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 미역에서 풀내가 난다. 미역도 등줄기 꼿꼿한 한그루의 바다나무다. 줄기, 잎사귀, 뿌리의 형태를 제대로 갖추고 척박한 바윗덩어리에 뿌리박고 포자로 번식하여 일가를 이루는 것이 나무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몇 년 전에 동남아의 어느 바다에서 스킨스쿠버로 물속 여행을 할 기회가 있었다. 소음 한 조각 들리지 않는 고요한 바다 속에 끝없이 이어지는 미역 숲이 마치 육지의 밀림과도 같았다. 우리나라와는 달리 미역을 식용으로 하지 않는 나라이니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처녀 숲인 셈이다. 물속에서 천천히 헤엄치며 미역이 물결 따라 일제히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을 꿈꾸듯 바라보았다. 재래시장에 나갔다가 참기름 바른 듯 반질거리는 미역을 사왔다. 철지난 미역이라 날것으로 먹기에는 좀 억세..
2017 동양일보 신인문학상 당선작 겨울은 기별도 없이 오고 있었다. 겹겹의 푸른빛으로 빛나던 하늘도, 햇솜처럼 닿아주느라 분주하던 햇볕도 어느새 창백하리만치 투명하다. 코끝을 타고 들어와 손끝까지 저리게 하는 이른 된바람이 떠나는 가을을 절감하게 한다. 아무리 손끝을 감싸 쥐고 주물러 보아도 임시방편일 뿐이다. 감각이 둔해진 것은 손끝뿐인데 온몸에 냉기가 감도는 듯하였다. 이럴 땐 알싸하게 목구멍을 타고 들어와 알차고 뜨거운 부피로 온몸을 일어나게 해 줄 것이 필요하다. 진한 생강 향을 떠올렸다. 비스듬히 비추던 햇볕이 금방이라도 누워버릴까 걱정이 되었다. 생강을 사기 위해 시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마음만큼 조급해졌다. 소란함이 들끓어 편안함이 우러나는 곳이 시장이다. 골라 골라, 싸다 싸, 구경은 거..
2020 동양일보 신인문학상 당선 물이 펄펄 끓는다. 그저 멍하니 주전자를 바라본다. 부글부글하던 주전자는 이내 뚜껑을 들썩인다. 불은 노랗게, 파랗게, 빨갛게 시시때때로 변하며 물이 다 끓었음을 온몸으로 알리고 있다. 굉음을 내며 금방이라도 뭔가가 터질 것 같은 느낌이다. 이글거리는 불꽃을 한참 바라보다 나는 힘없이 보리차 티백 하나를 주전자에 넣었다. 터덜터덜 소파로 가 앉은 나는 생각에 잠긴다. 영채가 태어난 뒤로는 한 시도 고요할 틈이 없던 우리 집이었다. 오랜만에 찾아온 고독이 소름 끼치도록 밉다. 눈이 제 아빠를 닮아 서글서글하고, 눈동자는 나를 닮아 투명한 갈색을 띤 애였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애였다. 금방이라도 그 애가 엄마 하며 뛰어올 것 같다. 하지만 정말 이상하게도 난 영채를 ..
2016 제23회 동양일보 신인문학상 당선 한 폭의 수묵화가 펼쳐진다. 시간이 응축된 결 사이로 먹빛 농담들이 그윽하게 번져 있다. 백년의 세월 속에 잠시 머물렀던 시간들이 망설이듯 멈춰 섰다간 일필휘지 굽이쳐 흘렀다. 마을회관을 지으려고 빈 집을 허물면서 베어진 감나무였다. 차탁으로 귀히 쓰인다는 지인의 말을 듣고 찾아간 자리였다. 반으로 자른 단면을 손으로 쓰다듬으니 아릿한 기억들이 묻어나온다. 감이 주렁주렁 달린 시골마을이 열두 폭 병풍처럼 펼쳐진다. 가을걷이가 끝날 무렵이면 담장을 넘어온 가지마다 홍시가 탐스럽게 익었다. 초가집 일색인 마을에서 단 하나 뿐인 기와집이 할머니의 집이다. 고샅길 막다른 곳에 이르면 솟을대문이 어린 나를 압도했다. 거동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증조할아버지가 아래채에 기거..
