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방/ 신철규 슬픔의 과적 때문에 우리는 가라앉았다 슬픔이 한쪽으로 치우쳐 이 세계는 비틀거렸다 신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지만 그것이 일반명사인지 고유 명사인지 알 수 없어 포기했다 기도를 하던 두 손엔 검은 물이 가득 고였다 가만히 있으면 죽는다 최대한 가만히 있으려고 할수록 몸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딱딱해지고 있었다 해변에 맨발로 서 있던 유가족 맨살로 닿을 수 없는 거리가 그들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죽을 때까지 악몽을 꾸어야 하는 사람들의 뒷모습 학살은 모든 사람들이 동시에 꾸는 악몽 같은 것 손가락과 발가락까지 피가 돌지 않고 눈이 심장과 바로 연결된 것처럼 쿵쾅거렸다 모든 것이 가만히 있는 곳이 지옥이다 꽃도 나무도 시들지 않고 살아 있는 곳 별이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멈춰서 못처럼 박혀 있는 ..
천생연분/ 정끝별 후라나무 씨는 독을 품고 있다네 살을 썩게 하고 눈을 멀게 한다네 그 짝 마코 앵무는 열매 꼬투리를 찢어 씨를 흩어놓는다네 다 먹을 수 없을 만큼 많이, 눈에 띄지 않을 만큼 멀리, 흩어진 씨를 배불리 쪼아먹은 후 어라! 독을 중화시키는 진흙을 먹는다네 베르톨레티아나무 열매는 이름만큼이나 딱딱해 너무 큰 데다 향기도 없어 그 열매를 좋아하는 건 쳇! 토끼만한 아고우티뿐이라네 앞니로 껍질을 깨 속살과 씨를 먹고 남은 씨를 땅 속에 숨긴다네 다른 짐승이 찾기 어려울 만큼 깊이, 싹이 돋아나기 쉬울 만큼 얕게, 잊어버릴 만큼 여기저기 너에게만은 독이 아니라 밥이고 싶은 너에게만은 쭉정이가 아니라 고갱이고 싶은 그리하여 네가 나를 만개케 하는 밥이 쓰다 / 정끝별 파나마 A형 독감에 걸려 먹는..
설날 고향 가는 길 / 오광수 내 어머니의 체온이 동구 밖까지 손짓이 되고 내 아버지의 소망이 먼 길까지 마중을 나오는 곳 마당 가운데 수 없이 찍혀 있을 종종걸음들은 먹음직하거나 보암직만 해도 목에 걸리셨을 어머니의 흔적 온 세상이 모두 하얗게 되어도 쓸고 또 쓴 이 길은 겉으로 내색하진 않아도 종일 기다렸을 아버지의 숨결 오래오래 사세요 건강하시구요 자주 오도록 할게요 그냥 그냥 좋아하시던 내 부모님 언제 다시 뵐 수 있을까요? 내 어머니, 내 아버지 이젠 치울 이 없어 눈 쌓인 길을 보고픔에 눈물로 녹이며 갑니다. 오광수 시인(이현세 화백 그림) 내가 당신에게 행복이길 / 오광수 내가 당신에게 웃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손짓과 우스운 표정보다/ 내 마음속에 흐르는/ 당신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봄길 / 정호승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낮은 곳을 향하여 / 정호승 첫눈은 가장 낮은 곳을 향하여 내린다/ 명동성당 높은 종탑 위에 먼저 내리지 않고/ 성당 입구 계단 아래 구걸의 낡은 바구니를 놓고 엎드린/ 걸인의 어깨 위에 먼저 내린다// 봄눈은 가장 낮은 곳을 향하여 내린다/ 설악산 봉정암 진신가리탑 위에 먼저 내리지 않고/ 사리탑 아래 무릎 꿇고 기도하는/ 아들을 먼저 떠나보낸 어머니의 늙은 두..
데미안 / 헤르만 헤세 Der Vogel kämpft sich aus dem Ei. Das Ei ist die Welt. Wer geboren werden will, muß eine Welt zerstören. Der Vogel fliegt zu Gott. Der Gott heißt Abraxas. 새는 알에서 벗어나려고 버둥거렸다. 알은 곧 세계다. 새로 태생하기를 원한다면, 한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새는 신을 향해 날개를 펼친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라 한다. ※ 데미안(소설) 해설 - 나무위키
흔들리는 것이 바람 탓만은 아니다 / 박건삼 입춘과 우수, 경칩이 있는 2월은 설레임의 달이다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은 2월은 그래서 상큼하다 아직은 설한풍에 비수를 감추고 훈풍의 미소를 띄우지만 난 알고 있지 열여섯 가시내의 젖몽울 같은 수줍음과 부풀음에 떨고 있는 2월은 가슴 설레는 달이다 하늘의 별이라도 따서 순이에게 바치고픈 삼돌이에겐 너무 짧은 달이지만 3월, 그 첫 휴가를 기다리는 김일병의 깨알 같은 수첩 속의 2월 얼마나 그리운 달인가 보조개가 귀여운 초롱초롱한 소녀 같은 때론 비비드한 말괄량이 선머슴애 같은 애증이 엇갈리는 2월은 변덕스러워 좋다 오랜만에 노사가 손잡고 지하철 파업을 중단하고 시어미와 새댁이 군에 간 아들과 지아비를 손꼽아 기다리며 화해하는 그런 달 2월은 가슴 조이는 모든 ..
아버지의 마음 – 김현승 바쁜 사람들도 굳센 사람들도 바람과 같던 사람들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어린 것들을 위하여 난로에 불을 피우고 그네에 작은 못을 박는 아버지가 된다. 저녁 바람에 문을 닫고 낙엽을 줍는 아버지가 된다. 세상이 시끄러우면 줄에 앉은 참새의 마음으로 아버지는 어린 것들의 앞날을 생각한다. 어린 것들은 아버지의 나라다 아버지의 동포(同胞)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이다. 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이다. 아버지는 비록 영웅(英雄)이 될 수도 있지만... 폭탄을 만드는 사람도 감옥을 지키던 사람도 술가게의 문을 닫는 사람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아버지의 때는 항상 씻김을 받는다. 어린 것들이 간직한 그 ..
그네 / 오만환 절대 믿음으로 매달려 일생을 산다 힘으로 밀면 힘있게 흔들리고 솟으라면 솟고, 신바람으로 춤을 추다가 온기 남은 그 자리 흔들림 속에도 중심은 있는 것 마음 맞는 사람 찾기가 쉽기만 하다면 살아서 흔들리지 않기가 즐겁기만 하다면 회안리에서 / 오만환 책보를 메고/ 칡뿌리 씹던 길/ 설레임으로 가다가보면/ 따비밭에/ 아버지의 머리칼/ 하얗게 덮여 있다가/ 이파리 돋우는 생각들// 술래가 된 비닐하우스/ 주인은 없고/ 머리에 부딪는 문짝 하나/ 한 세월의 바람을/ 막고 있다.// 초가이거나 기와이거나/ 하늘로 받들다가/ 손목 꼬옥 잡는 친구// 어디에 연으로 떠있는 것이냐/ 얼레의 실을 감고 감으니/ 언덕도 끌려오고// 둠벙을 푸고/ 미꾸라지 움키던/ 기억 푸른 거름더미엔/ 나비도 반가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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