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내내 먹구름만 차오르더니 정오가 지나서야 빗방울이 떨어진다. 한낮인데도 저물듯이 어둑하다. 일찌감치 청소를 끝내고 그윽한 조명 아래 책을 펼쳐본다. 이보다 더 안온할 수 있을까. 북데기 같은 머리를 질끈 묶어놔도 신경 쓸 일 없는 안식처이다. 그 공간이 나만의 섬인 양 포시랍게 안착한다. 최면에 걸린 듯 아지랑이 아른거리고 이윽고 눈이 감긴다. 완벽한 평화에 느닷없이 균열이 생긴다. 아랫집에서 괄괄하게 야단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저 여자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악다구니를 내뿜는다. 점잖은 이웃을 만난 게 행운인지 불행인지 매일 들끓는 굉음을 분출해내며 육아의 설움과 자신의 건재함을 꾸준히 알린다. 점잖은 이웃답지 않게 야멸찬 표현을 쓰는 건, 저들이 지난밤 선을 넘는 치열한 싸움과 소음을 발산한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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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서 봄꽃 소식이 낭자하다. 매화가 먼저 봄을 깨우니 목련 진달래 산수유가 앞다투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다. 봄에는 꽃소식이 제일 반갑다. 마음이 꽃 같았던 오래전 봄날이었다. 봄꽃이 피기 시작하면 마음이 달떠서 몸살이 났다. 그럴 때는 지리산 서쪽 자락에 있는 구례로 달려갔다. 그곳에서 봄 길을 여는 꽃과 단아한 고택을 보노라면 갈증 난 꽃바람이 해갈되었다. 꽃눈이 몽실몽실 움트는 하동 십리벚꽃길을 지나 섬진강을 따라가면 제일 먼저 토지면에 있는 운조루가 반겼다. 구름 위를 나는 새가 숨어 사는 집 운조루. 삶 속에 풍류를 끌어드린 고택 앞에 서니 어떤 모습이 펼쳐질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연지를 앞에 둔 솟을대문 양옆으로 뻗은 긴 행랑채가 성곽처럼 당당했다. 240년 전에 99칸이나 되었던 고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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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했다. 무엇일까. 아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사람들이 성처럼 둘러선 보이지 않는 그 중심에서 어떤 일이 생긴 것일까. 그러나 위급하고 위험한 일은 아닌 것 같다. 사람들의 표정이 호기심이고 기대인 것으로 보아서 어떤 재미있고 신기한 일인 것이 분명하다. 나는 그 중심의 무엇인가를 확인하기 위해 우선 깨금발로 키 높이를 조정해 보았다. 하지만 그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사람들이 쌓은 성이 다섯 겹도 넘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조금 느슨해 보이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틈을 뚫고 들어갔다. 그러나 이내 앞사람에 막히고 말았다. 키는 나보다 큰 것 같지 않은데 덩치가 커서 내 눈이 뚫고 들어갈 틈까지 아예 차단해 버렸다. 그때였다. 와! 하고 사람들이 환성을 질렀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무슨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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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긋나긋해진 노란 배추속이 음식이라기보다는 잘 찍은 사진이나 그림 같다. 붉은 양념으로 침범하기가 저어된다. 나이가 들수록 무엇이든 뻣뻣하게 구는 게 싫어져서 올해는 조금 오래 소금물에 담가 두었다. 얌전히 숨죽인 채 물기가 빠지고 있는 채반에서 여리고 노란 배추속잎 하나를 뜯어 양념과 함께 간을 본다. 나긋함 속에 고집을 드러낸 짠맛이 혀를 제압한다. 나는 배추에 간을 맞췄는데 배추는 나긋한 몸으로 내 눈을 맞추었고 짠맛은 고스란히 내게로 돌아왔다. 충분히 조율하지 않고 강요하듯 맞춘 간은 그저 짜거나 싱거울 뿐 진정한 의미의 간은 아닌 모양이다. 누구나 첫걸음은 신중할 수밖에 없다. 첫 아이가 그렇다. 최선의 선택이라 우기며 강요하거나 아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에 개입한 부분이 얼마나 많았던가..
