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봄을 사랑함은 꽃을 사랑하는 까닭이오. 겨울을 사랑함은 눈을 사랑하는 까닭이요, 가을을 사랑함은 맑은 바람을 사랑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봄을 사랑하고 꽃을 사랑함은 실은 추운 겨울을 벗어난 기쁨이요, 맑은 바람을 사랑하고 가을을 사랑함은 뜨거운 여름에서 벗어난 기쁨이다. 만일 겨울의 추움과 여름의 뜨거움이 없었다면 봄과 가을이 그처럼 반갑지는 못했을 것이다. 여름은 오직 뜨거울 뿐이다. 그 무덥고 훈증하고 찌는 듯한 여름을 좋아할 사람은 적다. 그래서 여름은 모두 피하려 한다. 피서란 여기서 온 말이다. 그러나 나는 결코 더위를 피하려 하지 않는다. 만일 내가 여름에 여행을 하고 수석을 찾은 일이 있다면 그것은 피서를 위해서가 아니요 휴가를 이용했을 뿐이다. 더우면 더울수록 기쁨으로 참는다. 땀이..
예뻤다. 풀빛 원피스에 하얀 구두를 신고 단아하게 앉아있었다. 창가에 달린 햇살 한줌이 뽀얀 얼굴위에 발그스레한 연지처럼 모여 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철지난 해풍에 그녀의 머리카락이 가볍게 흔들렸다. 미소를 머금으며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학처럼 부드럽고 우아하였다. 중학교 일학년 여름 방학이 끝날 무렵이었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중요한 약속이 있음을 알렸다. 동생과 나는 그저 가족 나들이 인줄만 알았으나 언니들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송도에 있는 음식점으로 갔다. 바다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잘 꾸며진 이층 별실이었다. 그곳에 들어서자 미리 와 기다리던 그녀는 웃으며 우리를 맞이했다. 처음 본 여인의 반기는 모습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저 사람이 누구인지. 왜 우리와 같이 밥을 먹는 건지. 아버지의..
벚꽃과 개나리꽃이 막 피어나는 철이라 이제는 정말 봄이구나 싶은 이즈음에 류인서 시인이 내게 시집 한 권을 우송했다. 불현듯 나는 시인의 통통한 볼이 생각났다. 그러나 류 시인한테는 섭섭한 소리이겠지만, 지금 보기에 좋다는 저 볼도 세월을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저것도 조만간 바람 빠진 축구공이 되겠지. 하, 그래도 애써 낸 작품집을 보내준 사람한테 이런 망발이나 해대다니, 역시 나란 인간은 몹쓸 부류이다. 내가 이렇게 반성하면서 시집을 펼치니 이런 글이 보인다. 봉투를 열자 전갈이 기어 나왔다 나는 전갈에 물렸다 소식에 물렸다 전갈이라는 소식에 물렸다 이게 류 시인의 시 「전갈」 첫째 연이다. 이걸 읽자마자 나는 근래 내 주위에 출몰했던 전갈이 생각났다. 나는 봉투를 열지도 않았는데, 이것이..
연속극에야 언제나 신데렐라 이야기로 넘치지만, 현실에서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그게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실지로 동화와 같은 이야기가 아주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신데렐라가 안으로 멍이 들면 어떻게 하느냐. 각자가 합리성을 추구하지만, 그 내용이 너무 달라 서로 용납하지 못하면 어떻게 하느냐. 나는 혹시 그 멍이 나중에 앙금으로 되지나 않을까 걱정스럽다. 나도 더러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다. 도대체 말이 되지 않는 일들이 실지로 일어나니까. 내 어찌 자신의 이해력을 믿겠는가? 당장 누가 라면 한 그릇을 끓여도 저마다 처리하는 방식이 다 다르다. ‘라면을 끓였으면 함께 있는 사람더러 권할 줄도 알아야지, 어째 저 혼자만 먹느냐.’ 세상에는 이런 부류만 있는 게 아니다. ‘내가 이미 싫다고 했는데, 왜 ..
