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넘실거리는 주말 오후다. 소파에 상체를 파묻고 TV를 보면서 졸고 있을 때였다. 휴대전화의 컬러링이 절간 같은 집안의 정적을 깨뜨린다. 작은 며느리 전화다. 손자 녀석이 보채는 통에 할머니 집에 오겠단다. 작은 아들네는 우리 부부가 사는 아파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다. 안방 침대에서 주말 드라마를 보다가 설핏 잠이 들었던 아내도 손자가 온다는 전화에 화들짝 놀라 일어나더니 “집 안 청소를 안 했는데….” 혼자 말하듯 웅얼웅얼한다. 당신이 청소하겠다는 의사표시도 아니고 그렇다고 옆이 있는 남편한테 부탁하는 것도 아닌 삼인칭 유체이탈 화법이다. 아내는 잠이 덜 깬 푸석한 얼굴로 거울을 보더니 안 돼! 하며 재빠르게 샤워실로 들어가 버린다. 노부부만 사는 집안에 비상이 걸렸다. 정확히 말하면 내..
누가, 인간에게 원숭이를 죽일 수 있는 권리를 주었나 / 박제영 그러니까 대학 1학년 때였는데요 일반물리학 중간고사 시간이었는데요 문제가 다음과 같았는데요// y축으로 y높이의 전봇대가 서 있고, x축으로 x거리 떨어진 곳에 포수가 서 있다. 전봇대 위에 원숭이 한 마리가 앉아 있다가 실수로 떨어졌다. 떨어지는 원숭이를 맞출려면 포수는 몇 도 각도로 총을 쏘아야 하는가?// 정답이 아크탄젠트 y분의 x든, x분의 y든 중요하지 않았는데요 그래서 이렇게 써야만 했는데요 원숭이를 숲에서 쫓아낼 권리를 누가 주었나요 원숭이를 죽일 수 있는 권리를 누가 주었나요 떨어진 원숭이를 치료해서 다시 숲으로 돌려 보내야 하지 않나요// 0점을 받고 F학점을 맞았는데요 결국 공학도가 되는 것을 포기했는데요 20년이 지난 ..
꽃잎 빨아 쓰듯 젖은 날 많은 당신이 싫었습니다. 거름 자리마다 붉은 달리아 꽃을 심어놓고, 태풍에 쓰러진 꽃대나 묶어주던 당신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울에 봉숭아가 흰 꽃을 피웠다고 ‘참하다, 참하다.’ 말씀하시던 당신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햇살 들지 않는 부엌 찬장 옆에 노란 감국 꽂아놓고 ‘곱다, 곱다’ 말씀하시던 당신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차디찬 골방에 비틀린 가시선인장 들여놓고, 천 쪼가리 칭칭 동여 매주고 ‘봄날까지 잘 견뎌야 하느니라.’라던 당신의 읊조림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창고 문을 열어보면 수북하게 쌓인 거라고는 비료 포대나 나일론 끈 따위가 전부였습니다. 부뚜막에 꽝꽝 얼어붙은 행주, 뜨거운 물에 녹여보면 해진 런닝구 쪼가리였습니다. 겨울밤 윗목에 먹다 남은 거라고는 벌레..
2021년 제12회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장려상 산지사방 가을빛이다. 심란했던 마음이 가라앉는다. 좁고 긴 골짜기를 지나니 누런 들판이 낮은 산을 등에 업고 낮잠을 자는 듯 평온한 동네가 눈에 잡힌다. 간절함을 안고 돌할매를 찾아 나선 길이다. 영천시 북안면 관리에 있는 돌할매 공원. 낯선 시골길에 안내판이 반갑다. 돌할매에게 경건한 마음으로 지극정성 기도를 드리면 한 가지 소원은 꼭 이루어진다고 적혀있다. 수백 년 전부터 주민들이 당산 신으로 모시면서 마을의 대소사나 가정의 길흉화복을 빌고 각자의 소원을 다져보는 신비의 돌 할머니이다. 사람들의 발걸음을 따라가니 길게 줄을 서 있는 모습이 보인다. 모두 경건한 의식을 치르는 듯 진지한 표정이다. 하여 햇살마저 골짜기 사이로 안개처럼 내려앉았고 나무들..
빗줄기가 도드라지는 사이 잠에서 깼다. 사나운 꿈을 꾼 것도 같다. 가로등 빛이 격자 유리창을 투과해 천장에 기찻길을 냈다. 내가 기차를 처음 타본 것은 스물 두셋 정도였을 것이다. 모자를 거꾸로 쓰고 찢어진 청바지를 입었던 친구, 김밥과 통닭을 챙겨왔던 친구. 그렇게 동갑내기 예닐곱 명이 모여 영천 은해사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고대하던 동요의 풍경은 기찻길 옆 어디에도 없었다. 칙칙폭폭 기적소리를 내며 오막살이집과 옥수수밭을 스쳐 가리라 생각했건만. 꽤 무거운 충격이었을까. 여전히 기억의 언저리에 남았다. 정작 생애 첫 기차를 탔던 내 모습은 좀체 떠오르지 않는다. 답답하다. 날 밝으면 사라질 기찻길을 보고 있자니 지워질 일이 비단 저 그림자뿐이겠는가 마는, 동무들 생각 간절하다. 발목이 서늘하..
엄마는 뇌경색으로 세 번의 수술을 받았다. 후유증 탓인지 본래의 모습을 기대한다는 건 욕심이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어루만지거나 손을 잡았다. 그 일도 심드렁해지면 밖으로 나가자고 십여 분 간격으로 졸랐다. “야야 나를 바구니에 담아 옥상 꽃밭에 던져놓고 가거라. 까마귀랑 놀구러. 지은 죄도 그리 많지 않구마는 왜 자꾸 병실에 감옥살이 시키노.” 예의 그 바구니라는 휠체어에 엄마를 앉혀 병원 담벼락을 따라 야트막한 산책로를 돌았다. 십자가가 보이면 기도하랴 날아가는 새들에게 손 흔들랴 한 손이 바쁘다. 날이 차가운지 이내 들어가자고 난리다. 할 수 없이 병원 옥상에 자그마하게 꾸며 놓은 꽃밭 가운데 엄마를 모셔놓고 찬송가를 틀어주었다. 때론 고개 숙인 해바라기였다가 때론 박꽃으로 핀다..
어머니가 사는 곳 / 권기만 옷이 엄니 손같이 느껴지는 날/ 나는 아이처럼 엄니가 벗겨주던 대로 옷을 벗는다/ 물끄러미 앞섶 바라보던 콧날 참 따뜻하다/ 내 안의 것을 보는 듯 한 눈빛/ 한 종지 미소 같은 단추를 끄른다/ 눈물 가득 고인 조그만 호수/ 주름진 엄니 손마디 물결처럼 일렁인다/ 얼룩진 윗도리 벗어 빨래통에 던진다/ 던지면서 돌아앉는 뒷모습에 얼른 다시 줍는다/ 엉거주춤 벌린 두 팔/ 엄니가 안아 달랬을 세월 안겨있다/ 단단히 여며주지 못해 힘들어하던 모습/ 후줄그레 어려 있다/ 벗어든 옷으로 엄니 잠시 나를 보듬는다/ 부시시 까슬하다/ 주름진 옷 속 조그만 엄니/ 빨래통에 넣으려다말고/ 부둥켜안고 한참 참는다// 어머니의 양탄자 / 권기만 이불을 편다 하루 종일 접힌 굴곡을 편다/ 두발 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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