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어디에나 공평하게 내린다. 하루의 끝, 벨벳처럼 부드러운 어둠에 싸여 천변을 걷는다. 고요한 은색 물줄기가 엎드린 채 흘러간다. 도시의 노란 불빛은 현란한 무늬결이 되어 물 위를 떠다니고 옅은 습기를 머금은 간들바람이 살랑 코끝을 간질이며 스쳐 간다. 끈질기게 질척대던 늦더위는 흔적조차 없다. 여름은 그저 오래된 꿈같다. 친숙했던 풍경은 밤의 베일 너머에서 매번 다른 감상을 전한다. 뚜렷한 경계를 짓지 않는 어둠, 선명한 컬러로 처리되던 것도 색을 잃고 점점 한데 섞여 뭉그러진다. 예민한 촉수처럼 먼저 달려 나간 내 안의 어떤 감각이 그 윤곽을 조심스레 더듬는다. 익숙한 듯 낯선 밤의 테두리. 나는 어쩐지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나를 움직이던 한낮의 동력은 어느새 저만치 비켜난다. ..
‘나’는 실재의 인물이 아니라 가상의 인물입니다. 나는 진실의 인물이 아니라 허위의 인물입니다. 그러니 이 글은 가상으로 허위로 쓰는 거짓 글로 이른바 헛글이죠. 그렇다고 실존과 진정이 영 없는 것은 아니니 누군가 이 헛글의 행간에 웅크린 참나를 찾아낼지도 모르겠어요. 그리 안 해도 그만이지만요. 십이월 치고는 포근한 한날의 저녁 어스름에 강둑길을 걸으며 생각에 잠깁니다. 이곳을 ‘강둑길’이라니 대번에 거짓임을 눈치채겠지요. 대놓고 거짓이니 글쓰기가 훨씬 수월합니다. 나는 무언가 결론을 내려야만 한다는 당위의 심정으로 이즈음 안팎으로 머리를 죄던 일들을 떠올립니다. 떠올려진 것들이 잠시 가을 하늘 고추잠자리처럼 머릿속을 선회하다가 일제히 한곳으로 응집됩니다. 손에 들고 있던 스타벅스 커피의 마지막 한 모..
행복이 가득한 배움의 집으로 가는 길. 어깨에 멘 책가방도 흥겨운 듯 장단을 맞춘다. 신랄한 여름 볕을 잘 받아넘긴 초록 잎들이 형형색색 옷을 입히느라 바쁘게 팔랑댄다. 발걸음도 가볍게 경북대 평생교육원으로 간다. 5년여 동안 동창 모임도 접어둔 채 손주들 키우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올봄, 딸의 직장 내 어린이집으로 손주들이 등원하니 내게 시간이 생긴 것이다. 가끔 힘에 부친 적도 있었지만 손주 돌보는 일보다 보람 있는 일은 없다며 자신을 다독여 왔었다. 수필가 언니의 권유로 글쓰기를 시작했다. 메마른 가슴에 감성을 뿌리니 문학의 씨앗들이 싹을 틔웠다. 습윤을 위해 많은 책을 읽으며 때로는 밤을 새우기도 했다. 평생교육원 글쓰기 반에서 습작을 시작한 지 두 학기 째이다. 체계적으로 공부를 하면서 소녀적 ..
나의 걷기는 운동의 의미가 강조된 “걷기”라기보다는 “느긋한 기분으로 한가로이 거닒”이나, “휴식을 취하거나 건강을 위해서 천천히 걷는 일”로 뜻풀이가 된 산책에 더 가깝다. 칸트는 오후 3시 30분부터 하루도 빠지지 않고 정해진 길을 산책해 동네 사람들이 시간을 맞췄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키르케고르는 번잡한 코펜하겐의 거리를 산책할 때 머릿속에 많은 생각이 떠올라 쓸거리가 쌓이자 그것을 잃어버릴까 서둘러 집에 돌아갔다는 일화도 있다. 그리고 소로는 적어도 하루에 네 시간을 숲과 들판을 걷지 않으면 건강과 원기를 지킬 수 없다고 했다. 이렇게 유명한 사람들이 걷기를 통하여 건강도 지키고 두뇌활동도 활발해져 엄청난 학문적 업적을 이룬 것을 알기에 나도 걷는 것만은 따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퇴직하고..
