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학창 시절의 앨범을 보며 옛일을 상기시켰다. 사진은 이미 빛이 바래 누랬다. 오래전 묻힌 추억이 스멀스멀 기어 나와 어린 시절로 가고 있었다. 이름도 잊은 얼굴들이 지나가고 지금까지 알고 지내는 얼굴도 있었다. 사진은 왠지 먼지 묻은 그리움이 쌓여있는 것 같았다. 앨범을 넘기는 손가락이 저리었다. 넘겨지는 면마다 희미해진 인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소풍 가서 찍은 사진, 교정에서 어깨동무처럼 해서 카메라에 몸을 맡긴 포즈는 어린 티가 너무나 보였다. 우리도 이럴 때가 있었구나, 생각하며 입꼬리가 스스로 올라갔다. 계속 낡은 앨범을 뒤로 넘겼다. 몇 장을 더 넘기니 아름다운 여학생의 사진이 나왔다. 제법 큰 사진이었다. 고등학교 교복 차림의 소녀는 큰 나무 옆에 서 있었다. 흑백사진이지만 그렇게 빛..
결 고운 순수가 가득한 곳, 품 넓은 수더분한 사람 닮은 강원도 인제에서 온 화분花粉 한 병. 벌이 완성한 보석 한 숟가락을 입에 털어 넣었다. 황갈색과 암갈색, 노르스름한 빛을 띤 가벼운 알갱이들이 사르르 녹는다. 엄나무 피나무 도토리 꽃 다녀온 족적의 흔적이다, 일벌들이 온몸을 바쳐 모은 화분, 인제의 흔들리는 꽃가루가 목을 간질여주는 맛 달콤 쌉싸름하다. 하루 종일 팔랑팔랑 이리저리 꽃 피는 식물 찾아 꽃가루를 수집하는 일벌들. 타액에서 분비되는 소화 효소와 섞어 벌화분(beepollen)으로 알려진 화합물을 발가락에 묻혀 벌집으로 가지고 온다. 이 물질은 꽃가루와 꿀, 효소, 밀랍 등이 혼합된 천연 성분이라고 한다. 꽃가루의 성분은 꿀벌이 모은 식물에 따라 달라지지만 달콤한 꽃 맛이 들어 있다. ..
아파트 주변을 휘도는 냇물을 따라 산책로가 만들어져 있다. 천변을 산책하는 것이 요즘의 낙이다. 동쪽은 고속도로 가까이 까지, 서쪽은 물왕호수로 이어져 있다. 동쪽은 30여 분의 산책로이지만 서쪽은 호수를 돌아 나오려면 두어 시간이 넘는 제법 먼 거리다. 동쪽으로 걷는 날이 많았다. 들풀이 우거진 천변은 늘 바람이 수런거렸다. 가을로 접어들며 갈대와 억새꽃이 흐드러지고 고마리가 앙증맞게 물가를 장식했다. 여뀌도 꽃임을 주장하듯 물가의 푸른색에 붉은 점을 찍었다. 풀꽃 그림자 아래엔 작은 물고기들이 지느러미를 쉬고, 흰뺨검둥오리 몇 마리는 구색 맞추듯 수면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평화로운 풍경화다. 가끔은 백로와 왜가리도 풍경을 더했다. 풀꽃 이름을 불러보고 멀찌감치 공원의 화살나무 붉은 단풍에도 눈길을 주..
반듯하게 깎인 연필이 필통에 가지런히 있으면 뿌듯하던 시절이 있었다. 책보자기 둘러메고 십 리 길 뛰어 학교에 가다 보면 필통의 연필은 흐트러지고 까만 연필심은 고단함에 그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필통 뚜껑만 열면 늘 잠자던 나무 향이 배시시 깨어났다. 그 향은 들뜬 마음을 안정시켜 주곤 했었다. 나무 안에 감춰진 까만 속심, 연필도 요즘은 형형색색이다. 한번 검정 연필이면 평생 검은색으로만 써진다. 사람으로 치면 고지식하지만 올곧게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을 보는 듯하다. 눈 뜨면 들로 산으로 다니시며 농사짓는 일밖에 모르던 아버지 같다. 밭 갈고 쟁기질하던 거친 손으로 입학하는 딸을 위해 연필을 깎아주셨던 아버지. 부러진 연필을 깎고 또 깎아서 짧아진 몽당연필을 볼펜 껍데기에 끼워 침 바르며 공책에 삐뚤..
