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도 작년 세모에 '텔레비젼'의 대량 월부가 있었다. '텔레비젼'을 놓으면 주부가 일손을 쉬게 되고, 애들의 공부에 지장이 많다는 통폐론에도 불구하고 이에 감연히 한몫 끼인 것은 무엇보다도 어린것이 아직 학령 전이요, 월부라는 편리점에서였다. 방의 크기로 보아 14인치라도 그리 작은 감이 없이 잘 조화가 되고, 더구나 화면이 일그러지거나 흔들리지 않으며 농담(濃淡)도 고르고 음향도 깨끗하여, 이 진귀한 문명의 산물이 내방객의 호기심을 끌기에 족했다. 그리하여 밤마다 저녁을 끝내고는 찾아오는 '팬'도 생기게 되었다. 꼬마도 물론 훌륭한 팬 노릇을 했다. 이렇게 몇 달을 지내는 동안에 이 이채로운 텔레비젼도 그리 변변치 못한 우리 살림의 다른 가구들과 제법 어울리게 되어 그대로 자리가 딱 잡히게 되었..
2008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당선 오랜만에 아버지 산소에 들렀다. 고향 집 안채는 먼 친척이 살고 있다. 잠실로 쓰던 아래채에는 어머니 아버지가 쓰시던 가재도구와 농기구들이 시간이 정지된 채 서 있다. 시대의 흐름에 밀릴 대로 밀린 잠박들도 모퉁이에 높이 쌓여있다. 금방이라도 누에가 기어 나올 것만 같다. 주인을 잃은 채 한 세월을 보내고 있는 잠박들 사이로 얼핏 어머니가 서있는 모습이 겹쳐온다. 비 오는 소리가 들린다. 층층으로 쌓아 올린 잠박 위의 수많은 누에들이 뽕을 먹느라 여념이 없다. 정겨운 소리이다. 초등학생인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잠을 자고 아침을 맞았다. 직사각형의 잠박은 누에를 칠 때 사용하는 채반이다. 가난이 일상인 시절 농촌에서는 누에치기가 큰 농사 중의 하나였다. 뽕밭이 푸르름으..
떨어진 두 사람이 낚시를 하고 있었다. 한 사람의 낚시에서는 연실 나오는데 또 한 사람의 낚시에서는 피라미 한 마리도 얼씬거리지 않는다. 한 마리도 못 잡은 사람이 연실 잡아대는 사람한테 가서 미끼를 무엇으로 쓰냐고 물었다. 떡밥을 쓴다고 했다. 자기도 떡밥을 쓰는데 한 마리도 나오지 않는 것을 보니 무슨 비결이 있지 않느냐며 가르쳐 달라고 조르는 것이었다. 너무 끈덕지게 조르는 통에 귀찮아서 송충이로 밑밥을 주었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는 뒷산으로 올라가더니 송충이를 잡아서는 짓이겨 흙과 섞어뿌렸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밑밥을 뿌리자 이윽고 고기가 잇달아 나오기 시작하고 연실 나오던 사람의 낚시에서는 입질이 끊어졌다. 송충이가 효과가 있다고 생각해 낸 그는 빈 도시락을 들고 뒷산으로 올라가 가득 잡았다...
지공족(지하철 경로우대)이 된지 6년째인 올해 들어서부터 나는 전철을 타면 버릇처럼 노약자석으로 간다. 앉아서 갈 확률이 높은 데다 마음도 편하기 때문이다. 지난해까지는 그러지 않았다. 내 딴에는 아직 다리 힘이 멀쩡해 구태여 노인입네 티를 내고 싶지 않은 알량한 자존심(?)에서 자리가 나도 선뜻 가서 앉지 않았었다. 게다가 노약자석에선 가끔 지린내 같은 기분 언짢은 냄새도 났고, 때로는 낮술에 취한 노인들이 침을 튀기며 시국을 개탄하고 젊은이들을 싸잡아 성토하는 바람에 귀가 피곤해지고 앉아 듣기도 민망했다. 이런저런 핑계로 나는 될수록 전철을 타면 중앙으로 가 두리번거리며 빈자리를 찾았다. 하지만 점차 눈치가 보였다. 꼭 젊은 사람들의 자리를 빼앗아 앉는 염치없는 늙은이가 되는 느낌이 강하게 들기 시작..
