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신이 강건한 것도 아니다. 농기구 중에서 가장 왜소하고, 인물로 따지면 꾀죄죄한 것이 어디 내놓고 자랑할 만한 게 없다. 성품마저 온순하니 창고 속에 있을 때는 있는 줄 모르게 구석에 처박힌다. 남들이 자리 다 차지한 뒤 겨우 궁둥이 붙일 곳을 찾아 숨어든다. 욕심이란 말도 모르고 그냥 차분할 뿐이다. 옆 친구의 큰 키를 바라보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에 만족하며 더 이상의 중책을 꿈꾸지 않는다. 허접스러운 일만이 자신의 몫이라 해서 투덜거리거나 원망하는 법도 없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 아주 미천하다는 것을 알기에 늘 자족하며 살아간다. 그는 대장장이의 뜨거운 담금질 속에서 태어났다. 용암처럼 이글거리는 화덕 속에서 견딜 때는 왜 그리 뜨겁던지. 풀무가 숨을 내쉴 때마다 치솟던 열기에 가슴..
현직에서 수많은 사람과 어울려 지냈다. 여러 사람과 마주하느라 가족을 잊고 산 것 같다. 이제는 눈앞에 아른거리는 이들은 사라지고 아무도 없다. 처음에는 낯선 세상에 나 홀로 내 동댕이쳐진 기분이었다. 가보지 않은 길을 가려니 생경하다. 더욱 난데없는 역병으로 어디 가나 빗장이 걸려있어 난감했다. 갈 곳 없어 서재에 앉아 책을 뒤적이다가 무릎을 ‘탁’ 쳤다. 강돈묵 작가의 를 읽으며 잊고 지냈던 반쪽을 찾았다. 체신이 강건한 것도 아니다. 농기구 중에서 가장 왜소하고, 인물로 따지면 꾀죄죄한 것이 어디 내놓고 자랑할 만한 게 없다. 성품마저 온순하니 창고 속에 있을 때는 있는 줄 모르게 구석에 처박힌다. 남들이 자리 다 차지한 뒤 겨우 궁둥이 붙일 곳을 찾아 숨어든다. 욕심이란 말도 모르고 그냥 차분할 ..
늘어선 노송군락이 방문객을 압도한다. 천년 고찰을 수호하느라 저마다 가슴팍에 상흔을 새기고 있다. 긴 세월 강인한 생명력으로 뿌리내리고 줄지어 서 있는 노거수는 오백 나한의 모습이다. 일주문 대신 들머리에 도열한 소나무는 하나같이 일제의 만행을 간직하고 있다. 수령 일백 년을 훌쩍 넘어섰을 노송, 제 몸을 톱으로 유린당할 때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도리 없이 진을 뽑아야 했던 민초의 가슴도 쓰렸으리라. 청도 운문사를 찾아가는 길이다. 정갈한 비구니 도량에는 보존하는 보물도 많지만 꼭 찾아보고 싶은 것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처진소나무이다. 우리나라 소나무 중 세 번째로 지정됐으니 그럴만한 이유가 있으리라. 매년 음력 삼월삼짇날이면 비구니 스님들은 오백 년을 살아낸 노송에 막걸리 열두 말을 물에 희석하여 공..
내가 노래하는 무대에는 조명등이 희미해 생명의 싹이 움트지 않소 꽹과리를 두드리고 장구를 내리쳐도 푸른 감흥이 일어나질 않소 영혼의 날개마저 거세당한 탓인지 관객의 깊은 환호성과 무대의 퀭한 종소리도 오래도록 들리지 않소 버선발로 뛰쳐나가 뱅그르르르 뒹굴어 볼까 하얀 적삼 걸치고 나가 관객석을 배회해 볼까 음음음음 음음음 음음음음 음음음 생生은 한 판 춤사위로세 뭐여라 그으래 어디선가 맑은 종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오 생은 한 판 그래픽 소설이라고 생은 한 판 춤사위라고 한 판의 춤사위는 천 개의 단어를 조립한 말장난보다 느낌을 줄 때가 때로는 있다오 남사당패들의 외줄타기 외로움처럼 아슬아슬하게 마음의 행로를 걸어가더라도 호오 탕한 춤사위는 삶을 지탱시켜 주는 이유가 되거든 음음음음 음음음 음음음음 음음음 ..
