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 데 없다.’는 옛 시조 가락은 인간의 능력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잠꼬대였다. 우거진 잡초 덤불 속에 철새가 깃들거나 모래 먼지만 흩날리던 황무지-. 강남이 사천 년 긴 잠에서 깨어나 바야흐로 ‘8학군’의 위용을 갖춰가고 있던 시절이었다. 산천도 인걸도 의구한 것이라곤 찾아볼 수 없이 변해 버린 그 신도시의 어느 유치원 아이들이 내 친구의 도자기 공방으로 실습 겸 소풍을 나온 일이 있었다. 병아리 떼 같은 아이들과 어미닭 같은 선생님들이 어울려 흙반죽을 주물러가며 ‘실습’에 열중하고 있는 모습이 귀엽고 신통해서, 아직은 그럴 나이가 아닌데도 손자손녀를 둔 할아버지들이 부러울 지경이었다. 아이들이란 하는 짓마다 천방지축이어서 늘 어른들을 긴장시킨다. 도자기 공방에는 크게 위험한 ..

오늘이 경칩이다. 때맞춰 비까지 내렸다. 봄이 왔다는 신호다. ‘나비 앞장 세우고 봄이 봄이 와요.’ 이런 동요대로라면 나비도 나왔으련만 아직 그런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가슴속에서는 벌써 작은 설렘 같은 것이 인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기쁨인지 슬픔인지 분간할 수가 없다. 봄이 희망의 계절, 약동의 계절, 환희의 계절이라면 응당 기쁨이어야 할 터이지만 선뜻 기쁘다고 말할 수 없고, 그래서 슬픔인가도 싶지만 왜 슬픈지를 꼭 집어 설명할 근거도 없다. ‘봄처녀 제 오시네. 새 풀 옷을 입으셨네. 꽃다발 가슴에 안고 뉘를 찾아오시는고.’ 그렇다. 봄을 맞는 마음이 기쁨인지 슬픔인지 스스로도 가늠할 수 없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새 풀 옷 입고, 꽃다발 안고 사뿐사뿐 걸어오는 봄처녀가 나의 신부라면..

우리나라 곳곳에는 탑과 관련한 이름이나 지명이 많다. ‘탑동’, ‘탑리’, ‘탑골’ 등 참 익숙한 이름이다. 알고 보면 그곳에 무엇이 있거나, 있었던 것을 직시한다. ‘탑동리’를 처음 들었을 때, ‘탑이 있는 마을이구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든 것도 지금까지 오며 가며 들었던 지명에 대한 익숙함 덕분이다. 탑동리를 찾아가는 길은 그리 업렵지 않았다. 금수리를 찾으며 헤맬 때 ‘탑동리’라는 이정표를 보았다. 간성읍에서 언덕을 넘어 금수리는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가지만, 직진하여 쭉 들어가면 탑동리에 이른다. 탑동리로 접어드는 곳곳엔 군부대와 군사시설이 산기슭마다 자리해 있었다. 그런 것들이 생경해 살짝 두려웠다. 산골짜기로 접어들자 풍경은 점점 낯설게 변해갔다. 길은 점점 좁아졌고 노면은 험했다. 보이는 곳..

보일러 수리를 위해 기사를 불렀다. 약속 시간을 훌쩍 넘겨 도착한 기사는 앞집의 수리가 길어져 시간이 늦었노라 했다. 보일러 배관상태를 살펴보던 청년기사는 주방과 거실을 부지런히 오가며 보일러 수리를 끝냈다. 밖의 추운 날씨를 생각해서 차를 한 잔 건넸더니 급한 다음 약속이 있어서 빨리 가야한단다. 다시 권해 보았지만 청년은 급하게 가방을 챙겨들고 인사와 함께 문밖으로 사라졌다. 저녁 장을 보려고 지갑을 찾았다. 지갑을 둘 만한 곳은 다 찾아보았지만 없었다. 가슴이 철렁했다. 생각해 볼 여지가 없었다. 서둘러 지갑을 들고 사라졌을 기사에 대한 괘씸한 마음은 몇날 며칠을 두고 누그러들지 않았다. 잃어버린 돈도 돈이지만 카드와 신분증에 대한 해결이 보통 번거로운 일이 아니었기에 짜증이 더했다. 눈에 띄는 곳..

