딴딴하고 말쏙한, 그러면서도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지는, 아보카도 씨에게는 씨앗보다 씨알이 더 잘 어울린다. 기름진 살 속에서 막 발굴된 그것은 멸종된 파충류의 알 화석을 닮았다. 세상을 향해 분출시키고 싶은 강렬한 에너지가 강고한 침묵으로 뭉뚱그려져 있다. 씨알이 내게 침묵으로 명한다. 날 심어 줘, 쓰레기통 같은 데에 버리지 말고 다시 흙으로 돌아가게 해줘……. 수박씨나 복숭아씨 같은 것을 버릴 때도 마음이 썩 편하지만은 않았다. 애써 무르익힌 과육을 송두리째 헌납하는 푸나무들에게도 통 큰 계산이 있을 법한데 인간들은 모르는 체 제 잇속만 챙긴다. 흙에 묻어 주면 수백 곱절 되돌아올 생산성을 원천적으로 박탈해 버리면서도 미안해하거나 고마워할 줄을 모른다. 심지도 버리지도 못한 씨알을 싱크대 위에 올려놓..
1950년대 중반 한국전쟁이 끝난 후, 미국의 어느 사회심리학자는 전쟁증후군으로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가 한국의 젊은이는 거의 발생하지 않는데 비해 미국의 젊은이들이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을 알고 이를 비교분석하기 위해 현지 조사차 한국에 왔으나, 각종 학술자료와 문헌을 조사하여도 그 원인을 밝혀낼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여행이나 해 보려고 삼복더위에 자동차를 타고 포장이 안 된 신작로를 달리다 땀을 식힐 겸 그늘이 좋은 도로변에서 간식 겸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이때 지열地熱에 의해 땅에서는 봄날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듯 솟아나는 안개 속에 사람 같은 물체가 움직이며 다가오는 모습을 보았다. 가까이 다가올수록 더 괴이한 것은 머리 위에는 자기 덩치만한 물건이 가득 찬 광주리..
낮달이 이울자 그림자가 물러갔다. 호위하던 무사들이 하나둘 처소에 든다. 내걸린 문패도 알전구도 없는 칸막이 거처에 발걸음을 부린다. 길 위를 점령한 된바람이 따라 들어와 무사들을 사열한다. 양털에 뒤덮인 어그 부츠가 회상에 젖어 있다. 폭설이 내린 지난겨울, 눈 속을 뒹굴며 만끽했던 환희의 순간을 되새김질 중이다. 동면에 들었던 샌들이 슬며시 눈을 뜬다. 서늘한 기운이 달려들자 소스라치게 놀란다. 아직은 나설 때가 아니라는 듯 몸을 웅크린다. 하루를 견뎌온 흔적들은 어둠을 타고 밀려온다. 접힌 시간으로 뒤축이 무너진 운동화는 뻣뻣한 힘을 놓아버린 지 오래다. 끈까지 풀어헤친 채 맥을 못 춘다. 쉰내 나도록 길을 누빈 구두는 연신 잠꼬대다. 돌부리에 걷어차인 비애로 꿈속을 헤매나 보다. 발가락의 자유를 ..
결혼 22년이 넘었다. 부부간의 전쟁을 주제로 글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았다. 승리한 이야기가 좋다고 했다. 진 기억만 있다고 했더니 시간 있으니 싸워서 이기고 쓰면 되지 않겠냐고 조언했다. 승리는 무슨 비기기라도 해봤으면 좋겠다. 싸우지 않고 목적을 달성하는 부전승(不戰勝)이 손자병법의 중심사상이라고 했던가. 여전히 나는 그의 상대가 못된다. 살면서 그가 이혼이라는 말을 꺼낸 적은 없다. 반면 나는 두 번 이혼이라는 말을 했다가 대패했다. 결혼 6년차가 되었을 즈음이다.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시댁이 있었다. 시아주버님의 사업실패는 시댁 집이 채권자에게 넘어가고 다른 형제들에게 엄청난 금전적 피해를 주는 등 온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았다. 남편은 부도내고 해외로 도피중인 형에게 빚을 내서 계속 뒷돈..