쾌청하게 맑은 날은 맑아서 좋고, 우울하게 흐린 날은 흐려서 좋다. 비 오는 날, 비에 갇혀 하릴없이 흐려진 창 앞에 우두커니 서면 안개비와도 같은 음악의 선율이 내 마음속에서 피어오른다. 대체로 이런 날은 첼로의 음반을 걸게 된다. 막스 브르흐도 좋고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도 좋다. 첼로의 G선은 때로 사람을 영적(靈的)으로 만들고 심신을 편안한 이완의 상태에 머물게 한다. 따라서 맥박도 느려지고 호흡도 진정되어 깊은 선율 속으로 침잠하게 된다. 마치 지하 동굴의 계단을 따라 깊숙이 내려가면 거기 어느 신(神)적인 존재와 만나게 될 것도 같다. 비는 곧잘 사람을 회고적(懷古的)으로 만든다. 비밀 서랍 속에서 동경(銅鏡)을 꺼내 들고 본래의 자기 모습을 점검하는 엄숙한 제의(祭儀) 같기도 한순간이다...
여름이 다가오면 여러 해 전에 길에서 만난 어떤 제자가 던진 시답잖은 질문이 가끔 머릿속에서 맴돈다. 오랫동안 공주에서 살다가 정년을 계기로 대전에 정착하게 되었는데, 그해의 여름으로 기억된다. 삼복더위에 무슨 급한 볼일이 생겼던지 나는 낯선 거리를 땀을 뻘뻘 흘리며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때 우연히 지난날의 여자 제자를 만났다. 많은 제자들 가운데는 그쪽에서 인사를 안 하면 얼굴을 마주쳐도 모르고 지나치는 일도 없지는 않다. 또 헤어지고 나면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만났던 사실조차도 까맣게 잊기가 일쑤다. 그 제자도 그런 경우인 셈인데 다만 그때 나에게 던진 질문 한 토막이 오래도록 머리에 남는다. 서로 근황을 묻는 인사가 끝나고 나자 그 제자는 나에게 "선생님은 여름하고 겨울하고 어느 쪽이 더 좋으..
그리움이란 말속에는 사랑이 있다. 다른 사람도 그렇겠지만 나에게 어머니 사랑이란 퍼 올려도 퍼 올려도 줄지 않는 우물과도 같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숭고한 단어 어머니, 그걸 부정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 어머니를 내 어릴 적에는 ‘어매’라고 불렀다. 울 어매가 지난 2018년 삼복더위가 절정이던 음력 6월 19일 아흔다섯을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돌아가시던 날 우리 여덟 남매는 울고불고 법석을 떨었지만 맏아들인 나는 어쩐 일인지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았다. 누가 뭐라고 해도 다하지 못한 불효로 눈물샘이 메말랐기 때문이다. 입관하는 날, 수의를 입혀드릴 때였다. 다섯째 여동생이 어매가 평소 사용하던 침대 서랍에서 챙겨 온 틀니를, 평소 읽으시던 금강경을 가슴에 얹어드렸다. 이승의 모든 번뇌를 내려..
봄철 나물 중 흔한 머위는 주로 그늘진 대나무 숲이나 언덕에 자생한다. 대체로 이파리나 줄기를 먹는다. 맛은 쌉싸름하지만 입맛 돋우는 데 좋다는 나물이다. 몸에 좋은 것이 입에 쓰다는 말이 있으니 일부러라도 그 맛을 즐길 일이다. 작고 여린 잎은 데쳐서 된장 양념에 참기름 두어 방울 떨구고 깨소금 솔솔 뿌려 반찬으로 먹으면 별미다. 줄기는 껍질을 벗겨 삶았다가 무치거나 볶거나 탕에 넣어 먹기도 한다. 특히 육개장이나 오리탕을 끓일 때 넣으면 특별한 맛이다. 하지만 나는 삶은 줄기에 생새우와 함께 들깻가루 두 스푼 정도 섞어서 자작하게 볶은 것을 가장 좋아한다. 친정어머니가 보낸 택배 상자 속에 튼실하게 삶아져서 묶인 머위 대가 듬뿍 들어 있었다. 유난히 색깔도 누르스름하고 통통했다. 무슨 요리를 하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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