2017 제12회 '머니투데이' 경제신춘문예 대상 가게 앞에는 주인공인 휴대폰보다 조연들이 북적인다. 출연하는 조연도 자주 바뀐다. 라면, 각티슈, 세제 등 저가의 생필품에서 노란 장바구니가 달린 고가의 자전거까지 다양하다. 우리 동네에는 ‘백년통신’이란 이름의 휴대폰 대리점이 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신제품이 쏟아지는 IT 업종에 ‘백년’이란 상호는 어울리지 않는다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묘한 신뢰감을 준다. 몇 달이 못 되어 사라지는 가게들과 달리 백 년 동안 든든히 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것 같은 기분 좋은 착각도 하게 만든다. 당연한 얘기지만 백년통신은 백 년 전부터 우리 동네에서 휴대폰을 판 건 아니다. 개업 1주년 기념 사은행사도 못 하고 문을 닫은 ‘시애틀’이란 미용실 뒤를 이은 가게다. 재작년..
2011 경남신문 신춘문예 당선 ‘좋은 인연’ 모임에 가는 날 오래된 옷 한 벌을 꺼내 손질한다. 집안에 경사가 생기거나 그리운 사람을 만나는 날 평소에 잘 입지 않아 장롱 깊숙이 넣어둔 누비옷을 꺼내 입게 된다. 누비옷은 평생을 입어도 좋을 한 땀 한 땀 수를 놓은 정성이 깃든 옷이라 입을 때마다 흐트러진 마음을 가다듬게 한다. 어느 해 가을, 십 년 넘게 친자매처럼 지내오던 차(茶)벗님과 소원해 오던 누비옷 한 벌씩을 장만하였다. 소재는 값비싸지 않고 질긴 광목에다 자연염색을 한 옷감으로 취향과 개성에 따라 골랐다. 형형색색의 옷감들 사이에서 견본으로 만든 쪽빛으로 깃과 옷고름을 빼어 낸 시대를 거스르는 듯 보이는 누비저고리 하나가 눈길을 붙들었다. 앞 섶 품이 길고 넓어 여유로워 보이고 욕심과 조급..
3월로 들어서니 온 누리가 봄 내음으로 가득한 듯하다. 꼭 기분 탓만은 아닐 것이다. 개암나무 수꽃이 슬그머니 늘어지기도 했거니와, 오리나무 가지에도 푸른 물이 올랐다. 볕 바른 곳에서는 빨간 볼연지를 바른 광대나물이 헤실헤실 춤을 추고, 꽃등에는 봄소식을 물어 나르느라 분주하다. 변함없이 찾아오는 흔하디흔한 풍경이지만, 언제나 느끼는 생명의 경이로움이기도 하다. 한때는 특별한 행위나 생각만이 의미 있는 것이라 여긴 적이 있었다. 푸새 하나를 보더라도 남보다 먼저 봐야 하고, 희귀하거나 자생지가 한정된 야생화를 찾는 일이야말로 진정한 식물탐사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쉬이 만날 수 없는 식물이 어느 곳에서 발견됐다는 이야기가 들리기라도 하면 불원천리, 기어이 카메라에 담아 오고는 했다. '드물거나 색..
읍내를 관통하는 강변 산책로를 걸었다. 강의 둔치에다 인공적으로 만든 길이다 보니, 걷기에는 좋을지 몰라도 나무 한 그루 없는 휑한 길이다. 나름 신경을 써서 여러 가지 식물들을 심어 놓기는 했지만, 철 따라 일부러 심는 꽃들이 어디 잡초만 하겠는가. 가시상치며 달맞이꽃, 뚱딴지같이 토종 아닌 귀화종이 더 무성하게 자라 키를 넘기고 있다. 외국에서 귀화해 온 동식물들이 기존의 토착 생태계에 교란을 일으킨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외래종이 들어와서 살지만, 그중에서도 피해가 심각한 종류들은 환경부에서 ‘생태계교란종’으로 지정하여 특별히 관리하는 실정이다. 비교적 근래에 들어온 생물이라 천적도 마땅찮고, 약삭빠르게 잘 적응해 번성하니 그 퇴치에 들어가는 비용 또한 만만찮다고 한다...
- Total
- Today
-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