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뒷산에서 꾀꼬리 울음소리가 들린다. 송홧가루가 바람에 날리고 있다. 송화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 산지기 외딴집 눈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대고 엿듣고 있다// 박목월 시인의 시 이 나도 모르게 입안에서 맴돈다. 나는 눈먼 처녀처럼 눈을 감고 꾀꼬리 소리에 귀를 기우리며 시인에 대한 그리움의 소리를 듣는다. 느릅나무 속잎 피는 열두 고비를 청노루 맑은 눈으로 바라보시던 시인의 맑은 영혼이 그리운 하루다. 우리 집은 숲과 닿아 있다. 뻐꾸기, 꾀꼬리가 울고 송홧가루가 날리는 아름다운 숲과 함께 있다. 그래서 오늘 같은 날 김동리 선생의 수필 도 다시 음미하게 된다. 숲은 동양인에게 성격이 다른 신神의 이름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수목이 없는 세상은 아름다움도, 평화도, 기쁨과..
2020 토지문학제 평사리문학대상 늙은 석류나무에 다시 몇 송이 꽃망울이 맺혔다. 정원에 죽은 듯 서 있던 몸이었다. 봄꽃들의 잔치가 끝나갈 무렵 석류나무는 태아처럼 불그스레한 이파리를 살짝 내밀었다. 오뉴월 햇살 담뿍 머금으며 파릇파릇 몸집을 불렸다. 서른 끝자락에 이 집에 들어왔다. 적막한 마당에는 묵은 나뭇가지며 잡풀과 낮은 나무들이 뒤엉켜있었다. 한쪽에는 석류나무만이 하늘로 가지를 뻗친 채 푸르렀다. 뒷짐 진 터줏대감처럼 석류나무는 신혼살림 차리듯 들떠 들어오는 우리를 환하게 맞았다. 뜰에서 가장 오래 머문 곳은 석류나무 아래다. 책을 읽다가 눈이 침침해지면 그 그늘로 달려갔다. 뜨락의 꽃과 나비도 바라봤고, 담 안으로 날아든 한 마리 흰 비둘기도 지켜봤다. 구름이 그리는 흑백 그림들도 올려다보고..

재미있는 우화가 있다. 옛날 아리비아의 어떤 상인이 임종을 맞게 되었다. 그는 자기 앞에 세 아들을 불러 앉혔다. 그리고는 "내가 너희들에게 남겨 줄 유산이라고는 말 열일곱 필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고장의 습관에 따라 꼭 같이 나누어 줄 수는 없으니까 맏아들 너는 열일곱 마리의 반을, 둘째 아들 너는 3분의 1을, 그리고 막내아들 너는 전체의 9분의 1을 갖도록 하라." 고 유언을 했다. 얼마 후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재산을 나누어 가져야 할 삼 형제간에는 오랜 싸움이 계속되었으나 해결을 얻을 길이 없었다. 맏아들은 열일곱의 반으로 아홉 마리를 주장했다. 그러나 동생들은 아홉 마리는 2분의 1이 넘으니까 줄 수 없다는 것이다. 여덟 마리 반이 되지만 반 마리는 처리할 수가 없는 때문이다. 둘째 ..

제10회 백교문학상 우수상 풀무를 돌린다. 쇠바퀴가 삐걱대며 돌기 시작한다. 지나온 시간들은 사라지지 않고 어딘가에 흔적을 남기는가 보다. 푸르죽죽한 이끼로 뒤덮인 기억들이 바퀴를 타고 돈다. 프레임으로 돌아가는 흑백영화가 되어 과거의 소리를 들려준다. 봉창을 통해 흐르는 별빛과 달빛 소리, 타오르는 장작불 소리, 김을 올리는 가마솥의 하품소리, 부지깽이로 장단 맞추는 소리가 설핏 풀무에게서 들린다. 별스러울 것 없이 빙그르르 이는 소리에 마음이 하뭇해진다. 가슴에서 내놓는 한줄기 바람으로 한때는 호시절을 누렸을 풀무. 무쇠로 만들어졌으니 몸태의 질감은 무겁고 거칠다. 허나 속은 텅 빈 채, 가슴에 바람개비 하나 달고 바삐 돌아간다. 바람을 보내기 위해 얼마나 아파해야 했을까. 터져 나오는 한숨마저 어둠..
어둠을 드리운 장막을 들춘다. 음습한 기운이 끼쳐온다. 가지에 매달려 익어가지 못한 억울함에 신열로 들끓고 있는 걸까. 떫은맛 뱉어낼 때까지 아무도 건져주지 않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걸까. 좌정한 독 안에 들어앉아 밑바닥의 시간을 세고 있는 감이 있다. 누가 오는지도 모른 채 잎사귀 뒤집어쓰고 요지부동이다. 낮달과 밤달 아래 한 줌의 볕살 들이고 한 모숨의 바람 모아둔 몸이다. 시푸르뎅뎅할 때부터 주황빛 물들 때까지 온몸으로 껴안고 있던 탄닌이었다. 다녀간 천둥과 번개로 속에서 불길이 일고 후려치는 소낙비에 두들겨 맞을 때도 놓지 않고 붙잡고 있던 억센 기운이었다. 떫은맛 빼자고 소금물에 몸을 담근 절박함이 까슬하다. 하루분의 삶을 감당하기 위해 침몰했지만 해가 지는지 동이 트는지 알 수 없는 이 암흑이..

