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부터 어른들이 부르는 노래를 어디서 주워듣고 따라 하기를 좋아했다. 반짝이는 별빛 아래 소곤소곤 소곤대던 그날 밤 천년을 두고 변치 말자고 전깃불에 맹세한 님아 사나이 목숨 걸고 바친 순정 무지개도 밟아 놓고… (남인수 노래 중에서) 그 나이에 가사 내용이 무슨 뜻인지 알았을 턱이 없다. 그저 경쾌한 노랫가락이 좋아서 귀에 들리는 대로 흉내 내며 골목을 누비고 다녔었다. 눈치 빠른 독자들은 이미 알아챘겠지만 위 노랫말 중에 “전깃불에 맹세한 님”은 “댕기 풀어 맹세한 님”을, “무지개도 밟아 놓고”는 “모질게도 밟아 놓고”를 그 당시 뜻도 제대로 모르면서 내 귀에 들리는 대로 노래한 것이다. 지금은 텔레비전이나 인터넷 같은 첨단매체가 발달되어 아이들이 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여..
이름 뒤에 숨은 것들 / 최광임 그러니까 너와의 만남에는 목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헤어짐에도 이유가 없다/ 우리는 오래 전 떠나온 이승의 유목민/ 오던 길 가던 길로 그냥 가면 된다, 그래야만 비로소/ 너와 나 들꽃이 되는 것이다/ 달이 부푼 가을 들판을 가로질러 가면/ 구절초밭 꽃잎들 제 스스로 삭이는 밤은 또 얼마나 깊은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서로 묻지 않으며/ 다만 그곳에 났으므로 그곳에 있을 뿐,/ 가벼운 짐은 먼 길을 간다/ 내가 한 계절 끝머리에 핀 꽃이었다면/ 너 또한 그 모퉁이 핀 꽃이었거늘/ 그러므로 제목 없음은 다행한 일이다/ 사람만이 제목을 붙이고 제목을 쓰고, 죽음 직전까지/ 제목 안에서 필사적이다/ 꽃은 달이 기우는 이유를 묻지 않고/ 달은 꽃이 지는 뜻을 헤아리지 않는..
병신년 몇 달 동안 영상 스크린을 띄우고 보니, 인생 그렇게 사는 거야, 적당히 살아, 힘들게 살 필요가 없어 내 안의 소리를 들린다. 노래라고 아는 것은 찬송가 몇 곡뿐인데 한 시간 동안 흘러간 노래를 듣고 있자니, 이제는 어깨를 출렁거리며 장단이 나온다, 경직되어 살아온 삶이 틈새가 생기고 편해온다. 지금 저 앞에 마이크 잡고 선 90세 노인 “그대 없이는 못살아” 외치고 있다. 아마도 사랑하는 님을 먼저 보냈을 것 같다. 이국땅에서 두 주먹 불끈 쥐고 마누라 자식 먹여 살리려고 아우성치며 살아간 우리 아버지 세대들 모두 다 먼저 가셨다. 먼저 간 님에게 두 주먹 불끈 쥐고 달리지 말라고 할 걸, 지금 같으면 말해 줄 걸 싶다. 몇 년 전 한국서 하와이를 방문한 언니가 너는 가라오케도 안가니 하고 촌..
박정만(朴正萬, 1946년~1988년) 시인 전라북도 정읍군 산외면에서 출생. 전주고등학교, 경희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다. 196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겨울 속의 봄 이야기〉가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1981년 한수산 필화사건에 휘말려 갖은 고초를 당하고 1988년 10월 2일 봉천동 자택에서 고문 후유증으로 고생하다 간경화로 사망하였다. 시집으로 《잠자는 돌》《맹꽁이는 언제 우는가》《무지개가 되기까지는》《서러운 땅》《저 쓰라린 세월》《혼자있는 봄날》《어느덧 저쪽》《슬픈일만 나에게》《박정만 시화집》유고 시집 《그대에게 가는 길》이 있다. ※ 시인의 말: “1987년 6월과 8월 사이에 나는 500병 정도의 술을 쳐죽였다. 그 속에는 꺼져 가는 불티처럼 겨우 명맥만 붙어 있는 나의 목숨도 묻어 있음..