아무리 절세의 미인이라 하더라도 떠나는 사람의 그 뒷모습은 참 슬프다. 얼른 보기에 얼굴 생김이 별 것 아니어서 다음에 확답을 하겠다고 말했더니 벌떡 일어나 바바리코트를 펄럭이며 떠나는 그 남자의 뒷모습이 하도 멋져 보여서 결혼을 승낙했다는 어느 여인의 별난 결혼 승낙 에피소드가 참 재미있다. 이것만이 별나고 재미있는 뒷모습이고, 그 외는 대부분의 경우 처량하고 슬프다. 주자청(朱自淸)의 수필 ⟨뒷모습⟩도 나이 들고 쇠약해진 아버지의 쓸쓸한 뒷모습을 그렸으며, 나 또한 서울 연희동 단독주택에서 살 때 어려서부터 강아지를 좋아해 하얀 털의 강아지를 한 마리 사서 기르다가 커가면서 이 녀석이 밤마다 수놈을 부르는 늑대 울음소리에 만정이 떨어져 개장수한테 그냥 데리고 가라고 했더니 그 뒷날 일요일 아침에 당장..

불꽃처럼 튀어오른 산봉우리가 한껏 얼었다. 저 완벽한 풍경을 따라 설악으로 드는 길은 온통 순백으로 빛났다. 한없이 눈부셨기에 눈이 멀 것만 같았다. 어릴 적 벽촌에서 태어난 덕분에 눈밭에서 뒹굴며 자랐지만 유년을 잃어버린 후, 도시의 겨울은 겨울답지 않아서 겨울을 모르고 살았다. 설악엔 때마침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나무에도, 산봉우리에도, 얼어붙은 쌍천에도 눈은 소리 없이 내렸다. 설악은 오랫동안 익숙한 이름이었다. 학창 시절 수학여행을 와, 두 밤을 자고도 아무런 기억 없이 떠났던 산이기도 했다. 그러나 삶 한편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와 여유와 낭만으로 떠오르기도 했다. 기념품 가게 주인이 동그란 옥돌에 직접 새겨주던 문구며, 압화로 만들어 팔던 에델바이스, 끝맛이 아릿했던 머루주, 아슬아슬하게 놓였던 ..
인어 공주는 마녀를 찾아갔어요. "이 꼬리 대신 다리를 갖게 해 주세요." "그러면 네 아름다운 목소리를 내게 주어야 한다. 만약 왕자와 결혼하지 못하면 죽어서 거품이 되고 말아. 그래도 좋으냐?" "네, 왕자님만 볼 수 있다면……." 여기까지 읽었는데도 아들은 아무런 반응이 없다. 쌔근쌔근 잠이 들어 있었다. 유치원생인 막내가 작은 사고로 집 근처에 있는 정형외과에 입원한 지 열흘이 넘었다. 그동안 움직이지 못하는 아들의 침대 머리맡에서 동화책을 수십 권도 넘게 읽어 주느라 나는 동화구연가가 다 되었다. 곤히 잠든 아들에게 이불 자락을 덮어 주고 병원 복도로 나와 자판기 커피를 한 잔 마신다. 온갖 약품 냄새와 신열로 들뜬 신음 소리가 밤새 뒤섞여 굴러다니는 병실 공기는 사람을 어지간히 지치게 한다. ..
세종문화회관에 음악 동아리회(이상만 회장) 초대로 ‘레일을 따라 붉은 칸나의 바다로’ 연극을 보러 갔다. 이 연극은 김지나 작가가 5년 전 국내에서 발생한 외국인 노동자의 투신 사건을 계기로 이주민에 대한 주제인데 어둡고 딱딱한 부분이 많았다. 이 작품은 재일 한국인, 국외 입양아, 고려인의 역사를 담아내며, 이주자들을 시공간의 재배치를 통해 감각적으로 보여주었다. 극이 시작되며 누군가의 추락사고로 멈춰져 있는 열차 안, 저마다의 짐을 안고 어디론가 가려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 고려인의 후손으로 한국에서 정착하려 했던 남매사이 명과 만삭의 연화, 미국에서 자란 스티브와 소피아, 그리고 노년의 사나이가 마지막 칸에 함께 있다. 그리고 연극의 소재를 잘 전달하기 위해 2개월에 거쳐 언어 트레이닝을 받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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