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 / 박팔양 친구께서는 길을 가시다가/ 길가의 한 포기 조그만 풀을/ 보신 일이 있으실 것이외다/ 짓밟히며, 짓밟히면서도/ 푸른 하늘로 작은 손을 내저으며/ 기어이 기어이 살아보겠다는/ 길가의 한 포기 조그만 풀을/ 목숨은 하늘이 주신 것이외다/ 누가 감히 이를 어찌하리까?/ 푸른 하늘에는 새떼가 날으고/ 고요한 바다에 고기떼 뛰놀 때/ 그대와 나는 목숨을 위하여/ 땅 위에 딩굴고 또 딩굴 것이외다// 침묵 / 박팔양 나는 그대의 종달새 같은 이야기를 사랑한다/ 그러나 그보다고 더 그대의 말없음을 사랑한다/ 말은 마침내 한계의 조그만 아름다운 장난감/ 나는 장난감에 싫증난 커가는 아이다/ 말보다도 그대의 노래를 나는 더 사랑한다/ 진실로 그윽하고도 황홀한 그대의 노래여!/ 붉은 노을 서편 하늘에 비끼..
침묵 1 / 문덕수 저 소리 없는/ 청산이며 바위의 아우성은/ 네가 다 들어버렸기 때문이다// 겹겹 메아리로 울려 돌아가는 정적 속/ 어쩌면 제 안으로만 스며 흐르는/ 음향의 江물!// 천 년 녹슬은/ 鍾소리의 그 간곡한 응답을 지니고/ 恍惚한 啓示를 안은 채/ 일체를 이미 비밀로 해버렸다// 종이 한 장 / 문덕수 죽음과 삶의/ 사이에/ 잎사귀처럼 돋아난/ 흰 종이 한 장/ 무슨 예감처럼/ 부들부들 떠는 성난 종이의/ 언저리에 불이 붙고,/ 말씀이 삭아서 떨어지는/ 십육(十六)절지 반(半)의 백지./ 죽음과 삶의/ 사이에/ 잎사귀처럼 돋아난/ 흰 종이 한 장.// 시는 어디로 / 문덕수 시는 어디로 갔나/ 앞에서는 높은 빌딩들이 줄줄이 막아서고 뒤에선/ 인터넷의 바다가 출렁이고/ 머리 위를 번개처럼 가..
제7회 경북일보 문학대전 가작 소리를 들으면 색깔이 보인다. 내 기억 속에는 많은 소리들이 저장되어 있다. 소리들은 그들을 탄생시킨 배경을 가지고 있고 배경은 색깔로 내 기억 속에 이미지화 되어있다. 눈을 감고 소리를 들여다보면 소리는 그가 가진 빛깔의 색채로 펼쳐진다. 빗소리는 황토색깔이다. 봄비치고는 제법 굵은 비가 흙냄새를 날리며 황토 마당을 적신다. 꼬마는 큰형의 커다란 군용 우의를 머리 위로 덮어쓰고 비 오는 마당 가운데 가서 쪼그리고 앉는다. 꼬마만의 독특한 빗소리 즐기기다. 우의 자락이 사방으로 비에 젖은 땅바닥에 쫙 깔려 바깥 세계와 완전히 밀폐되면 우의 속은 작은 텐트로 변한다. 땅의 지열과 꼬마의 체온으로 텐트 안은 금방 따뜻해지고, 황토 향기 은은한 공간 속에서 빗소리의 연주가 시작된..
2021년 제12회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장려상 이왕이면 계곡을 따라 올라가고 싶어 헌실마을로 돌아갔다. 걸어오다 보니 ‘비가 내려 탐방로에 물이 고여 있을 경우 우회 탐방로를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푯말이 서 있다. 물이 불어오르면 계곡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조심하라는 뜻이다. 모르긴 몰라도 마을 사람들도 큰 물에게 당했을 것이다. 이렇게 마을 사람들은 나그네들을 살펴 봐준다. 청송의 산하는 들판의 곡식들을 야물게 찧어주고 있지만 아직은 더운 바람이 꼬랑지를 짤랑거리며 돌아다닌다. 헌실마을 끝자락의 새마교를 지나 붉은 절벽 앞에 섰다. 중국 땅에 와 있는 느낌이다. 아무리 봐도 우리 것이 아닌 듯한 절벽의 빛깔이 낯설다. 노인은 도인(道人)처럼 소매 넓은 도포를 입고 강가에 널따랗게 자리 틀고..
