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창 옛 친구가 찾아왔다. 시골 어느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그만두고 서울로 이사 온 지 두어 달 된다고 하였다. 점심을 함께 하며 정담을 나누었다. 화제가 거의 끝나갈 무렵에 친구는 "노상에서 우연히 만난 제자가 집으로 놀러 오라고 명함을 주던데." 하면서 수첩을 꺼냈다. 그가 사용한 '제자'라는 말이 내 귀에는 생경하게 들렸다. 그 제자는 개인 병원을 차린 의사였다. 일요일이니 집에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기대한 듯 친구는 수화기를 들었다. 그러나 의사는 외출하고 없어서 그 부인과 통화를 하는 모양이었다. 저쪽에서 누구시냐고 묻는 듯 친구는 자기를 '중학교에서 가르친 은사라고 소개하였다. 자기 입으로 '은사'라고 말한 것은 아마 실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자기를 은사라고 생각하고 있..
이(李) 아무개는 '차 향기 속에서' 라는 수필에서 차 맛과 비유해 가며 두 가지의 우정을 비교하고 있다. 커피처럼 뜨겁고 진한 우정도 겪어 보았고, 녹차처럼 은근하고 담담한 우정도 겪어 본 사람이 후자를 더 값지게 느끼는 심정을 한 폭의 수채화처럼 산뜻하게 그렸다. 커피를 연상케 하는 정열적인 친구는 쉽게 달아올라 가슴을 설레이게 하지만, 대개는 뒷맛이 개운치 않다. 녹차를 연상케 하는 은은한 친구는 생명을 약동케 하는 자극은 없지만, 오래 두면 둘수록 향취가 더해 가는 포도주처럼 꾸준하고 푸근하다. 어느 쪽을 더 좋아하는가는 개인의 성격에 따라서 다를 것이다. 나는 본래 어느 편이냐 하면 뜨겁고 진한 맛을 선호하는 성격이었다. 차면 차고 뜨거우면 뜨거워야지, 뜨뜻미지근한 것은 아예 싫다는 글을 쓴 기..
새해를 맞으며 우리들은 서로 행운을 빌고 덕담을 나눈다. 그러한 덕담이 실제 어떤 영향력을 발휘할 것 같지는 않으나, 듣기 싫지 않다. 나는 요즈음 운수라는 것을 무시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한때는 모든 것이 사람 하기에 달렸다고 방자하게 생각하는 버릇도 있었으나, 근자에는 인력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곤 한다. 그러나 역시 많은 것이 인간의 슬기와 노력에 달려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며, 한 번밖에 없는 나의 삶을 부끄럽지 않은 작품으로 키우고 다듬을 책임은 나 자신에게 지워야 할 것이다. 서양의 선철(先哲)은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였고, 동양의 성현은 "사람이 할 바를 다하고 천명을 기다리라."고 가르쳤다. 속담에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도 사람은 죽어서 이..
한국의 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다. 솔직히 말해서 봄이 언제 시작돼서 언제 끝나는 것인지 나는 정확하게 모른다. 어떤 사람들은 새해를 맞이하기가 바쁘게 새봄이 왔다고 기뻐하며 축복의 인사를 나눈다. 아직 바람이 차고 대지가 녹기도 전에 외투를 벗어 던지고 '희망찬 봄'을 구가한다. 그들에게는 봄이 길다. 우리나라에서는 입춘이 지난 뒤에도 눈이 내리고, 녹기 시작하던 땅이 다시 얼어 붙는다. 봄은 이름뿐이라고 하며, 여전히 외투로 몸을 감싸는 사람들도 있다. 주춤주춤 올 듯 말 듯 하다가 마침내 봄이 오기는 온다. 그러나 이젠 정말 봄이 왔구나 하고 가슴을 펴 볼까 하면, 어느 사이에 벌써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여름과 마주치게 된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봄은 허무하게 짧다. 젊음, 옛날에는 '청춘(靑春..
