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다가오면 여러 해 전에 길에서 만난 어떤 제자가 던진 시답잖은 질문이 가끔 머릿속에서 맴돈다. 오랫동안 공주에서 살다가 정년을 계기로 대전에 정착하게 되었는데, 그해의 여름으로 기억된다. 삼복더위에 무슨 급한 볼일이 생겼던지 나는 낯선 거리를 땀을 뻘뻘 흘리며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때 우연히 지난날의 여자 제자를 만났다. 많은 제자들 가운데는 그쪽에서 인사를 안 하면 얼굴을 마주쳐도 모르고 지나치는 일도 없지는 않다. 또 헤어지고 나면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만났던 사실조차도 까맣게 잊기가 일쑤다. 그 제자도 그런 경우인 셈인데 다만 그때 나에게 던진 질문 한 토막이 오래도록 머리에 남는다. 서로 근황을 묻는 인사가 끝나고 나자 그 제자는 나에게 "선생님은 여름하고 겨울하고 어느 쪽이 더 좋으..
그리움이란 말속에는 사랑이 있다. 다른 사람도 그렇겠지만 나에게 어머니 사랑이란 퍼 올려도 퍼 올려도 줄지 않는 우물과도 같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숭고한 단어 어머니, 그걸 부정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 어머니를 내 어릴 적에는 ‘어매’라고 불렀다. 울 어매가 지난 2018년 삼복더위가 절정이던 음력 6월 19일 아흔다섯을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돌아가시던 날 우리 여덟 남매는 울고불고 법석을 떨었지만 맏아들인 나는 어쩐 일인지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았다. 누가 뭐라고 해도 다하지 못한 불효로 눈물샘이 메말랐기 때문이다. 입관하는 날, 수의를 입혀드릴 때였다. 다섯째 여동생이 어매가 평소 사용하던 침대 서랍에서 챙겨 온 틀니를, 평소 읽으시던 금강경을 가슴에 얹어드렸다. 이승의 모든 번뇌를 내려..
봄철 나물 중 흔한 머위는 주로 그늘진 대나무 숲이나 언덕에 자생한다. 대체로 이파리나 줄기를 먹는다. 맛은 쌉싸름하지만 입맛 돋우는 데 좋다는 나물이다. 몸에 좋은 것이 입에 쓰다는 말이 있으니 일부러라도 그 맛을 즐길 일이다. 작고 여린 잎은 데쳐서 된장 양념에 참기름 두어 방울 떨구고 깨소금 솔솔 뿌려 반찬으로 먹으면 별미다. 줄기는 껍질을 벗겨 삶았다가 무치거나 볶거나 탕에 넣어 먹기도 한다. 특히 육개장이나 오리탕을 끓일 때 넣으면 특별한 맛이다. 하지만 나는 삶은 줄기에 생새우와 함께 들깻가루 두 스푼 정도 섞어서 자작하게 볶은 것을 가장 좋아한다. 친정어머니가 보낸 택배 상자 속에 튼실하게 삶아져서 묶인 머위 대가 듬뿍 들어 있었다. 유난히 색깔도 누르스름하고 통통했다. 무슨 요리를 하든지 ..
영화 야말로 ‘코로나 블루’를 한방에 날려주는 진정 반가운 봄소식이다. 미증유의 이 끔찍스런 상실의 시대에 그나마 위안물이 되어주었다. 1. 영화를 보기 전 영화를 보기 전, ‘미나리’라는 영화 제목을 듣는 순간 내 머릿속엔 미나리꽝 근처에서 놀았던 유년의 추억들이 활동사진처럼 펼쳐졌다. 우리 마을 한가운데에 지붕이 있는 커다란 우물이 있었다. 20여 가구 남짓한 동네에 유일한 우물터였다. 양쪽에 우람한 버드나무가 우물을 향해 맞절하듯 기울어져 있어 제법 운치있는 풍광이었다고 기억된다. 축축 늘어진 버들가지는 빨래하는 여인들에겐 그늘이 되어 주지만 꼬마들의 손아귀에 잡히는 가지들은 어김없이 찢기고 꺾이는 수난을 당했다. 어머니가 빨래하러 갈 때나 물 길러 갈 때면 나는 걸레 바구니라도 들고 쫄랑쫄랑 따라..