올망졸망 크고 작은 칸이 연결된 기차가 달리기 시작한다. 아이를 등에 업은 엄마가 바쁘게 뒤따라간다. 마지막 칸이 서서히 부풀어 오르더니 이무기가 되어 날아오른다. 그 뒤를 멧돼지 한 마리가 쫓아가더니 흩어져 사라진다. 거실 창가에 앉아 하얀 구름이 벌이는 쇼를 보고 있는 중이다. 언뜻 보면 누군가 커다란 솜뭉치를 맘대로 뜯어서 던져 놓은 듯한 형상인데 가만히 보고 있으면 계속 움직이며 천변만화한다. 여고시절 우리 학교가 전국체전 매스게임을 맡게 되었다. 매일 운동장에 집합하여 땡볕에서 맹훈련을 하였다. 두 팔과 두 다리를 쭉 뻗고 제자리에 눕는 자세가 있었다. 등을 땅바닥에 대고 눕자 새로운 세계가 펼쳐졌다. 같은 반 친구들도 선생님도 모두 사라졌다. 파란 세상에 몇몇 하얀 조각들이 둥실 떠 있었고 그..
작은아이의 방문이 빼꼼히 열려 있다. 투명인간처럼 지낸 게 달포가 다 됐지 싶다. 문을 열었다는 건 마음을 풀고 싶다는 신호다. 묵언으로 시위하는 아이나 엄마인 나도 힘든 시간이다. 시시때때로 버럭대는 상황을 맞닥뜨릴 때마다 적이 당황스럽다. 그럴 땐 ‘엄마’라는 자리를 던져버리고 싶다. 휘날리는 봄꽃처럼 내 마음도 난무한다. 화로의 불이 쉽게 사위지 않도록 눌러 놓는 돌이나 기왓장 조각을 불돌이라 한다. 평소 말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차깔한 마음을 풀지 못하는 제 속은 오죽하랴 싶다가도 마들가리 같은 삶에 나도 지친다.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는 것은 상처 받지 않으려는 것과 알량한 자존감 때문일 것이다. 이제는 나도 아이의 마음을 풀려고 애달파하지 않는다. 노년의 나이에 그럴 기력도 없고 나 또한 냉전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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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박 온 손님의 시선이 돌담에 한참을 머물러 있다. 자연스러운 게 오히려 멋스럽다며 이런 담이 있는 집에서 살고 싶다고 한다. 손님들에게서 자주 듣는 소리다. 담도 담이지만 초가 덕분에 돌담의 미가 더 돋보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돌담은 그리 높지 않다. 담의 기능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주변 경관과의 조화를 위한 담이라 아담하다. 제주에는 돌이 많다. 돌은 담을 쌓는데 좋은 재료다. 그렇게 쌓은 담을 돌담이라 한다. 제주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니 어려서부터 돌담에 친숙하다. 덕분에 그에 관한 얘깃거리도 많다. 어이없었던 사건 하나도 돌로부터 시작된다. 남의 집 입구를 막아버린 일이 있었는데 어렸기에 저지를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집주인은 인근 고등학교 서무과장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대부분이 그렇듯이 남자들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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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비가 추적거린다. 온 산의 나무들이 형형색색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산행을 하는 중에 내리는 비를 피할 수 없었다. 고스란히 비를 맞으니 옷이 흠뻑 젖었다. 추위와 싸우며 산을 내려왔다. 길가 전봇대는 빗줄기를 피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비를 그냥 맞는다. 비를 맞은 나무들은 선 자리에서 꽃과 잎을 피우고 가을이면 곱게 물들다가 겨울에는 이파리들을 땅바닥으로 떨어뜨린다. 그런 나무들도 전봇대처럼 선 채로 비를 맞는다. 나는 골목길에 서 있는 전봇대를 유심히 바라본다. 장난감이 없던 시절에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는 전봇대 아래였다. 여자 아이들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하가나 전봇대에 고무줄을 걸고 줄넘기를 하며 를 불렀다. 남자아이들은 전봇대에 등을 받치고 말뚝박기를 하면서 해 넘어가는 줄 모르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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