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제12회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동상 새 두 마리가 낭창하니 날갯짓을 한다. 추상적인 나뭇가지 끝에 마주 보고 앉아있는 모습이 어느 마을 솟대를 연상시킨다. 은실은 햇살을 받아 윤슬처럼 반짝이고 청실과 홍실로 엮은 열매와 과실은 떨어질듯 탐스럽다. 불꽃이 절정일 때처럼 크고 환해지며 점점이 분명해져 온다. 색실이 밝고 윤택해서 평면에 박혀 있는 것들이 박차고 나올 듯 힘이 있어 보인다. 절제된 자연물이 성스럽고 영험한 생명으로 다시 태어난 듯싶다. 멀리 야트막한 산지와 구릉으로 둘러싸인 소도시가 흐릿하게 다가온다. 아련한 마을에서 천년고도 고령 가야국의 혼과 얼이 느껴진다. 함창은 예로부터 누에고치에서 나온 명주실이 유명한 고장이라고 한다. 발길을 명주 박물관으로 돌렸다. 전통 물건부터 요즘..
유난히 일찍 찾아온 무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한여름 잠 못 들어 뒤척이던 어느 밤. 오후 내내 직방으로 내리쬐는 태양열로 한껏 달궈진 집안을 식히느라 한껏 틀어놓은 에어컨 바람이 서늘하게 느껴질 즈음 부스스 일어나 에어컨 스위치를 끄고 다시 침대에 드러누워 본다. 여전히 잠은 오지 않는다.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단숨에 들이키고 다시 자리에 눕는다. 서서히 술기운이 번져온다. 천장이 희뿌옇게 변하면서 꿈틀대기 시작한다. 온갖 상념들이 스멀스멀 기어 다니기 시작한다. 초등학교 시절 친구들, 은근히 속으로 좋아했던 계집아이 얼굴, 박경리의 ‘토지’ 속 월선이와 용이, 임이네, 메밀밭길을 휘적휘적 걸어가는 허생원과 동이… 수많은 얼굴들이 어지럽게 천장에 나타났다 사라진다. 한여름 밤의 꿈! 아, 맞아! 그..
백년의 약속 / 양순복 봄비가 내리는 골목/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매질소리/ 팔십 성상 이어온 철원의 쇳소리는/ 오늘도 강동에서 내 귀를 울리네// 풀무질 불간을 나와 모루에 모로 누운 후/ 목욕재게하던 그 옛날 농기구/ 이젠 정이 되고 지팡이가 되어/ 다스린 기물들 가없이 신묘하구나// 장인의 공으로 사는 삼대/ 불속에 달구고 모루 위에 단련되고 숫돌에 기대어/ 천호의 동네 수문장이 되겠다는/ 그 언약/ 호미자루에 고인 송진 같이 진득하게 지켜다오.// 노을이 질 때면 / 양순복 고향집 지붕 위로/ 낮게 내려앉은 달빛에/ 박꽃도 새하얗게 웃던 날// 처마 끝에 등불 밝혀 놓고/ 마루 끝에 앉아/ 자식들 기다리시던 어머니// 어서 가거라./ 해 저물기 전/ 어서 가 식구들 잘 건사하라// 서쪽 하늘 노을..
2021년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동상 도깨비 영감님이 납시었다. 관을 쓴 듯 불쑥 솟은 두 뿔, 선악을 꿰뚫어볼 듯 부릅뜬 두 눈, 쩍 벌어진 입, 펑퍼짐하고 주름진 코, 뻥 뚫린 콧구멍은 로댕의 지옥문에 나오는 오만과 탐욕의 동굴처럼 괴괴하기조차 하다. 누구든 마왕 같은 그의 앞에 서면 진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경주 사천왕사지에서 출토된 녹유귀면와가 서울 나들이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덕수궁 현대미술관으로 한걸음에 달려갔다. 세월의 더께가 켜켜이 내려앉은 덕수궁 노거수 그늘에는 매미들이 궁이 떠나갈 듯 사이렌 소리와 나팔을 불어대며 도깨비 어른의 입궁을 격렬히 환영하고 있다. 언젠가 방송에서 녹유귀면와를 소개한 적이 있지만, 실제 모습을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1천300여 년 전..