기쨩이라는 아이가 있다. 매끈한 살갗에 맑은 눈동자를 가졌는데, 볼의 혈색은 다른 집 아이들처럼 생기가 없다. 언뜻 보기엔 온통 노르끄레한 느낌이다. 엄마가 너무 귀여워해서 바깥으로 놀러 나가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라고, 이 집에 드나드는 미용사가 말한 적이 있다. 엄마라는 사람은 트레머리가 유행하는 지금 세상에, 고풍스럽게 (마게)라는 머리를 나흘마다 꼭꼭 틀어 올리는 여자로, 자기 딸을 '기쨩, 기쨩' 하고 언제나 간난애처럼 '쨩'을 붙여서 부른다. 이 엄마 위에 또 짧은 머리를 한 할머니가 있는데, 그 할머니가 또 '기쨩, 기쨩' 하고 불러댄다. '기쨩, 샤미센 선생님한테 갈 시간이야, 기쨩, 괜히 밖에 나가서 아무 집 아이하고 놀면 못써.' 그런 소리를 한다. 기쨩은 이런 까닭으로 좀처럼 밖에 나와..
2007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당선 아무리 봐도 그는 신이 내린 건축가임에는 틀림없다. 덫이라 하기엔 짜임새와 균형, 간격이 한 치의 빈틈도 없어 적어도 먹잇감이 걸리기 전까진 아름답고 섬세한 고품격의 구조물이다. 눅눅한 이불을 널려 베란다 방충망을 열어놓은 사이, 거미가 들어와 베란다 들창과 회벽을 축으로 그물을 짰나 보다. 그물의 얼개가 되는 발판실과 세로실은 거미 뱃속의 점액이 공기와 맞닥뜨리는 순간 굳어진 거미줄로, 거미의 이동을 위한 통로이면서 그물의 축을 이룬다. 그러나 정작 사냥의 비결은 가로실에 있다. 가로실은 공기와 접촉을 해도 끈적끈적한 끈끈이로 남아 걸려든 곤충을 옴짝달싹 못하게 한다. 물살처럼 퍼져나간 동심원의 한가운데 블랙홀에 거미는 낮게 엎드려 이 가로실의 미동을 감지한다. 어린..

밤 기차가 가는 소리는 흔히 긴 여행과 고향을 생각하게 해준다. 고향이 그리울 때면 정거장 대합실에 가서 자기 고향 이름을 외치는 스피커의 소리를 듣고 온다는 탁목(琢木)이도 나만큼이나 고향을 못잊어 했던가보다. 아버지기 손수 심으신 아라사 버들이 개울가에 하늘을 찌를 듯이 늘어서 있고 뒤 울안에는 사과꽃이 피는 우리집. 눈 내리는 밤처럼 꿈을 지니고 터키 보석 모양 찬란했다. 눈이 오면 아버지는 노루 사냥을 가신다고 곧잘 산으로 가셨다. 우리들은 곳간에서 강난콩을 꺼내다가 먹으며 늦도록 사랑에서 아버지를 기다렸다. 수염 덥석부리 영감에게 나는 으레 옛날이야기를 해 달라고 졸랐다. 그러면 영감은 "어제 장마당에 가서 팔고 와서 없어." "아이 그러지 말구 어서 하나만." "이거 또 성화 났군. 그렇게 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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