새봄의 기도 / 박희진 이 봄엔 풀리게/ 내 뼛속에 얼었던 어둠까지/ 풀리게 하옵소서.// 온 겨우내 검은 침묵으로/ 추위를 견디었던 나무엔 가지마다/ 초록의 눈을, 그리고 땅 속의/ 벌레들마저 눈 뜨게 하옵소서.// 추일서정 / 박희진 이젠 가을이군! 하면서 손을 씻고 거울을 보니/ 하지만 거기 이미 가을은 무르익어 너털웃음을 웃고 있었다./ 성긴 반백의 머리칼은 마치 짓밟힌 갈대밭 모양이었고/ 꽤나 주름진 석류빛 얼굴은 차라리 웃지 않을 수 없다는 듯 …// 자연과 인간 / 박희진 저 히말라야의 냉엄한 설백(雪白) 보라./ 인간은 저렇듯 정화될 수도 있다./ 저 태평양의 쉴 새 없는 무궁동(無窮動) 보라./ 인간은 저렇듯 출렁일 수도 있다./ 저 밤하늘 별들의 고요 보라./ 인간은 저렇듯 침묵할 수도..
번역문 봉양할 때 그분들의 기거와 음식을 살펴보면 금년이 작년만 못하고 오늘이 어제만 못하기에 쉽게 흘러가는 세월을 탄식하고 붙잡기 어려운 만년을 애석해했을 것이니,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지극한 정에서 우러나와 절로 그만둘 수 없는 점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에 물러나 자신의 당에 ‘희구’라는 이름을 붙였을 것이니, 항상 눈길을 두면서 한 달에 30일, 하루에 24시간 동안 한 생각도 기쁨이 아님이 없고 한 생각도 두려움이 아님이 없고자 했을 것입니다. 정성과 효가 지극하지 않다면 누가 이렇게까지 할 수 있겠습니까. 저 성인인 공자와 현인인 맹자·주자의 경우에는 효가 지극하지 않은 게 아니고 정성이 감응하기 어려운 게 아닌데 끝내 하늘에서 얻지 못한 건 이치의 변칙적인 것입니다. 그대의 부친은 자신을..
2021년 제12회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장려상 사람 마음을 자꾸 낚는다. 무슨 알레고리를 숨겼기에, 삼천 년 나달 동안 시나브로 사람을 부른다. 앞에 선 쑥부쟁이 아가씨도 그 부름 따라온 것일까. 핑크빛 볼 수줍게 피어난 그녀는, 오늘도 캐릭터들 앞에 서서 그리운 임을 두 손 모아 기다리고 있다. 마음 안테나를 뽑아 세운다. 그리워 시린 가슴 하나 툭 떨어진다. 앞에 서면 보면서도 모르겠고, 돌아서면 또 보고파지는 캐릭터. 사람을 애태우는 묘한 재주를 팬터마임으로 뽐내는 상(像). 퍼져 나오는 아우라(aura)에, 어떤 메시지가 실렸는지 그 앞에서 마냥 궁구(窮究)케 하는 실존. 무뚝뚝한 모습에 정나미 떨어지다가도, 눈 감으면 또 아련히 그리워지는 존재…. 바위벽에서 끊임없이 공연하는 캐릭터들의 팬..
국토 서시(國土序詩) / 조태일 발바닥이 다 닳아 새살이 돋도록 우리는/ 우리의 땅을 밟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숨결이 다 타올라 새 숨결이 열리도록 우리는/ 우리의 하늘 밑을 서성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야윈 팔다리일망정 한껏 휘저어/ 슬픔도 기쁨도 한껏 가슴으로 맞대며 우리는/ 우리의 가락 속을 거닐 수밖에 없는 일이다// 버려진 땅에 돋아난 풀잎 하나에서부터 조용히 발버둥치는 돌멩이 하나에까지/ 이름도 없이 빈 벌판에 빈 하늘에 뿌려진/ 저 혼에까지 저 숨결에까지 닿도록// 우리는 우리의 삶을 불지필 일이다/ 우리는 우리의 숨결을 보탤 일이다/ 일렁이는 피와 다 닳아진 살결과/ 허연 뼈까지를 통째로 보탤 일이다// 다시 산하(山河)에게 / 조태일 1// 불꺼진 시간 위에서 이제 아픈 기억을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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