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분다. 어둠을 더듬어 온 바람은 동해의 눈꺼풀을 살며시 올린다. 곤히 잠든 아이를 깨우는 엄마의 손길처럼 살갑게 바다의 몸을 쓰다듬는다. 바다는 칭얼대는 아이처럼 몸을 뒤채면서도 조금씩 깨어나고 있다. 동심의 푸른 바다, 동해를 깨우는 바람에서도 푸른 색감이 묻어나는 듯하다. 남편과 함께 블루로드를 걷는 중이다. 어떤 손이 있어 밋밋하던 길에 푸른색을 입혀 놓은 것일까. ‘푸른’이라는 말이 주는 청량한 어감이 길에 대한 기대치를 한껏 높여준다. 게다가 길 위에서, 하루의 처음을 여는 태양의 장관을 만날 수 있다니. 발걸음이 빨라진다. 길(吉)한 터의 조건 중 하나가 좌청룡우백호라 하던가. 무성한 솔숲과 동해를 양쪽으로 거느린 오솔길이 해안을 따라 끝없이 이어진다. 여명이 깔린 길은 몽환적이기까지 ..
예쁘다 너는. 섹시하다 너는. 한동안 나는 이 거리를 지날 때마다 너를 눈여겨보아 왔다. 그러나 이토록 화사한 너를 만나러 오는 일은 그리 쉽지 않았다. 나의 마음속에는 오랫동안 혹독한 겨울이 머물러 있었다. 봄이 오고 꽃이 피어나도 그 냉기는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마침내 꽃잎이 떨어지기 시작한 오늘, 나는 깊은 호흡으로 애써 그 냉기를 몰아낸다. 그리고 유리문을 열고 너에게로 다가선다. 너는 옛날의 나를 기억케 한다. 너의 몸은 아침에 갓 깨어난 섬세한 꽃잎 같은 피부에 싸여 있다. 송아지 가죽이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촉감은 진저리가 쳐질 만큼 부드럽다. 입안에 침이 고여 혀를 깨물 뻔한다. 너에게서는 비릿하면서도 초콜릿 향 같은 소녀의 살내음이 난다. 그러나 겨울을 견디고 피어난 창밖에 벚꽃처럼 매..
어지러웠다. 오랜만에 화창한 햇볕을 대하니 너무 눈부시고 현기증이 났다. 그대로 땅바닥에 쭈그려 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잠시 그러고 있다가 일어나면 그만이고 별로 문재 될 것도 없었다. 그런데 나의 그런 모습이 남의 눈에는 크게 걱정스러웠던 모양이다. “왜 그러세요, 도와드릴까요?” 눈을 들어보니 20대로 보이는 아가씨가 나의 팔을 잡고 흔들면서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괜찮다고, 걱정 말라고 몇 번이나 말해서야 그 아가씨는 제 갈 길을 갔다. 회색 바지에 베이지색 코트를 걸치고 머릿결이 뒷목을 덮은 키가 훤칠한 아가씨였다. 나는 한참동안이나 멀어져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아가씨가 내 곁에 머문 시간은 극히 짧은 순간이었지만 내게는 진한 여운을 남겼다. 요즘은 길을 가다가 약자가 ..
고향 친구들 부부 동반 모임에 가면 남녀 부동석인 경우가 많다. 아예 다른 테이블에 나뉘어 앉는다. 우선은 스무 명이나 되니 한꺼번에 모두 앉기가 복잡하다. 대화의 주제가 다르다. 시골에서 자라 남녀 간에 내외하던 어릴 적부터의 고루한 습성이 몸에 밴 탓도 있다. 나이 들어감에 따라 여자들의 몸은 예전 같지 않나 보다. 귀갓길에 아내가 여자들 대화 주제는 건강과 질병에 대한 것이 태반이라며 나눈 내용을 옮긴다. 병은 숨기지 말고 자랑하라고 했다. 누구 엄마는 어디가 아프고 어느 병원이 치료를 잘한다며 각자가 자기 질병과 치료 경험을 다투어 얘기한다고 한다. 그중 어느 엄마는 치질 수술과 요실금 수술로 아랫도리 구멍을 모두 손봤다고 해서 웃음보가 터졌다고 했다. 자지러지던 웃음소리가 그 때문이었나 보다. ..
