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현듯 그리웠다. 날리는 눈발 탓일지도 모른다. 누르고 살지만 가끔 훅하고 들이닥치는 게 그리움이다. 구실이야 입맛이 동해서라지만 속내가 다르다는 걸 40년 살붙이고 살아온 아내가 모를 리 없다. 그저 군소리 않고 따라나서는 게 고마울 뿐이다. 차림이라야 감자옹심이와 옹심이가 들어간 칼국수, 감자 부침개가 전부이다. 모두 감자가 흔한 고향에서 어머니가 해주시던 소박한 음식이다. 향토음식점 주인은 강원도 태생이거나 그곳에서 오래 살았을 게다. 예전에는 빈 좌석이 없더니 코로나는 이곳도 예외가 아니다. 두 테이블에 두 명씩만 앉아있다. 온기가 있어야 할 실내 공기조차 써늘하다. 깡마른 데다 푸석한 파마머리의 표정 없는 주인 얼굴을 보니 정말 힘들구나 싶었다. 구수하고 진한 국물이 일품인 옹심이를 주문했더니 ..
눈이 내렸다. 새벽부터 시작된 눈은 아침나절까지 계속 내린다. 귤나무 사이가 하얗다. 샛노란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고 풍채 좋게 가지를 늘어뜨린 나무는 눈 속에서도 여유롭다. 고된 세월을 살아낸 생명이 뿜어내는 힘이랄까. 앙칼진 겨울바람에도 ‘이쯤이야!’ 하는 배짱이 느껴진다. 창밖으로 시선을 두며 찻물을 올린다. 잠시 후 주전자가 뜨거워진 몸을 떨며 수증기를 토해낸다. 들썩이는 주전자 뚜껑 사이로 뿌우우 기적 같은 소리가 가파르게 울린다. 그날도 눈이 왔었지. 기억은 숨 가쁜 열차를 타고 눈 오는 이른 아침에 도착해 있다. 여덟 살 되던 해 겨울, 며칠 동안 내린 눈으로 동네는 온통 하얀 눈밭이었다. 아침 일찍 눈이 떠졌다. “빨리 일어나라. 얼른 일어나!” 기상나팔 같은 어머니의 목소리를 두어 번은 듣..
마늘을 수확한 밭을 그대로 놔뒀더니 잡초가 나의 허리춤까지 자랐다. 들깨라도 심을 요량이 없었던 것도 아니어서 잡초를 뽑아내고 관리기로 한번 갈았지만, 그 뒤 며칠 비가 온 뒤로 다시 잡초가 자라 들깨심기를 포기하고 김장배추와 무를 심기로 마음을 바꿨다. 조그만 밭뙈기라도 여름철에 며칠만 내버려 두면 잡초의 공세를 막아낼 재간이 없다는 것을 느끼곤 한다. 8월에 들어서자 배추와 무를 심기 위한 밭을 조성하는 일을 미룰 수가 없게 되었다. 성능이 좋은 관리기를 가지고 있다면 잡초가 크건 작건 갈아엎으면 되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관리기는 오종종한 텃밭용이어서 우선은 예초기로 잡초를 제거해야만 밭을 갈아엎고 비료도 뿌리고 골도 탈 수 있다. 오전에 나는 예초기로 무성한 잡초를 눕혔다. 그리고 잘린 잡초를 대충..
장화 “아이고, 장화 한 번 신고 빗속에서 철벅거리면 묵은 체증이 내려갈 것 같은데….” “철부지 여편네….” 뒷말을 생략해 버리는 남편. 비가 올 것 같으면서 오지 않는 하늘을 혹시나 해서 한 번 더 쳐다보지만, 응답은 없다. 거실 한쪽에 놓인 장화가 “아직도 예요?” 하면서 쳐다보는 것 같다. 분홍색도 같고 연한 갈색도 같은 반장화다. 부슬비가 내리는 초여름 날 멋쟁이 친구가 신고 나온 진녹색에 자잘한 꽃무늬가 그려진 장화가 그렇게 예뻐 보일 수 없었다. 비슷한 것을 고르려고 여러 신발가게를 돌아다녔으나 헛수고로 고민하다가 인터넷 쇼핑 달인에게 부탁해서 사놓은 것이 한 달이 넘었다. 그동안 비가 전혀 오지 않은 것은 아니다. 주로 밤에 오거나 낮에 땅만 잠깐 적시는 정도로 감질나게 했다. 주차장과 맞..
