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뒤 공원 길섶에 두 마리 까치가 나풀댄다. 아직 찬바람에 버석대는 검불 여기저기를 쪼아댄다. 아침나절 창밖에서 소리치던 녀석이 이놈인가 싶어 살폈다. 살을 에는 추위에 한동안 자취를 감추더니 봄을 물고 와 부려 놓았다. 며칠 새에 산수유, 개나리가 엷은 꽃잎을 내밀었 고, 벚꽃 움이 곧 터질 기세다. 문득 까치는 한겨울을 어디서 보내다 온 걸까 궁금해진다. 날이 추워 지면 새들이 사라지는 걸 당연시해 온 탓에 의문을 품지 않았던 일이다. 철새처럼 남쪽 따뜻한 곳으로 피접 다닌다는 말도 들어본 적 없으니 더 그렇다. 삭풍 몰아치는 산기슭의 까치집을 쳐다보면서는 빈집일 거라는 생각을 늘 한다. 얼기설기한 갖춤새로는 엄동 한천을 이겨내지 못하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봄날 출현하는 녀석은 어딘가 먼 데서 숨어..
나는 바람입니다. 소리로 존재하는 나는 바다를 끌어안고 파도를 일으키며, 숲 우거진 계곡에서 바위를 만나 계곡물과 어울려 조잘대고, 때로는 대나무의 결기와 인고의 세월을 댓바람 소리로 전하기도 합니다. 교회 첨탑의 종소리를 불 꺼진 움막까지 실어다 주고 새들의 울음소리를 숲 속 가득 실어 나르며 밤새워 뒤척이는 개울물 소리에 기대어 함께 울 때도 있지요. 당신은 문득 누군가 당신 곁에서 울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 적 없었나요? 내 손길이 닿는 빈 곳의 가락은 울음이 되거든요. 봄바람에 꽃잎에 비처럼 떨어질 때, 물기 하나 없는 낙엽이 발밑에서 부스스 부서져갈 때, 막연한 어느 겨울밤, 가로등 아래 흰 눈만 흩어져 내릴 때, 그럴 땐 내가 당신을 찾아간 것이라는 걸 기억해주기 바랍니다. 나는 바람입니다. ..
바람이 분다. 나뭇잎이 팔랑거린다. 바람은 어디서부터 불어와서 어디쯤서 사라지는가. 인생의 여름에서 한참 멀어진 지금, 아직도 잠재우지 못한 내 안의 바람이 마중을 나와 함께 일렁인다. 아이들 집에 머물 때 아침마다 산책로를 찾는 것은 꼭 운동을 위함이기보다는 일찍 잠에서 깨어 남아도는 식전시간을 주체할 수 없어서다. 오랜 습관으로 눈만 뜨면 직행을 하던 주방은 이곳에서만은 나의 영역이 아닐뿐더러 더운 여름날 아침부터 도를 닦는 사람처럼 책을 마주하고 앉았기도 좀 뭣하다. 생존의 전장으로 나가는 젊은이들의 부산한 하루의 시작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나는 도둑고양이처럼 발소리를 죽여 가며 현관을 빠져나온다. 한강을 지척에 두고 서해바다가 멀지 않은 이곳은 바람이 많다. 바람 없는 날이 거의 없다. 겨울이면 냉..
내 신접살림은 한강이 한눈에 내려다 뵈는 금호동 산등성이, 그것도 셋집 단칸방에 틀었다. 자고새면 물통을 들고 동네 초입 저지대에 있는 공동 수돗가로 내달아야만 했는데, 그때 턱밑으로 유유히 흐르고 있는 강물은 숨찬 갈증을 풀어주곤 했다. 사는 일 그렇게 고되고 몸에 부쳤어도, 내 집 마련의 꿈에 부풀었기에 늘 긍정의 몸짓으로 하루하루의 삶을 아귀차게 엮어나갈 수 있었다. 그렇게 만 7년의 세월이 흘렀다. 셋째 막둥이가 태어나던 그 해, 오매불망 그리던 새집 대문간에 내 이름 석 자의 문패를 달 수 있었다. 비록 삼간 슬래브 서민 주택이었지만, 두 다리 쭉 펴고 평생소원이었던 내 명의의 주택에 몸을 눕히니 세상 부러울 게 없었다. 여우도 편히 쉴 수 있는 감춰둔 굴이 있고, 허공을 나는 새도 내려와 앉을..