부산서 출발하여 섬진강 휴게소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는 여행의 목적지를 정하지 못했다. 결혼 50주년을 맞아 자축하는 길이어서 어느 때와는 다른데도 말이다. 이렇게 무작정 나서게 된 것이 어이가 없었다. 젊었을 때와는 달리 얼마 전부터 남편은 먼 거리 운전을 힘들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디든 무조건 떠나자는 말이 솔깃하여 그러자고 했다. 떠나는 날 아침이 되어서야 허둥지둥 이것저것을 작은 가방에 챙겨 넣고 출발을 했다. 차창 밖에 보이는 산과 들판에는 봄, 여름, 가을에 볼 수 있는 다채로운 색들은 간곳이 없고, 무채색의 회색빛만 널려 있었다. 겨울의 찬 공기와 잎 떨어진 나무, 을씨년스런 풍경이 하나의 그림같이 잘 조화되어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졌다. 한 50년 같이 살고 나면 모든 것이 다 받아들여지..
동양의 창세 신화집 『산해경(山海經)』에 등장하는 제강(帝江)은 자루처럼 생긴 몸매에 다리가 여섯, 날개는 넷이지만 얼굴이 없다. 남해를 다스리던 숙(倏)과 북해를 다스리던 홀(忽)은 만날 때마다 제강으로부터 후한 대접을 받았다. 눈 코 입 귀가 없는 제강이 세상을 제대로 받아들이기가 얼마나 불편하겠는지 딱하게 여긴 둘은 이목구비를 뚫어주기로 하였다. 하루에 한 구멍씩, 마지막 일곱째 구멍이 뚫리는 순간 제강은 죽고 말았다. 듣도 보도 못하고, 냄새조차 맡을 수가 없어도 제강은 노래에 맞추어 덩실덩실 춤을 추었었다. 부드러운 음률에서는 춤사위가 느리고 가벼웠다. 날개에서 나오는 바람에 맞추어 꽃들이 피어나면서 향기를 흩뿌렸다. 격정적인 춤사위로는 비바람을 거세게 몰아왔다. 카오스의 몸통 이라 여겼던 제강..
"아휴, 장미 곱기도 하여라. 안개꽃이 여왕으로 떠받들고 있네.” 불꽃놀이가 아직 끝나지 않은 시각, 밤바람에 오랫동안 노출된 몸을 녹이고자 사람들이 서둘러 안으로 들어온다. 나는 상해 동방명주에서 내려다보이는 한 레스토랑 입구에 자리하여 주인보다 먼저 손님들을 맞이한다. "어쩜 이렇게 싱싱할까. 보통 솜씨가 아니네." 내 덕분에 주인은 꽃꽂이 실력이 훌륭하다는 칭찬을 자주 듣는다. 가끔은, “진짜예요?" ‘속고만 살았나?' 무슨 생각을 하건대 내가 진짜인지, 가짜인지가 궁금하단 말인가. 중년 신사가 가시에 찔리지 않도록 조심조심 푸른 물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이 윤이 나는 내 잎사귀를 손으로 어루만진다. 뒤이어 들어오던 부인인 듯한 여자가 내 몸 가까이 코를 컹컹대면서 다가온다. 무슨 냄새를 맡았는지 ..
801호 남자는 30년 넘게 군 장교로 복무를 하고 전역을 했다. 퇴직이 아닌 전역이란 언제든 전쟁이 일어나면 다시 군인이 된다는 거라고 한다. ‘나라와 국민을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책임을 다한다’라는 군인 정신이다. 피 끓는 사관생도 때 각인되었을 것이다. 환갑을 넘었지만, 근검절약이 입력된 정신도 변함이 없다. 그때 익힌 살림이 능숙 능란하다. 다리미질, 바느질, 빨래 널기, 개기, 청소하기, 쓰레기 비우기 등등 각도 있게 흐트러짐 하나 없다. 함께 사는 여자가 하는 살림 솜씨는 마음에 안 들어 이런 일은 남자가 도맡아 한다. 그렇다고 여자가 덜렁거리며 살림을 못 하는 것이 아니다. 나름 깔끔하고 꼼꼼한 스타일이다. 여자가 남들 보기엔 편한 것 같지만 마음이 편치 않다. 은근히 신경이 거슬려 짜증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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