제11회 공무원문예대전 수필부문 행정안전부장관상 나팔꽃, 논냉이, 개별꽃, 자운영, 벚꽃 등 사월의 꽃이 떨어지면서 오월의 꽃이 핀다. 영산홍, 클로버, 씀바귀, 탱자나무꽃, 아카시아, 이팝나무꽃, 꽃과 꽃들이 앞을 다투어 오월이 왔다고 아우성이다. 오월의 하늘은 맑고 사람들은 산뜻하다. 무논에는 개구리 가족이 네 활개를 저으며 꽈리를 불어대는 것을 보니 이래서 오월은 가정의 달인가 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로 시골집을 찾아가는 걸음이 뜸해졌다. 그것은 어머니가 없는 집은 이미 집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면 어머니가 계시지 않은 집은 세상 밖으로 나오는 통로였는지도 모른다. 아버지조차 계시지 않는 집은 더욱 썰렁하다. 헛청에 무릎을 꿇고 있는 저 지게. 주인 잃은 지게가 봄이 온 지가 벌써 언제..
제18회 공무원문예대전 수필부문 인사혁신처장상 어머니의 기일이다. 아내가 제사상을 차렸다. 제사상이라고 해야 제수진설법에 의해 차린 것이 아니다. 소반 위에 영정을 모셔놓고 양쪽으로 촛불을 켜 놓았다. 영정 앞에는 꽃바구니가 자리를 잡았다. 어머니가 좋아하시던 장미와 안개꽃을 장식한 꽃바구니다. 살아생전에 꽃을 좋아하신 어머니였다. 추석 성묘나 어머니의 묘소에 갈 일이 있으면 우리 형제들은 국화가 아닌 꽃다발을 만들어 가지고 갔다. 제사상에 놓은 가지가지 꽃들을 섞어 만든 꽃바구니를 내려다보는 어머니는 금방이라도 웃으시며 걸어 나올 것 같다. 꽃바구니 앞, 하얀 접시에 놓은 숟가락이 눈에 띄었다. 한눈에 봐도 어머니의 달챙이 숟가락이었다. 순간 뜨거운 것이 울컥하더니 목구멍을 막았다. 오늘 낮에 찬장 속..
성복날 장레를 치르고 삼우제까지 보고는 나는 자유로운 몸이 되었다. 상제가 일곱명에 복인은 수십명이 넘는 장례인지라, 예상했던것 보다 나는 자유로운 행동을 취할수가 있었다. 큰댁에서 상을 당하였기 때문에 나는 침식은 언제나 내 집에 와서 하였다. 별로히 고단할것도 없어서 삼우제 본 이튼날 작정대로 나는 회창으로 광산구경을 떠나기로 하였다. 회창길은 처음이었다. 고을서 백리가량 남쪽으로 산골자기를 찾어 들어간다고 한다. 아홉시에 자동차가 떠나는데 언제나 만원이라고 해서 나는 차부에까지 일찌감치 올라가 시간을 기대렸다. 사돈뻘되는 사람이 그곳 면장으로 있는데, 그의 소개를 얻으면 광산의 기계시설을 소상히 구경시켜 줄것 이라고 집을 떠날때에 아버지는 그 분을 찾어 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는 그밖에도 누구 누..
조모님이 세상을 떠나셨다는 전보가 온 것이 해진 무렵이여서 부득이 밤 연한 시차를 탈 수밖에 없었다. 급행이면 다섯 시간도 안 걸리는 데를 이 차는 일곱 시간 이상을 잡아먹고 평양에는 해가 물끈 솟아 올을 때에야 도착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가는 시골은 평양서도 일백 육십리나 자동차로 들어가는 성천이라는 적은 고을이다. 이 차에서 내려서 성천 가는 척차를 얻어 타면 오정 전에 목적지에 이를 수가 있다. 고단은 하지만 평양서 하룻밤 묵지 않는 것이 편리는 하다. 어데 냉면집에 들려서 어북장국이나 한 그릇 사 먹고 시간 되기를 기대려서 자동차에 올르리 생각하는 것이다. 짐이랄 것은 없지만은 적은 가방이 하나 있는 것을, 마침 아이들도 모두 잠이 들었으니 정거장까지 배웅내고 온다고 안해는 앞서서 빽을 들고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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