옴마니반메훔! 밥이 하늘이었다. 사람들은 쉬이 다반사(茶飯事)를 말하지만, 그러나 누구라도 다(茶)를 잊을 수는 있어도 밥을 거를 수는 없다. 그러니 우선 수저부터 한 매 챙겨야지. 설령 밥이야 밖에서 험하게 먹더라도 수저는 꼭 좋은 걸로 한 매 챙겨야지. 참선(參禪)이 다 뭐더냐! 이 수저가 바로 화두(話頭)로다. 나도 이미 예전에 이걸 실감했다. 짝이 맞지도 않는 수저를 잡고 밥을 먹자니, 어쩐지 내 인생마저 비루해져. 그래서 나도 한때 반듯한 수저 한 매를 챙겨 다녔다. 수저를 들고 다니는 내 소행을 두고 메뚜기는 논에서 별스럽다 했다. 그 말이 아주 그른 것도 아니다. 그러나 나도 남의 집이나 식당에 손님으로 가서 내 수저로 밥을 먹지는 않았다. 나는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살고자 했으니까. 그런..
S군! 나는 지금 그대가 일찍이 와서 본 일이 있는 C사(寺)에 와서 있는 것이다. 그때 이 사찰 부근의 지리라든지 경치에 대해서는 그대가 나보다 잘 알고 있겠으므로 여기에 더 쓰지는 않겠다. 그러나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이 숙사는 근년에 새로이 된 건축이라서 아마도 그대가 보지 못한 것이리라. 하지만 그 청렬(淸洌)한 시냇물을 향해서 사면의 침엽수 해중(海中)에서 오직 이 집안은 울창한 활엽수가 우거져 있기 때문에, 문 앞에 손이 닿을 만한 곳에 꾀꼬리란 놈이 와 앉아서 한시도 쉴 새 없이 노래를 불러 주는 것이다. 내 본래 저를 해칠 마음이 없는지라, 저도 그런 눈치를 챘는지 아주 안심하고 아랫가지에서 윗가지로, 윗가지에서 아랫가지로 오르락내리락 매끄러운 목청이란 귀엽기도 하려니와, 그 노란 놈이 꼬..
거리에 마로니에가 활짝 피기는 아직도 한참 있어야 할 것 같다. 젖구름 사이로 기다란 한 줄 빛깔이 흘러 내려온 것은 마치 바이올린의 한 줄같이 부드럽고도 날카롭게 내 심금(心琴)의 어느 한 줄에라도 닿기만 하면 그만 곧 신묘(神妙)한 멜로디가 흘러 나올 것만 같다. 정녕 봄이 온 것이다. 이 가벼운 게으름을 어째서 꼭 이겨야만 될 턱이 있으냐. 대웅성좌(大熊星座)가 보이는 내 침대는 바다 속보다도 고요할 수 있는 것이 남모르는 자랑이었다. 나는 여기서부터 표류기(漂流記)를 쓸 수도 있는 것이다. 날씬한 놈, 몽땅한 놈, 나는 놈, 기는 놈, 달리는 놈, 수없이 많은 어족(漁族)들의 세상을 찾았는가 하면 어느때는 불에 타는 열사(熱砂)의 나라 철수화(鐵樹花)나 선인장들이 가시성같이 무성한 위에 황금 사북..
날마다 천변을 산책하면서 저녁노을을 마주한다. 해를 품은 노을이 오늘도 서쪽 하늘을 능소화 꽃빛으로 물들인다. 연방 숨이 넘어가는 다홍빛 해는 오늘따라 한낮 동안 하늘에 떠 있을 때보다 훨씬 크고 웅장하다. 장엄한 일몰 풍경이 인생의 노년기 같아 보여서 마음이 애잔해진다. 노년은 나이든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다. 젊은 세대도 결국에는 노년에 다다르니 전세대가 고민해야 할 숙제다. 어떻게 해야 후회 없는 노년을 맞이하게 될까. 노년기는 6070세대와 8090세대로 나눌 수 있다. 8090세대는 일제강점기 때 태어나서 나라 잃은 설움과 핍박을 받다가 광복 후에는 6.25 전쟁까지 겪는 격랑의 세월을 살았다. 6070세대는 6.25 전쟁 전과 후에 태어나서 과밀 교실에서 다다귀다다귀 엉겨 붙어서 공부를 하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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