번역문과 원문 일어나기는 쉽지만 제어하기는 어렵기로 분노만 한 게 없다. 易發難制, 莫忿懥若. 이발난제, 막분치약. - 이현일(李玄逸, 1627~1704), 『갈암집(葛庵集)』권22 「징분잠(懲忿箴)」 해 설 추석 연휴의 어느 날, 학습지를 풀던 큰딸이 갑자기 분통을 터뜨렸습니다. 연휴라서 엄마도 아빠도, 학습지 선생님도,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쉬는 것 같은 그런 때에 왜 자기만 연휴 내내 이 학습지를 매일 꼬박꼬박 풀어야 하냐며... 그러더니 결국에는 두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고 말았습니다. 분통 터뜨리는 거야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는데 엉엉 우는 꼴까지는 두고 볼 수 없어, 이번엔 부녀지간의 싸움으로 번지고 말았습니다. 대한민국의 학습지 푸는 아이와 부모 간에 수없이 오갔던 그 말, “너..
뉴저지에서 4일 밤을 잤다, 2006년에 며느리가 사업합네 하고 애트란다에서 내려가더니 가장 힘든 시기 2007년에서부터 세계적은 경제 불황에 시작한 사업이니 잘될 턱이 없는 것을 망해 버린 것이다 거기에 매달려 2011년까지 힘들게 끌어가더니 완전히 거덜이 나서야 손 털고 내려놓으면서 며느리와 아들은 이혼을 했다. 사람이 앞일을 안다면 그러지 않을 것이다. 처음에 내려간다고 할 적에 며느리 보고 뭘 하려고 돈을 벌려고 하니 물었다. 노후 대책이라고 했다. 지금 치과 병원 가지고는 안 되니, 물으니 대답을 피했다, 하나님이 돈을 필요 한사람에게 주는 것이다. 선한 사업에 목적을 두고 시작 하던지……., 말한 적이 있다. 그렇게 하고 내려간 작은 아들 이혼을 하고 파산선고에 힘들게 십년을 버티었다. 아들이..
시집 〈창변(窓邊)〉은 1945년 매일신보사(每日新報社)에서 노천명의 시 「길」·「망향」·「남사당」등 29편을 수록하여 간행했다. 작자의 제 2시집으로 서문이나 발문은 없다. A5판. 한지(韓紙) 인쇄. 길 / 노천명 솔밭 사이로 솔밭 사이로 들어가자면/ 불빛이 흘러나오는 고가(古家)가 보였다.// 거기/ 벌레 우는 가을이 있었다./ 벌판에 눈 덮인 달밤도 있었다.// 흰 나리꽃이 향을 토하는 저녁/ 손길이 흰 사람들은/ 꽃술을 따문 병풍의/ 사슴을 이야기했다.// 솔밭 사이로 솔밭 사이로 걸어가자면/ 지금도/ 전설처럼/ 고가엔 불빛이 보이련만// 숱한 이야기들이 생각날까봐/ 몸을 소스라침은/ 비둘기같이 순한 마음에서……// 망향(望鄕) / 노천명 언제든 가리라/ 마지막엔 돌아가리라/ 목화꽃이 고운 내 ..
어떤 사람 / 신동집 마지막으로 한번 더 별을 돌아보고/ 늦은 밤의 창문을 닫는다./ 어디선가 지구의 저쪽켠에서/ 말없이 문을 여는 사람이 있다./ 차겁고 뜨거운 그의 얼굴은/ 그러나 너그러이 나를 대한다./ 나직이 나는 목례를 보낸다./ 혹시는 나의 잠을 지켜 줄 사람인가/ 지향 없이 나의 밤을 헤매일 사람인가/ 그의 정체를 나를 알 수가 없다// 다음날 이른 아침 창문을 열면/ 또 한번 나의 눈은 대하게 된다./ 어디선가 지구의 저쪽켠에서/ 말없이 문을 닫는 그의 모습을/ 나직이 나는 목례를 보낸다./ 그의 잠을 이번은 내가 지킬 차롄가/ 그의 밤을 지향 없이 내가 헤매일 차롄가./ 차겁고 뜨거운 어진 사람은/ 언제나 이렇게 나와 만난다./ 언제나 이렇게 나와 헤어진다.// 표정 / 신동집 참으로 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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