MBC 라디오 방송 ‘여성시대’ 방송작 해마다 장인 제삿날이면 형제들은 읍내 큰 처남 집에 모인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여인네들은 음식 준비에 부산하고, 큰 처남은 날밤 치랴 돔배기 꿰랴 여념이 없었다. 나와 아랫동서 셋은 열 세평 그 좁은 틈바구니에서 술잔을 나누며 회포를 풀고 앉았다. 오랜만에 만난 우리는 권커니 잣거니 서둔 탓에 일찌감치 얼큰해졌으며, 제사 지낼 자정까지 서너 시간을 죽여야 하는 지루함에 배배 꼬인 그때였다. “행님들 나가시죠. 제가 한턱 쏘겠습니다.” 서울 막내동서가 속삭인다. 그는 재봉틀 부속 전문점 사장으로서 돈을 잘 번다. 안 그래도 화려한 서울 얘기로 호기심이 동해 있던 우리는 얼씨구나 하며 답답한 아파트를 빠져나왔다. 어수선한 틈을 타서 삼베바지 방귀 새듯 하였으니 눈치를..
맏딸이 엄마가 되었다. 세월은 유수와도 같아 어느새 나를 할머니 자리에 데려다 놓는다. 쌔근쌔근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든 아가를 들여다본다. 어디 있다가 이제 왔니, 나의 천사. 요 발가락 좀 봐, 어쩜 이리도 보드라울까. 흠흠, 달큼한 냄새. 선물 같은 녀석이 고마워서 다시 또 본다. 길고 숱 짙은 속눈썹, 반지르르한 이마, 갓난아기가 밤잠을 푹 자니 어미가 한결 수월하다. 아가를 바라보는 딸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젊디 젊은것이 내 새끼, 내 새끼라는 말을 거리낌 없이 쏟아낸다. 뭘 안다고 그새 새끼 타령인가. 딸이 어미가 된 사실조차 어색한 나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다. 허나 이내 곱게 눈을 흘긴다. 이런 날을 얼마나 고대했으면 저럴까 싶다. 혼인한 지 이 년 만의 수태는 온 가족을 설레게 했다..
비읍은 편집부에 새로 들어온 신참치고는 아는 게 많았다. 그런데 그가 아는 건 모두 조금씩 틀렸다는 데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틀렸다는 걸 인정하기보다는 사전이나 그 사전을 끼고 십 년 이상 먹고 살아온 우리를 의심하는 쪽을 택해서 우리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가 실수를 할 때마다 그의 별명을 그 실수를 상징하는 말로 바꾸어 줌으로써 복수를 했다. 가령 이런 식이다. “비읍 씨. 일 안 하고 아침부터 거기서 뭐 해요?” “차장님. 저 문방구 앞에서 우산 들고 있는 아가씨 다리 참 죽여줍니다. 가히 뇌살적이군요.” “비읍 씨. 이거 비읍 씨가 교정 본 거죠? 그렇게 뇌살 좋아하면 쇄도(殺到)를 살도라고 하지 왜 그냥 놔뒀어요?” “하하하. 리을 선배님. 선배님의 다리 역시 뇌..
파크 골프채는 마지막 선물이 되었다. 일 년이 넘도록 그냥 상자 속에서 잠자고 있었다.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포장지만 겨우 벗기고는 줄곧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체력이 지금보다 더 떨어지면 하겠다는 고집으로 같이 가자는 친구들의 권유에도 한 번도 나가지 않았다. 재촉하는 아내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고집을 부리면서 파크 골프 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보여주지 못했다. 자기가 마지막으로 선물해 준 파크 골프채로 운동하러 가는 모습을 얼마나 보고 싶어 하였을까. 소박한 소원 하나도 들어주지 못한 고집쟁이 남편이었다고 늦은 후회를 해보지만 지금은 아무 소용이 없다. 아내의 병은 날이 갈수록 심하여 갔다. 치료와 간병에 최선을 다하는 것밖에는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정신없이 간병으로 보낸 7개월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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