒤에 지고 비스듬히 기대어 있었다. 생전에 그 분 성품을 말해 주는 듯 꼼꼼하게 싸매어 파라솔 아래 묶어두었다. 겨우 이 세상 떠난 지 보름 되었는데 손때 묻어 반질반질한 지게 작대기는 아득한 옛날로부터 와서 서 있는 것 같았다. '언제 와서 다시 쓰시려고…….' 지게에 눈을 두지 않으려 애써 피해도 다시 눈이 거기에 머물렀다. 혹시 발자국이 있을까 싶어 밭고랑을 살펴보았다. 자식 돌..
겨울답지 않게 눅진눅진 꿉꿉한 나날이다. 사계절이 진퇴양난에 빠진 듯했다. 애써 깎아 말리던 곶감에 곰팡이가 슬어 내버린 지도 제법 되었다. 가을걷이가 제대로 되지 않으니 장터 고스톱 꾼들은 매일이다시피 판을 벌였다. 적막한 시골살이에 심심풀이 땅콩과도 같은 고스톱판은 티격태격 정을 쌓고 소주잔을 나누는 사랑방과 같았다. 그렇긴 해도 다슬기를 주워 판 알토란같은 돈을 몽땅 털리게 된 날 나는 어슬어슬 추웠다. 찬물에 떨며 허덕댄 보람이 밤새 도루묵이 된 것이다.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더니, 재주가 모자라는 데다 운도 없는 날이었다. 잃을 때도 있고 딸 때도 있어 그게 뭐 그리 대수이랴 마는 생고생한 돈이라 섭섭하였다. “지갑이 썰렁 타, 돈 좀 주소.” “얼마나?” “돈 십만 원이면 안 되겠나.” “현찰이 ..
삼겹살은 좀 침침한 골방에서 먹어야 더 맛이 난다. 그 방은 좁아서 아늑해야 하고 적당히 지저분해야 한다. 기름때 낀 포마이카 상다리의 나사가 헐거워 꺼떡거려도 상관없다. 가스레인지는 군데군데 기름얼룩이 누리끼리하게 붙어있어야 좋다. 방바닥에 사려놓은 가스 줄을 궁둥이로 슬쩍 밀치고 앉은들 어떠랴. 누런 비닐 장판은 기름기가 덜 닦여져 눅진해야 정이 간다. 방석은 이 손님 저 손님 하도 깔고 앉아서 윤이 날듯하고, 손으로 잡으면 쩍 달라붙을 것 같은 것이라야 편하다. 환풍기는 내미는 바람이니 묵은 먼지가 끼어 있은들 상관없고, 스위치 줄을 당기려 발돋움한들 뭐 그리 대수랴. 파리똥 듬성한 벽에 빌붙은 고장 난 시계는 언제나 어제 그 시각이며, 이 손님 저 환자에게 헤프게 나눠줬을 한의원 달력은 온갖 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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