2021 호미문학대전 은상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는 죽음과 아버지를 연관시켜 생각한 적이 없었다. 나에게도 꿈이 있었고 성공하고 싶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내가 성공할 때까지 기다려주실 줄 알았다. 정말 언제까지라도 기다려주실 줄 알았는데 어느 날 훌쩍 떠나버린 것이었다. 그럴 줄 알았더라면 성공을 미뤄두고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약주를 사 들고 자주 찾아뵈었을 것이다. 바람 부는 날엔 바람에 찢긴 대로 비가 오는 날엔 비에 젖은 채로 성공하지 못한 초라한 모습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불쑥불쑥 아버지 앞에 보여드렸을 것이다. 이젠 아버지가 그리우면 아버지의 손을 닮은 손을 보러 호미곶으로 달려간다. 동해안 포항 호미곶에 가면 떠오르는 해를 받치듯이, 또는 공을 쥐듯이 손가락이 안으로 구부러진 손이 있다. 손은 오..
겨울공화국 / 양성우 여보게 우리들의 논과 밭이 눈을 뜨면서/ 뜨겁게 뜨겁게 숨쉬는 것을 보았는가/ 여보게우리들의논과밭이가라앉으며/ 누군가의이름을부르는것을들으면서/ 불끈 불끈 주먹을 쥐고/ 으드득 으드득 이빨을 갈고 헛웃음을 껄껄껄/ 웃어대거나 웃다가 새하얗게 까무러쳐서/ 누군가의 발 밑에 까무러 쳐서/ 한꺼번에 한꺼번에 죽어가는 것을 보았는가// 총과 칼로 사납게 윽박지르고/ 논과 밭에 자라나는 우리들의 뜻을/ 군화발로 지근지근 짓밟아대고/ 밟아대며 조상들을 비웃어 대는/ 지금은 겨울인가/ 한밤중인가/ 논과 밭이 얼어붙는 겨울 한때를// 여보게 우리들은 우리들을/ 무엇으로 달래야 하는가// 삼천리는 여전히 살기 좋은가/ 삼천리는 여전히 비단 같은가/ 거짓말이다 거짓말이다/ 날마다 우리들은 모른체하고/ ..
그곳의 가을날은 찬란했다. 들녘은 누렇다 못하여 온통 황금빛으로 물들었고, 곳곳에 허수아비는 혼자 취하여 우스꽝스럽게 서 있었다. 시절을 만난 참새들은 떼를 지어서 이 논 저 밭으로 몰려다니고, 우여어 우여어 흙팔매질로 새를 쫓는 아이들의 목소리만 들 가운데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어쩌면 해지는 산그늘을 타고 오는 서늘한 바람의 탓이었을까? 반쯤은 마르고 푸석해진 풀잎이 이제 막 눕기 시작하는 밭 언덕에는 늙은 호박덩이들이 잠시 낮잠을 즐기는가 하면, 낮고 쓸쓸한 무덤들 너머로 총총히 어우러진 억새들이 춤을 추는 듯이 흰 머리채를 앞뒤로 주억거리고 있었다. 뙤약볕 내리는 헛간의 지붕 위에는 진홍의 고추가 널리고, 뒤뜰에서는 휘어진 나뭇가지 끝의 색 바랜 잎사귀들을 제치고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이 고운 감들..
2021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은상 어머니는 빈손이다. 급하게 나오느라 지팡이를 잊고 손가방마저 잊었다. 행여나 떼놓고 갈까 봐 몸만 따라나선 모양이다. 아흔 줄에 선 어머니의 걸음이 위태위태하다. 한 발짝 뗄 때마다 이마 골 주름도 덩달아 깊어간다. 그 속에 잠긴 수심이 동굴 속 그림자 같아 가슴에 서늘한 바람이 든다. 골굴사는 사람의 뼈대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해골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은 신라의 고승, 원효가 열반에 든 절이라 한다. 얼마나 오랫동안 풍화되었던 걸까. 암흑색 살점을 다 뜯기고 앙상한 뼈대로만 서 있다. 나뭇가지가 삭정이처럼 내려앉아 거무칙칙하여 기괴해 보인다. 바위의 윤곽선마저 거미줄 친 것처럼 얽혀있어 절이라기보다는 버려진 성채에 가깝다. 골굴사는 자연 타포니에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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