서울 도심지의 대형 서점에 들려 보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책들이 진열되어 있다. 극장보다도 큰 건물이 온통 새 책들로 꽉 차 있다. 국내의 서점에서 볼 만한 신간을 만나기란 있을 수 없는 일로 알려졌던 시절에 비하면, 책방에 들른다 하면 으레 외국책이 대부분인 헌책방 찾아다니는 것을 의미했던 젊었던 시절에 비하면, 실로 엄청난 변화이다. 신문이나 잡지의 광고란을 보아도 책 광고가 차지하는 면적이 결코 적은 편은 아니다. 일본 신문에는 책 광고가 많은데 한국 신문은 영화 광고와 술 광고가 판을 친다는 한탄의 소리가 들렸던 30년 전에 비하면, 대견하기 짝이 없는 발전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좋은 방향으로만 변화하기는 어려운 일이어서, 출판문화의 양적 성장이 오로지 경사스러운 기쁨만은 아닌 것..
속상하고 화나는 일, 억울하고 분한 일, 매일같이 일어난다. 친한 친구 만나 하소연한다. "액땜한 셈치고 잊어버리라"고 위로한다. "남의 일이니까 그렇게 태연하게 말할 수 있겠지" 하며 이번에는 친구에게 화풀이를 한다. 친구는 피식 웃고 만다. 나도 세상 물정에 어두웠던 탓으로 큰 손해를 본 경험을 가졌다. 집 한채를 사기 당한 적도 있었고, 속담 그대로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 아픔도 더러 당했다. 자질구레한 일로 기분이 상한 날은 예쁜 얼굴을 가진 여자가 대로상에서 껌을 볼품 없이 씹는 모습을 목격한 날보다도 더욱 자주 있었다. 새로 산 고무신 또는 우산을 도둑맞고 한동안 기분이 나빴던 경험도 있다. 하루 세 끼 먹기가 어렵던 시절의 이야기다. 크게 잘못한 일도 없이 담임 선생에게 따귀를 얻어맞고 밤..
과연 고승의 풍모답다. 결가부좌한 다리 위로 가지런히 손을 포개고 정면을 응시하는 그윽한 눈매, 곧고 오뚝한 코 아래 꼭 다문 홀쭉한 입술, 양옆으로 돋은 볼록한 광대에 연륜이 느껴진다. 이마의 세 가닥 주름과 입가로 내려오는 팔자주름, 그리고 툭 튀어나온 울대뼈와 앙상한 쇄골 밑으로 뼈마디가 보이는 손등 탓인지 노승은 더욱 수척해 보인다.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고려시대 승상인 건칠희랑대사좌상이다. 이번에 해인사 성보박물관 수장고에 모셔졌던 이 초상을 옮겨와 박물관 특별기획전을 연다고 하기에 한걸음에 달려가 친견하였다. 곳곳에 파이거나 눌린 자국이 있고 색이 긁히거나 조각이 떨어져 나갔지만, 한평생 오롯한 정진으로 일관한 수행자의 모습은 변함없다. 대부분의 불상이 팽팽한 볼살과 함께 단단한 어깨..
글이 도무지 써지지 않는다. 글쓰기와 멀어지지 않으려면 매일 무엇이든 써야 한다는 주위의 조언이 마음을 조급하게 만든다. 기껏 머리에서 떠올린 단어들은 제자리를 찾지 못해 맞춰지지 않는 퍼즐 같다. 글머리부터 티격태격하다 힘들게 조합한 문장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가 없다. 쓰고 지우길 반복한 날이 얼추 한 달은 지났다. 생각해 보니 아끼던 안경이 사라진 시기와 딱 들어맞는다. 한 달 전쯤이다. 십오 년 가까이 써온 자줏빛 뿔테 돋보기안경이 감쪽같이 자취를 감추었다. 아침나절 신문을 볼 때 사용한 것까지는 기억나지만 어디다 벗어두었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넓지 않은 집안을 몇 날 동안 뒤져도 행방이 묘연했다. 여분의 돋보기는 두어 개 더 있지만 집에서 글을 읽고 쓸 때 늘 애용해 온 것이다. 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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