2015 제15회 수필과비평문학상 수상 왼손은 오른손이 부럽기만 해. 같이 태어났건만 늘 양지(陽地)니까. 반가운 사람을 만나면 오른손이 얼른 악수를 청하지. 어차피 왼손은 나서려는 생각도 없는데 말이야. 간혹 분에 넘치는 사람을 만날 때면 마지못해 왼손의 도움을 청하기도 하지. 그럴 때마다 얄미워 도와주고 싶지 않아. 하기 싫은 일은 왼손에게 미루고 좋은 일은 혼자 다 하려는 오른손 때문에 한두 번 속상한 게 아니거든. 왼손은 자신이 음지(陰地)라고 생각해. 오른손보다 몇 갑절 일해도 돌아오는 건 뒷전이기 때문이지. 오른손의 보조 역할만 하는 데다 한마디로 심부름꾼이야. 설거지할 때도 오른손은 부드럽고 예쁜 그릇만 가려서 닦아. 계란찜을 하여 냄비가 눌어붙었거나 닦기 힘든 솥단지는 슬그머니 왼손에게 미..
짜장면은 좀 침침한 작은 중국집에서 먹어야 맛이 난다. 그 방은 퍽 좁아야 하고, 될 수 있는 대로 깨끗지 못해야 하고, 칸막이에는 콩알만한 구멍들이 몇 개 뚫려 있어야 한다. 식탁은 널판으로 아무렇게나 만든 앉은뱅이어야 하고, 그 위엔 담배 불에 탄 자국들이 검게 또렸하게 무수히 산재해 있어야 정이 간다. 고춧가루 그릇은 약간의 먼지가 끼어 있는 게 좋고, 금이 갔거나 다소 깨져 있으면 더욱 운치가 있다. 그리고 그 안에 담긴 고춧가루는 누렇고 굵고? 억센 것이어야 한다. 식초병에도 때가 끼어 있어야 가벼운 마음으로 손을 댈 수 있다. 방석도 때에 절어 윤이 날듯하고, 손으로 잡으면 단번에 쩍하고 달라붙을 것 같은 것이어야 앉기에 편하다. 짜장면 그릇의 원형이 어떤 것인지에 관해선 알아본 바 없으나, ..
2016 경남신문 신춘문예 당선 꽃을 그린다. 하얀 고무신에 정성을 들여 다섯 개의 빨간 꽃잎과 중앙에 노란 수술도 그려 넣는다. 붓 끝에서 작은 꽃밭이 생겨났다. 세상에서 하나뿐인 꽃신이 될 것 같다. 색감을 깔끔하지만 조금 밋밋한 느낌이다. 파란색과 노란색의 물감을 섞어 초록색 잎을 피워놓으니 바람이라도 살랑대며 불어올 것 같다. 마음 같아서는 하늘을 날아오르는 비천상飛天像이라도 그려보고 싶지만, 붓끝은 그런 마음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단장을 마친 꽃 신발을 신고 다녀야 할 것인지, 아니면 장식용으로 두어야 할 것인지 망설여진다. 때가 묻어서 씻게 된다면 애써 그려 넣은 꽃물이 빠지지 않을까 하는 기우가 앞서기도 한다. 가진 만큼 걱정도 많아진다고 하더니, 산란한 마음이 저울질을 한다. 어린 시절..
2009년 동양일보 신인문학상 당선 웅장한 조각품 앞에서 입이 딱 벌어졌다. 간단하게 구경만 하기는 너무 미안한 작품들이었다. 책 속에서 흑백사진으로 보던 얼굴을 화강석 조각품으로 마주하니 더 그러했다.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작품 중에 훌륭한 인물이 대부분이었다. 큰바위얼굴 조각공원은 국내외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얼굴전시장이었다. 그토록 흠잡을 데 없는 인물로 남기 위해 얼마나 자신을 다듬었으며, 추잡한 것들을 얼마나 많이 버렸을까 싶었다. 내게는 석수장이 친구가 있다. 그 엄청난 작품들을 둘러보면서 친구가 조각하던 현장에서 보았던 일이 떠올랐다. 채석장에서 나온 원석이 작게는 몇 톤, 크게는 수백 톤이나 되는 것도 있다고 했다. 원석에다 쪼개고 싶은 부분에 먹줄을 놓고 정으로 작은 홈을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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