아무리 코로나 팬데믹이라 해도 이웃을 만나지 않고 살 수 있을까. 감염병 때문에 마스크를 쓰고, 사회적 거리두기를 한다 해도 지난날의 삶과 완전히 선을 긋고 살아갈 수 있을까. 재택근무를 하며 사이버 공간에서 일을 처리한다 해도 기존의 업무 처리 방식을 모두 덜어내지는 못한다. 의식 속에서는 여전히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중시하며 가치를 창출하려 한다. 이웃과 함께하고 부대끼며, 기쁨과 노여움 슬픔 즐거움을 찾아 나선다. 사람과 이웃하며 사는 일이 쉬운 듯해도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니다. 하루를 살아내며 우리는 수시로 끝없이 사람과 마주친다. 남자도 만나고, 여자도 만나고, 동지도 만나고, 원수도 만난다. 이때의 만남에서 얼마나 슬기롭고 지혜롭게 이웃을 마주하고 멀리 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가치는 빛난다...
녹음이 우거지던 때 우리는 이사를 했다. 그래서 오래 가꿔온 나무들을 두고 떠나는 것이 더욱 서운했다. 나는 작년 6월 중순경에 오래 몸담았던 공주를 떠나서 대전으로 이사했다. 6월 중순이면 성하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지만 여름철에 접어든 것만은 틀림없다. 장마가 일찍 시작되는 해는 수시로 비구름이 오락가락하는 때이기도 하다. 우리가 떠나오던 날도 바로 그런 날씨여서 마음이 조마조마했었다. 이사는 대개 봄 아니면 가을이 제철인데 내가 이런 걸맞지 않은 시기를 택해서 이사하게 된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 정년으로 강단을 물러난 뒤에 몇 군데 시간강사로 출강하고 있는데 학기 중에는 아무래도 마음이 한가롭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하여 종강 후 이사하는 것이 마음 편할 것 같았던 것이다. 마침 집을 팔..
해가 이지러질 때마다 비상등마저 없는 순도 백 퍼센트의 어둠이다. 어둠 속에 별들이 등불이 되어 지상으로 총총 걸어와 등대가 된다. 어렸을 적 산골집에서 모깃불 연기가 눈을 찌르는 바람에 하늘을 올려다본 밤하늘이다. 희망과 꿈을 안고 어머니가 누에고치 세 벌 밥 주고 올려다본 그때의 그 별빛, 세월이 지나동경이었던 별이 이젠 아련한 그리움으로 변했다.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이 이토록 많은 별이 되어 있다니 그만큼 오래 살았단 뜻인가? 이 호젓한 망망한 사막에 혼자 던져져 있는 것처럼 외로움이 엄습한다.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하늘의 별이 된다고 했던가? 홀연히 내 곁을 떠난 사람들이 보고 싶어진다. 영혼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떠난다. 지구 밖 하늘에서 뛰놀며 이승을 바라보고 있을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이여, ..
제16회 바다문학상 수상작 해류와 조류, 고래는 바다에만 있는 게 아니다. 삶의 바다에도 엄연히, 면면하게 존재한다. 그날의 마음자리와 결에 따라 사그라지거나 분진처럼 풀썩이는 희. 노. 애. 락이 고래의 초음파 신호음을 보내며 조수처럼 들락거리고, 삶의 방향과 무게 질량은 암초 마냥 암묵한다. 삶을 맘대로 요리하고 지휘하는 마음의 심지心志가 판단하고 선택하고 조율하는 대로 삶이 펼쳐진다며, 천형 같은 화두를 삶의 심해에 풍덩, 던진다. 섬찟하다. 새끼를 낳아 젖을 먹이고, 먹이를 탐색하고, 장애물과 해저의 지형을 파악해서 무리에게 소리를 전달하는 혹등고래 노랫소리가 뱃고동처럼 구슬프다. 구가한 사랑이 홀연 떠나버린 것일까. 내 맘속에도 뱃고동이 울린다. 울컥해진다. 700만 년 전 태어난 인간이 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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