봄을 알리던 뻐꾸기 지나간 자리에 매미 합창이 한창이다. 여름을 노래하러 왔는가. 매미가 아침을 깨운다. 폭염과 코로나19를 지우려는 듯 씩씩하고 우렁차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바람인가 보다. 새벽 창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 못 이루나 생명의 외침이니 어이할거나. 요즈음 산책길에서 매미 탈각蛻殼이쉽게 발견된다. 커다란 나뭇잎 뒤에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매달렸다. 잡아당겨도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매미는 허물조차 정교하다. 여섯 개의 다리, 배 주름, 눈 더듬이까지 세밀하게 조각한 듯하다. 신기한 것은 날개 부분이 아주 작다는 점이다. 마지막 순간 완성되는 작품이어서일까. 미완未完인 채 접혀있는 날개는 바깥으로 빠져나와 제 모양으로 펼쳐지나 보다. 등에 갈라진 부분이 탈출구인 것 같다. 몸통이 빠져나오기엔..
졸졸거릴 때 알아봤어야 했다. 주변으로부터 입방아에 오르내릴 때 눈치를 긁어야 했는데 느긋했다. 그러던 어느 날, 졸졸붓이 하얀 점박이 눈꽃 모자를 덮어쓴 쌍둥이와 잘쏙하게 잘 빠진 미운오리 새끼 한 마리를 달고 왔다. 남들이 알면 남세스럽게 바람을 피웠나 오해하겠지만 그건 절대 아니다. 모월 아무 날 모 월간지 지면을 통하여 철필에 관한 행적이 드러나면서 관심이 쏠린 게 화근이다. 잘난 이름 덕분에 다소 우쭐하여 거드름을 피우긴 했지만, 허랑방탕 쏘다니거나 누굴 만나러 마실 나간 적도 없다. 얌전하게 주인어른 안주머니에 매달려 칩거하고 있었을 뿐이었는데 언제 새끼를 쳤을까. 《수필과 비평》지를 통하여 ‘졸졸붓’로 신인상을 받으며 문단 말석에 이름을 올린지 얼마 안 되어서였다. 아들 내외가 아버지의 늦깎..
“요즘은 길 묻는 사람도 없어.” 옆 노인장이 불쑥 혼잣말처럼 내뱉는다. 동의를 구하듯 힐끗 날 본다. 산행길의 중간쯤으로 산 아래가 멀리 트여 모두 땀 식혀 가는 곳이다. 나도 그도 배낭을 풀어 허기를 때우고 있었다. 뜬금없다 싶어 쳐다보는데 앞쪽에 앉은 청년들을 보고 하는 말이었다. 비탈길 억새 사이에서 휴대폰을 내려다보고 있다. 산에 함께 오르고도 서로 눈길은 옆이 아니고 앞으로 더 쏠린다. 손에서 떼어내면 죽기라도 할 듯 기를 쓰고 가지고 다닌다. “제 갈 길 거기에다 묻고는 다 찾아가버리니 나 같은 사람에게 길 물을 일이 있겠느냐”며 일갈한다. 요물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날로 돌연변이 튀어나오듯 얼굴 바꾸며 출현하니 사는 일이 때론 어지럽다. 사람의 일을 앗아 간다고 술렁댄다. 제가 만들고도 ..
훅, 가슴을 파고드는 꽃이다. 산길 옆 제법 큰 바위 아래 축 늘어진 가지 끝마다 소복하다. 가느다란 줄기 뻗음이 얼핏 보아 국수 면발 같다고 하여 붙여진 국수나무에 꽃이 피었다. 다섯 장의 꽃받침은 넉넉한 품으로 노란 꽃술과 하얀 꽃잎을 꼭 껴안고 있다. 꽃말은 모정母情이다. 조금만 눈을 들면 쉬이 만날 수 있는 꽃이다. 아기 새끼손가락 손톱 크기만큼도 되지 않을 정도로 작다. 화려하지 않아도 나비와 벌이 많이 찾아드는 꽃, 한참이나 길섶에 쪼그리고 앉아 바라본다. 꽃송이를 쓱 만져보니 화들짝 놀란 꽃잎들이 일제히 움츠리는 듯 그 떨림이 전해진다. 산행하는 건 이미 까먹고 국수나무꽃 근처에 자리를 편다. 보온병에 담아온 커피를 따라 마신다. 커피 향 위로 꽃향기가 쏟아진다. 물소리며 새소리까지 더해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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