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영해가 나의 고향이지만, 영해에서 보낸 세월은 고등학교 시절까지다. 그러니 20년도 채 되지 않는다. 서울에서 십여 년, 미국에서 4년, 나머지는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충청북도 청주에서 보냈다. 청주에서 보낸 세월이 50년이 다 되어 간다. 그래도 고향이라고 하면 충청북도 청주가 아니라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관어대인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청주가 고향이 아니라고 해서 정이 들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는 청주의 북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창을 열면 청주시가 한눈에 들어온다. 앞으로는 이름조차 충청도스러운 무심천(無心川)이 청주의 도심을 가로질러 흘러와서는 내 아파트 뒤쪽에서 미호천을 만나 멀리 금강으로 흘러가고, 동쪽에는 우암산(牛巖山)이 우뚝 솟아 있다. 남쪽으로는 피반..
번역문과 원문 넘어가지 않던 밥도 마주 앉아 먹으니 한 술 더 먹게 되고, 밍밍하던 시골 막걸리도 마실수록 맛나다. 少食輒防喉 對案飯加匕 村醪薄無過 屢觴覺轉美 소식첩방후 대안반가비 촌료박무과 누상각전미 - 이민구(李敏求, 1589〜1670), 『동주집(東州集)』4권 「희신랑래회(喜申郞來會)」 해 설 이민구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시(子時), 호는 동주(東洲) 또는 관해도인(觀海道人)이다. 『지봉유설(芝峯類說)』의 저자로 잘 알려진 이수광(李睟光)의 아들이다. 진사시와 증광문과(增廣文科)에서 모두 장원한 실력자다. 이괄의 난이 평정된 뒤 36세의 나이로 경상도 관찰사에 임명되는 영예를 누렸지만,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가 함락되자 문책받아 평안북도 영변에 유배되었다. 영변에서 7년, 아산에서 3년의 유..
봄, 벼락치다 / 홍해리 천길 낭떠러지다, 봄은.// 어디 불이라도 났는지/ 흔들리는 산자락마다 연분홍 파르티잔들/ 역병이 창궐하듯/ 여북했으면 저리들일까.// 나무들은 소신공양을 하고 바위마다 향 피워 예불 드리는데 겨우내 다독였던 몸뚱어리 문 열고 나오는게 춘향이 여부없다 아련한 봄날 산것들 분통 챙겨 이리저리 연을 엮고 햇빛이 너무 맑아 내가 날 부르는 소리,// 우주란 본시 한 채의 집이거늘 살피가 어디 있다고 새 날개 위에도 꽃가지에도 한자리 하지 못하고 잠행하는 바람처럼 마음의 삭도를 끼고 멍이 드는 윤이월 스무이틀 이마가 서늘한 북한산 기슭으로 도지는 화병,// 벼락치고 있다, 소소명명!// 투망도投網圖 / 홍해리 무시로 목선을 타고/ 출항하는 나의 의식은/ 칠흑같은 밤바다/ 물결 따라 흔들..
2021년 제12회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장려상 두 손으로 무궁화 꽃다발을 받쳐 든 여인을 올려다본다. 단아한 한복 적삼에 걷어 올린 소매와 옷고름에 결기를 품은 듯 먼 하늘을 응시한다. 앞에는 총검을 높이 쳐든 네 사람의 ‘군인상’ 이 우뚝 서 있고 뒤에는 전적비가 하늘 높이 솟아 있다. 여인은 아들의 무사 귀환을 바라고 종전과 평화를 갈구하는 곡진한 어머니의 모습이다. 다부동전적기념관이다. 6·25 전쟁의 치열했던 격전지 다부동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1981년 건립하였다. 서울을 3일 만에 함락한 북한군은 파죽지세로 개전 사십 여일 만에 왜관의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왔다. 전 국토의 95%를 점령당한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연합군은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이곳 낙동강 전선에 최후의 방어선을 쳤다. 강..