창호지 문틈으로 빗소리가 모여든다. 빗물을 머금은 흙내음도 토방을 지나 마루까지 올라와 방안을 기웃거린다. 문고리를 풀자 앞산이 두 팔 벌린다. 자연과 경계가 없는 시골의 아침은 싱그럽다. 장화부터 신는다. 영락없는 농부의 모습이다. 긴 장대를 든 남편을 뒤따라 마당을 가로지른다. 무성하던 감나무의 푸른 기운은 된서리를 맞고는 풀이 죽었다. 다행스럽게도 감은 꼭지의 힘으로 매달려 있다. 감나무는 오랜 세월, 대문도 없는 집에 당간지주처럼 서 있었다. 비가 오는 관계로 감 따기가 수월하지 않다. 올해는 해갈이를 하는지 예전보다 감이 적게 달렸고 고것마저 죄다 가지 끝에 몰려 있다. 비에 흠뻑 젖은 나무를 오르는 남편이 쭉 미끄러질 듯 위태롭다. 짹짹짹 짹짹짹, 새들이 갑자기 날아든다. 아침을 깨우던 평화로..
새벽 전례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채소 반찬을 샀다. 입맛 잃은 아내가 좋아할 것 같아서 무장아찌도 샀다. 아내는 의외란 듯이 “어쩐 일이에요! 해가 서쪽에 뜨려나? 그렇지 않아도 깔끔하고 담백한 것이 먹고 싶은데 잘되었네.” 했다. 아내의 입맛이 나와 엇비슷해지는 것을 보면 그동안 은연중에 서로 입맛까지 길들여져 있는 것 같다. 아침 식사에는 느끼한 것보다 간편하면서 연하고 산뜻한 음식을 먹고 싶다. 철 따라 봄에는 쑥국, 나박김치, 콩나물국, 여름에는 오이냉국, 열무물김치 가을에는 명탯국, 무생채 겨울에는 동치미, 백김치 등을 먹는다. 작은 씨앗이 뿌리를 내려 가을 서늘한 기온에 자란 무는 사람 몸에 들어가 열을 식히고 마음도 차분하게 해 준다. 무는 물의 저장고다. 가을무는 봄에 바람 들기까지 몸에 ..
아침부터 비가 내리고 있다. 한 방울 한 방울 쏟아지는 비는 만물을 키우는데 필요하다. 하지만 빗방울이 모여서 홍수로 변하면 도움은커녕 모든 것을 파괴한다. 살아가는 인생길에 작은 아픔들은 나를 성장시키는 기회가 된다. 내가 감당하지 못할 아픔은 나를 무너뜨리는 무기가 된다. 커다란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작은 아픔들을 참아내는 연단이 필요하다. 코로나에 걸리지 않기 위하여 코로나19 백신 접종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살아오는 길목마다 아프지 않았던 순간들이 있었던가. 뒤돌아보면 굽이굽이 마다 어려웠던 일들이 겹겹이 쌓여있다. 타인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힘들어 보여도, 본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고난이 아니다. 사람들이 고향이 어디냐고 내게 묻는다. 나는 정선읍에서 자동차로 삼십분 거리에 있는 농촌마을이..
초록빛 들판을 가로질러 덕계역으로 전철을 타러 가고 있다. 나는 매주 세 번씩 대한노인회 양주시지회에서 운영하는 어르신 한글교실에서 수업을 마치고, 이 길을 가면서 초록의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어르신들은 모두 50~80대로서 한글을 배우는 싱그럽고 포근한 내 어머니 같은 향기로운 초록들이다. 나는 초록색을 좋아한다. 산도, 들도 온통 짙푸른 초록으로 둘러싸인 들판은 언제 보아도 싱그럽다. 마치 고향의 들판에 서 있는 것 같다. 하늘은 파랗고 하얀 목화솜 같은 뭉게구름이 두둥실 떠가는 한가한 들녘이다. 길섶에 작은 땅 한쪽엔 참깨 들깨가, 또 한쪽엔 열무와 부추, 토마토와 오이, 고추, 가지가 탐스럽게 주렁주렁 달려있고, 미나리, 얼갈이, 청경채, 깻잎 등, 여러 가지 쌈 채소들이 즐비하다. 밥과 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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