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먹듯이 담배를 먹는다고 한다. 모닥불을 피우듯 담배를 피운다고도 한다. 연기를 들이켜니 담배를 먹는다고 하겠으나, 죄다 넘기지 않고 입과 코 밖으로 연기를 품어내니 피운다는 말도 옳다. 먹으나 피우나 매한가지지만, 예부터 우리네 사람들은 대개 담배를 먹는다고들 하였다. 담배 연기는 마시는 연주(煙酒)요 연차(煙茶)이던 것이다. 매운 연기를 먹는 판에 못 먹는 것이 없고 안 먹는 것이 없다. 허구한 날 굶주리고 곯아서인지 먹는 데 이골이 났다. 욕을 먹고 나이도 먹는다. 눈칫밥도 밥이다. 빨래 풀 먹이고 연장에 기름도 먹인다. 어떤 권투 선수는 챔피언을 먹었다고 외쳤다. 옛말에 저 혼자 사또, 현감 다 해먹는다고 나무랐다. 국회의원을 해먹는다는 말은 만 번 옳다. 소금장수 얘기의 첫머리는 으레 ‘옛날 ..
문학 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내가 그렇게도 원하던 글쓰기에 관한 강의다. 주제는 '좋은 수필 창작론' 이다. 이 강의에 빠져드는 순간 머리에 번쩍 하는 게 있었다. 바로 저거다. 그만 그 낚싯바늘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나는 인의(仁義)와 절개(節介)를 존중히 여기는 고장인 경남 고성에서 해방되기 한 해 전 소작농의 집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삼대독자이신 아버지는 무남독녀였던 어머니를 만났다. 내 밑으로 내리 다섯의 동생을 더 낳은 것으로 보아 두 분의 어린 시절이 각각 무척이나 외롭게 지내셨나 싶었다. 아홉 남매나 되는 많은 가솔을 먹여 살리기 위해 아버지의 등짐은 무거울 수밖에 없었을 게다. 그래서인지 어릴 적 내 기억으로는 아버지는 늘 타지방에 나가 돈을 벌거나 아니면 남의 집으로 삯일을 ..
누구네 집 울타리인지 정갈하게도 다듬어 놓았다. 둘레길을 걷다가 잠시 낯선 집 탱자나무 울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의 울타리도 절반은 탱자나무였다. 나무 윗부분은 빽빽하게 잘 관리되어 담장으로서 훌륭했지만, 아래쪽은 구멍이 숭숭한 허점투성이였다. 멀리 정문까지 돌아가기 싫은 아이들의 쪽문이었고, 지각을 목전에 둔 학생들에게는 구원의 문이었다. 사랑이 묻어나는 점심 도시락이 슬며시 남모르게 넘나들었고, 길 가던 어른들이 곁눈질로 제 아이를 훔쳐보던 감시망이기도 했다. 더하여 아이들이 뛰노는 까르르한 소리가 넘어 나오고, 아지랑이 따라 봄기운이 스며드는 길목이기도 했다. 안과 밖, 학교와 외부를 가르는 담이지만 사실은 경계를 알리는 형식이었을 뿐이었다. 탱자나무가 꼭 무엇을 가로막는 금단..
발암산에 가는 길이다. 영산휴게소에 들렀다. 주차장이 알이 꽉 찬 옥수수처럼 빼곡하다. 봄맞이 여행을 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주말이다. 휴게소 식당으로 들어선다. 생각 했던 것 보다 한산하다. 된장찌개 하나를 주문하고 식당 종업원에게 말을 건네 본다. "관광 성수기인데 장사가 왜 이리 안 되죠?" 노려보듯 눈매가 곱지 않다. 그러더니 이내 체념 한 듯 한숨부터 내 쉰다. “저기를 보세요. 저러는데 장사가 되겠어요?” 벤치 부근에 몇 무리의 사람들이 왁자지껄하다. 저마다 일회용 밥그릇과 국 그릇, 수저를 쥐고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밥과 국을 열심히 퍼주고 있다. 화장실에는 기다리는 줄이 삼 십여 미터가 넘는다. 줄도 몇 개나 된다. 남자 화장실 소변기마다 서 너 사람이 대기하고 있다. 어떤 여자들은 아예 남..
원 문 적막했던 문 앞에 시종과 말이 가득하니 부족하게나마 상을 차려 신년 손님 대접하네 탁주 마다않는 임 파총(把揔)이요 떡국 맛좋다 하는 김 생원(生員)이네 羅雀門前僕馬闐 나작문전복마전 聊將薄具餉新年 요장박구향신년 不厭濁酒林把揔 불염탁주임파총 絶甘湯餠金生員 절감탕병김생원 - 이하곤(李夏坤, 1677~1724), 『두타초(頭陀草)』 4책 「새해 아침 장난삼아 배해체로 짓다[元朝戱作誹諧體]」 해 설 조선 후기 시인인 이하곤은 어느 해 설을 맞아 7수의 시를 지었다. 시 제목에서 보이는 ‘배해[誹諧]’는 풍자, 농담, 해학의 의미로, 진지하기보다는 가볍고 유쾌하게 묘사하는 것이 특징이다. 위는 7수 중 세 번째 수이다. 1구의 ‘나성문(羅雀門)’은 참새잡이 그물을 칠만큼 조용한 문이라는 뜻으로 찾아오는 이..
그 집 앞을 지나갈 땐 걸음이 한 박자 느려진다. 맑은 물방울이 하얀 꽃잎 위로 떨어지듯 가슴이 스타카토로 뛴다. 시들한 골목길에 오래된 집 한 채를 고치느라 며칠 뚝딱뚝딱 망치 소리가 들렸다. 별 생각 없이 지나쳤는데 어느 날 목공예 공방이 생기고 외벽에 싱그러운 아이비 화분 이 걸렸다. 그 집 앞을 지나는 아침, 푸드덕 잠을 깬 공기에서 박하 향이 난다. 스무 살 무렵 하늘색 우산을 쓰고 어느 집 앞을 지나가던 때도 가슴은 뛰는데 걸음은 느려졌다. 담장 너머로 채 벙글지 않은 목련꽃이 기웃거려 꽃에 눈을 두었던가, 꽃송이 사이로 보이는 창 언저리를 엿보았던가. 노랗게 떨어진 감꽃을 밟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피하는 척 걸음을 늦췄던가. 가슴 울렁거리게 하던 그 남자네 집 창에 어느 날 조롱박 넝쿨이 오르..
주점 밖에는 폭설이 쏟아지고 있었다. 어떤 이는 ‘한계령을 위한 연가’를 읊조리고 어떤 이는 돌아갈 길을 걱정했다. 한줌 회한과 그리움을 술잔에 섞어 마시는 밤, 사람들은 문득 말을 멈추고 하염없는 눈발에 시선을 던졌다. 우리는 자정이 넘도록 술잔을 기울이며 중년의 때 묻은 사랑에 대해 이야기했다.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삼삼오오 모인 자리였다. 무소의 뿔처럼 앞만 보고 달려온 생이었다. 다시 돌아간대도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수시로 목덜미를 잡아당기는 게 있었다. 한 번도 제대로 사랑해보지 않았다는 후회였다. 문득 닥친 인생의 노을 앞에서 사람들은 좀 더 솔직하고 뻔뻔해졌다. 구속과 질서라는 양면의 날을 가진 도덕의 경계를 이야기할 때는 정답을 찾지 못한 이의 머뭇거림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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