해마다 겨울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반가운 철새들. 무얼 먹고 허기를 달래는지, 추위는 또 어찌 견뎌내는지 늘 걱정이 되면서도 겉보리 한 줌, 식빵 한 조각 나누어준 적이 없다. 아파트 단지와 단지 사이로 흐르는 개울을 따라 나는 매일 아침 한가롭게 산책하고, 냄새 나는 2급수에서 새들은 분주히 자맥질을 하고 있었다. 잡히는 것 하나 없이. 쓸개를 핥듯 갯바닥을 훑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열 받았는지 수면을 박차고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분노만큼의 높이었을까? 쇠오리는 쇠오리끼리, 꼬방오리는 꼬방오리끼리, 흰뺨검둥오리는 또 흰뺨검둥오리끼리 뭐라 듣기 좀 거북한 소리를 지르며 하루에도 몇 차례씩 편대비행을 하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몇 군데 요절을 내고 말 요량이었을까? 아니면 바닥부터 차곡차곡 적의를 다..
유세차(維歲次) 모년(某年) 모월(某月) 모일(某日)에 미망인(未亡人) 모씨(某氏)는 두어 자 글로써 침자(針子)에게 고(告)하노니, 인간 부녀의 손 가운데 종요로운 것이 바늘이로대, 세상 사람이 귀히 아니 여기는 것은 도처에 흔한 바이로다. 이 바늘은 한낱 작은 물건이나 이렇듯이 슬퍼함은 나의 정회(情懷)가 남과 다름이라. 오호통재(嗚呼痛哉)라, 아깝고 불쌍하다. 너를 얻어 손 가운데 지닌 지 우금 이십 칠 년이라. 어이 인정이 그렇지 아니하리요. 슬프다. 눈물을 잠깐 거두고 심신(心神)을 겨우 진정하여 너의 행장(行狀)과 나의 회포를 총총히 적어 영결(永訣)하노라. 연전에 우리 시삼촌께옵서 동지상사 낙점을 무르와 북경(北京)을 다녀오신 후에, 바늘 여러 쌈을 주시거늘, 친정(親庭)과 원근(遠近) 일가..
비인칭인 봄 / 박수현 비인칭(非人稱)의 봄이 걸어간다/ 팬지꽃 심는 아주머니의 엉덩이를 지나/ 지하도의 계단을 밟고 내려간다/ 황사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지하로 밀려가는 카디건과 스니커즈들/ 이어폰을 꽂은 뒤통수가 한결같다/ 파미에 파크, 메가박스, 엔터 식스, 센트럴시티/ 반품된 시간과 리필된 계절들이/ 날마다 리모델링되는 곳/ 입술 없는 얼굴들이, 문수 지워진 발들이/ 풍선 인형처럼 건들건들 환승 통로를 건너간다/ 해석되지 않는 애인과의 거리는/ 내일의 쇼핑 목록에 유보해 둔다/ 불법 포획된 밍크고래가 대형 스크린을 비행하고/ 총선 후보들이 유언비어처럼 깜박이다 페이드아웃된다/ 무빙워크 위에서 어깨를 부딪치다/ 동시다발 삭제되는 비인칭(非人稱) 봄들// 재생 버튼을 누른다/ 지하의 어디쯤 묻힐 ..
2021년 제12회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장려상 이른 새벽, 홀로 주산(主山)을 오른다. 주산은 고령 대가야읍에 있는, 대가야 왕국의 흥망성쇠를 온몸으로 보듬어 안고 온 어머니와 같은 산이다. 왕릉전시관 뒤편의 남쪽으로 난 고분들 사이를 걸으며 대가야 역사의 숨결 속으로 빠져든다. 1천500여 년 동안이나 꼼짝없이 한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수많은 고분의 우뚝우뚝한 봉분 위로 새벽 별빛이 총총하다. 철의 왕국으로 불리며 520년 동안 대가야를 지배했던 왕과 왕족들의 700기가 넘는 무덤이 주산의 능선과 비탈에 따개비처럼 붙어있다. 그 무덤 속에는 순장(殉葬)이라는 비정한 이름으로 생목숨을 빼앗겨야 했던 이름 없는 백성들의 영혼도 숨 쉬고 있다. 당시의 사람들은 사람이 죽어서 저세상에 가더라도 이승에서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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