글을 쓰면 세상일에 대들고 싶은 의식이 꿈틀거린다. 내 얼굴에 물음을 던지는 일이다. 한편의 글 상이 떠오르면 눈이 아프고 머리가 어질하도록 달려든다. 하지만 붙잡은 글은 장타령 노랫가락을 풀고 난 각설이의 내민 손이 허하듯 그렇다. 홀로 흔드는 글 품바다. 글 쓰는 연유를 헤집으려니 무춤해진다. 밭둑길에 자욱했던 아지랑이를 잡는 것 같다. 어쨌든 뭔가 쓰고 싶었다. 이 쓰고 싶었다는 것은 유년부터 내게 어룽대었던 아지랑이 그림자 같은 거였다. 그것은 내 고향의 산천이 내게 심은 심상이요, 우렁각시 이야기를 실타래처럼 풀어내시던 할머니의 품이었다. 내 고향은 경주에서 오십여 리 떨어진 산골 심곡深谷이다. 사랑메기라는 산 고개에서 내리뻗은 산자락이 소쿠리처럼 감싼 십여 호 좀 넘는 작은 마을이다. 앞엔 심..
엄마 손을 잡고 캄캄한 밤길을 걸었다. 대여섯 살 먹은 아이가 겁을 먹을 만도 한데 엄마가 있어서 괜찮았다. 어른들 말을 들으니 무서운 것은 귀신이 아니라 인민군이라고 했다. 인민군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인민군에 발각되지 않게 조심조심 빙판길을 걸어야 한다고 엄마는 작은 소리로 말씀하셨다. 그런데 가죽 구두 굽에서 들리는 “똑똑 딱딱.” 소리가 골짜기에 더욱 크게 울렸다. 아버지가 사주신 구두였다. 한 짝이 언제 없어졌는지 쭈그려 신은 한쪽 발에서 소리를 냈다. 사람들은 구두 소리에 화를 내며 잰걸음으로 앞질러갔다. 엄마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욕을 먹으며 길을 걸었다. 밤하늘에 별들은 잠도 없는지 초롱초롱 빛을 품어내고 있었다. 엄마 등에서 동생도 잠이 들었는지 숨소리마저 내지 않았다. 엄마는 앞서가는 사..
오늘은 하늘도 맑고 투명하다. 오랜만에 가까운 친구들과 봄나들이에 나섰다. 들녘은 온통 노란 유채꽃으로 물들었고 연초록의 싱그러운 보리 물결이 봄 정취를 만끽하기에는 충분하였다. 머릿속을 메우던 잡념도 슬며시 물러간다. 서귀포 중문의 ‘지삿개’에 도착하여 산책로에 접어들었다. 해송 사이로 멀리 수평선이 보였고, 두 눈에 담을 수 없을 만큼 넓은 바닷가가 끝없이 펼쳐졌다. 해안선 끝자락에는 중문 해수욕장과 산방산도 눈에 들어와 멋스러운 풍치를 더해 주었다. 몇 발짝 더 다가서서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해안선 아래로 병풍을 둘러놓은 듯 펼쳐진 절벽과 어우러져 바다 풍경의 독특함을 보는 순간 와!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와 해변의 현무암이 오묘한 조화를 이루며 마음을 사로잡는다. 자..
“마셔 보세요!” 김 원장이 내놓은 것은 투명한 유리잔이었다. 묵직했다. 그러나 무얼 마시라는 걸까. 유리컵 안엔 아무것도 담겨있지 않았다. “마셔보세요!” 다시 독촉을 해왔다. “오전에 제가 한 번 마셨으니 가득 차 있지 않을 지도 몰라요.” 컵을 입으로 가져가 ‘훅’ 하고 들이마셔 봤다. 향긋한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것도 같았다. “햇빛이에요” 그녀의 설명이었다. 내가 지금 마신 건 창가에 쏟아지는 햇빛을 받아둔 것이란다. 좀 맹랑하단 생각이 들면서도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재미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햇빛을 내 속으로 들여보내준다? 그러면 내 속에선 어떻게 반응할까. 갑자기 들어온, 아니 한 번도 보지도 느껴보지도 못했던 한 밝음이 어둠 속의 그들에게 순간적으로 다가갔을 때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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