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꼴이 초췌하여 가끔 푸대접을 받는 일이 있다. 호텔 문지기 한테 모욕을 당한 일까지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나는 소학교 시절에 여름이면 파란 모시 두루마기를 입고 다녔다. 그런데 새로 빨아 다린 것을 입은 날이면 머리가 아파지는 것이다. 그러다가 두루마기가 구겨지고 풀이 죽기 시작하면 나의 몸과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중학교 시절에는 고꾸라 교복 한 벌, 그리고 여름 후시모리 한 벌을 가지고 2년 동안 입었다. 겨울 교복 바지는 절어서 윤이 나고, 호떡을 먹다 떨어뜨린 꿀이 무릅에 배여서 비오시는 날이면 거기가 끈적끈적하였다. 저고리 후끄는 언제나 열려 있었다. 교복을 사서 처음부터 채우지 않고 입던 터이라 목이 자린 뒤에는 선생님이 아무리 야단을 치셔도 잠글래야 잠글 수가 ..
동기들 모임에서 '등산은 왜 하는가?'가 화제에 오른 적 있다. 그러자 누가 선뜻 '산이 거기에 있기에' 힐러리경의 말부터 꺼낸다. '그 말은 멋만 부렸지, 좀 애매한 이야기 아닌가' 하고 반문했더니, 멋진 대답 둘이 나왔다. '고마 간다.' '꽃 보러 간다' 였다. '고마'란 진주 사투리로 그냥 아무 뜻 없이 간다는 말이고, 꽃 보러 간다는 것은 순전히 우스개 말이다. 꽃이 무엇인가. 해어화(解語花), 즉 등산 오는 여인 보러 간다는 것이다. 한바탕 웃었다. 불경이나 성경을 읽고, 필묵(筆墨)으로 한시를 써보거나, 바둑을 두거나, 노장(老莊)을 배워보는 것이 노년의 취미일 것이다. 그 외에 가장 어울리는 취미는 답산(踏山)일 것이다. 백발노인이 지팡이 짚고 산기슭 거니는 모습은 신선을 연상시킨다. 등반..
지름티 고개는 이제 본래의 산등성이로 돌아갔다. 마을의 서북쪽 갈뫼봉과 동북쪽의 유지봉을 이어주는 산등성이, 마을을 병풍처럼 둘러치고 있는 이 산등성이의 중간쯤, 산세가 기개(氣槪) 죽이고 주저앉은 자리가 지름티 고개다. 이 고개는 협촌(峽村)인 우리 마을 버들미에서 대처(大處)인 충주로 나가는 길목으로, 걸어다닐 수밖에 도리가 없던 시대에는 괴산 장에서 충주 장으로 옮겨가는 보부상(褓負商)들도 넘나들던 지름길이었다. 한때는 온종일 인적이 끊이지 않던 큰 고개였으나, 정부 방침에 의해서 운행결손을 보조해 주는 벽지노선이 개설되고 하루 두 번씩 군내버스가 드나들더니 고개의 인적이 끊어지고 말았다. 지름티 고개뿐이랴. 전국의 고개는 교통수단의 발달과 더불어 다 사라졌다. ‘사람 사는 한 평생이 고개 하나를 ..
어느 날 글을 쓰려고 컴퓨터를 열었다 문장 한 줄을 쓸 때까지는 몰랐다 자판을 눌러도 마침표가 찍히지 않는다는 것을 이게 웬일이지 쉼표와 물음표도 마찬가지다 부호를 찍을 수 없게 되자 숨이 막혀 오고 다음 문장을 이을 수 없다 자판이 이상해진 것 같아 입력의 문자표를 찾았다 일반 구두점에 필요한 문장부호들이 주르륵 다 들어있다 오늘은 화원의 꽃을 보듯 그 모습이 화사하고 정겹다 열기만 누르면 된다 좀 번거롭지만 어쩔 수 없지 그런데 그조차도 안 된다 느낌표 쉼표 따옴표 말줄임표 다 있는데 도대체 왜 안 되는 건지 한 줄에서 더 나가지 못한 채 부호가 있는 자판이란 자판을 한 번씩 눌러보고 있는데 갑자기 화면에 이상한 글이 뜬다. “우리 찾으려고 애쓰지 마. 활자의 종노릇이 싫어서 떠나는 거니까. 소리 한..
봄비ㅡ 봄비는 겨우내 딱딱하게 얼어붙은 땅을 두드리며 온다. 비들은 오, 저 "시체들의 창고"(파블로 네루다)인 땅을 맹인이 지팡이로 두드리듯 두드린다. 그 소리를 들으며 얼어붙은 땅은 풀리고 땅속에 숨은 씨앗들은 싹을 땅거죽 밖으로 밀어낸다. 봄비가 충분히 내리고 난 뒤에야 작약의 붉은 움이 돋고 모란의 묵은 가지들에도 꽃눈이 돋는다. 들창 너머로 혼자 내다보는 봄비는 쓸쓸하다. 곡식이 있으면 밥을 끓이고 곡식이 끊기면 굶는다. 하루도 거르지 않는 일은 책 읽는 것이다. 깊은 산속 쑥대 갈대 아래 숨어 사는 오류선생이나 다름없다. 이승의 인연들을 끊고 시골구석에 들어와 빗소리나 키우며 사는 건 그윽하지도 슬프지도 않다. 다만 조금 적적할 뿐이다. 살을 맞대고 체온과 냄새를 킁킁거리며 잠들 이가 곁에 없..
아, 드디어 집이다. 늦은 밤, 곤죽이 되어 택시에서 내렸다. 오늘도 하루라는 숙제를 마쳤다. 불 꺼진 아파트의 창들, 새벽의 도시는 어쩜 이렇게 천연덕스럽게 잠들어 있을까. 하수구로 흘러드는 물줄기에 도둑고양이 한 마리가 고개를 늘어뜨리고 있다. 홀짝홀짝 물을 마시며 사람 눈치를 살피는 그 가여운 목선이 아릿하다. 손목에 찬 시계를 본다. 정오에 멈춰있다. 내가 어금니로 음식을 으깨어 먹기 바빴던 그 시간, 이 녀석은 소리도 없이 죽었던 거다. 그 놈의 밥이 없어서. 더운 물에 몸을 씻고 자리에 누운 지 몇 시간 되지도 않았는데, 아침잠을 깨우는 문자메시지가 날아왔다. 맞다, 오늘이 월급날이었지. 잠결에 실눈을 뜨고 액수를 확인한다. 참 고마운 일이다. 때 되면 꼬박꼬박 통장에 밥을 넣어주니. 덕분에 ..
매일 아침 하던, 등산이라기보다는 산길 걷기 정도의 가벼운 산행을 첫눈이 온 후부터는 그만두었다. 산에 온 눈은 오래 간다. 내가 다시 산에 갈 수 있기까지는 두 달도 더 기다려야 할 것 같다. 걷기는 내가 잘 할 수 있는 유일한 운동이지만 눈길에선 엉금엉금 긴다. 어머니가 눈길에서 미끄러져 크게 다치신 후 칠팔 년간이나 바깥 출입을 못하다 돌아가시고 나서 생긴 눈 공포증이다. 부족한 다리 운동은 볼일 보러 다닐 때 웬만한 거리는 걸어 다니거나 지하철 타느라 오르락내리락하면서도 벌충할 수 있지만 흙을 밟는 쾌감을 느낄 수 있는 맨땅은 이 산골 마을에도 남아있지 않다. 대문밖 골목길까지 포장돼 있다. 그래서 아침마다 안마당을 몇바퀴 돌면서 해뜨기를 기다린다. 아차산에는 서울 사람들이 새해맞이 일출을 보러오..
‘운다고 옛사랑이 오리오마는….’ 구성진 옛노래가 기타선율에 얹혀 들려온다. 느닷없는 소리에 순간 모두 멈칫했다. 시아버지의 목소리였다. 첫 제삿날이다. 어머님이 유품을 정리하다 발견한 아버님의 노래가 담긴 카세트테이프를 친척들과 가족에게 들려주시는 것이다. 어머님 짐작에 30여 년 전에 녹음된 것 같다고 하셨다. 그렇다면 사십 대 중반이다. 목소리가 낭랑하게 젊다. 시숙부님들은 감회에 젖어 연신 감탄하시며 전축 가까이 다가앉으셨다. 저녁식사 준비로 분주하던 나도 잠시 마루 소파에 앉아 노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디잉 디딩 딩다다 디딩 당~, 아버님의 기타연주와 노래가 아마추어를 넘는 솜씨다. 우리는 잠시 침묵에 빠져들었다. 시집에서 결혼생활을 시작했을 때다. 시간만 나면 아버님은 안방에서 기타와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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