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맨발1 - 연엽(蓮葉)에게 줌/ 송수권 그녀의 피 순결하던 열 몇 살 때 있었다/ 한 이불 속에서 사랑을 속삭이던 때 있었다/ 蓮 잎새 같은 발바닥에 간지럼 먹이며/ 철없이 놀던 때 있었다/ 그녀 발바닥을 핥고 싶어 먼저 간지럼 먹이면/ 간지럼 타는 나무처럼 깔깔거려/ 끝내 발바닥은 핥지 못하고 간지럼만 타던/ 때 있었다.// 이제 그 짓도 그만두자하여 그만두고/ 나이 쉰 셋/ 정정한 자작나무, 백혈병으로 몸을 부리고/ 여의도 성모병원 1205호실/ 1번 침대에 누워/ 그녀는 깊이 잠들었다./ 혈소판이 깨지고 면역체계가 무너져 몇 개월째/ 마스크를 쓴 채, 남의 피로 연명하며 살아간다.// 나는 어느 날 밤/ 그녀의 발이 침상 밖으로 흘러나온 것을 보았다/ 그때처럼 놀라 간지럼을 먹였던 것인데/ ..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 류시화 물속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는 그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 안에는 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있는 이여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 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 흘러서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여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소금 / 류시화 소금이/ 바다의 상처라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소금이/ 바다의 아픔이란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세상의 모든 식탁 위에서/ 흰 눈처럼/ 소금이 떨어져 내릴 때/ 그것이 바다의 눈물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 눈물이 있어/ 이 세상 모든 것이/ 맛을 낸다는 것을//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 류시화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
정선 / 이성복 내 혼은 사북에서 졸고 몸은 황지에서 놀고 있으니 동면 서면 흩어진 들까마귀들아 숨겨둔 외발 가마에 내 혼 태워 오너라 내 혼은 사북에서 잠자고 몸은 황지에서 물장구 치고 있으니 아우라지 강물의 피리 새끼들아 깻묵같이 흩어진 내 몸 건져 오너라 정든 유곽(遊廓)에서 / 이성복 1// 누이가 듣는 음악(音樂) 속으로 늦게 들어오는/ 男子가 보였다 나는 그게 싫었다 내 音樂은/ 죽음 이상으로 침침해서 발이 빠져 나가지/ 못하도록 잡초(雜草) 돋아나는데, 그 男子는/ 누구일까 누이의 연애(戀愛)는 아름다와도 될까/ 의심하는 가운데 잠이 들었다// 목단(牧丹)이 시드는 가운데 지하(地下)의 잠, 한반도(韓半島)가/ 소심한 물살에 시달리다가 흘러들었다 벌목(伐木)/ 당한 女子의 반복되는 임종(臨終..
그때는 아팠지 / 문현식 셋이 앉아서/ 돌아가며/ 웃긴 얘기를/ 하나씩 하기로 했다// 나는 친구와 한 자전거로/ 내리막길 달리다가/ 자갈밭에 굴러/ 피투성이가 되었던 일을 말했다// 유진이는 계단에서 아래로 날아 떨어져/ 턱이 퍼렇게 멍들어/ 수염 난 어른처럼/ 얼굴이 변했던 적이 있다고 했다// 재민이는/ 교통사고로 입원했는데/ 그때 다친 발가락이/ 비가 오는 날이면 간지럽다고 했다// 우리는 웃긴 얘기를 하기로 했는데/ 아팠던 얘기를 하며 웃었다// 팝콘 교실 / 문현식 커다란 팝콘 기예 안에/ 옥수수 알갱이 서른 개가/ 노릇노릇 익으면서/ 턱턱 튄다.// 알갱이들아/ 계속 튀어라./ 멈추면 선생님이 냠냠/ 다 먹어 버릴지도 몰라.// 태풍 축구 / 문현식 유리창을 깨고 지붕을 날려 보낸다는/ 슈퍼..
그 외 아무 생각도 없을 것이다 / 이규리 어미 새가 먹이를 물어 새끼들 부리에 넣어줄 때 한 번에 한 마리씩 차례대로, 새끼는 새끼대로 노란 주둥이를 찢어질 듯 벌리고 기다릴 때 그 외 아무 생각도 없을 것이다 절명이 그렇게 온다면 입을 벌리고 한 생각만 집중한 채 그렇다면 한생을 정확하게 전달했는가 나는, 벚꽃이 달아난다 / 이규리 그는 나를 앞에 두고 옆사람과 너무 화사하다/ 이편 그늘까지 화사하구나/ 죽방렴 사이를 빠져나가는 한 마리 멸치처럼/ 빠른 내 그늘을 눈치채지 못한다/ 나무둥치라 여긴 내 중심은 자주 거무스름하다/ 임산부가 행복하다면 가뜩 낀 기미는 말할 수 없었던 속내일까// 덜컹거리며 꽃길 백 리,/ 어쩌자고 화염길 천 리,// 나는 역방향에 앉아서/ 그가 다 보고 난 풍경을/ 뒤늦게..
소 / 김기택 소의 커다란 눈은 무언가 말하고 있는 듯한데 나에겐 알아들을 수 있는 귀가 없다. 소가 가진 말은 다 눈에 들어 있는 것 같다. 말은 눈물처럼 떨어질 듯 그렁그렁 달려 있는데 몸 밖으로 나오는 길은 어디에도 없다. 마음이 한 움큼씩 뽑혀 나오도록 울어보지만 말은 눈 속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 수천만 년 말을 가두어 두고 그저 끔벅거리고만 있는 오, 저렇게도 순하고 동그란 감옥이여. 어찌해볼 도리가 없어서 소는 여러 번 씹었던 풀줄기를 배에서 꺼내어 다시 씹어 짓이기고 삼켰다간 또 꺼내어 짓이긴다. 소 2 / 김기택 몸무게가 되기 위하여 물이 살 속으로 들어온다/ 살과 뼈와 핏줄 사이 가볍고 푹신한 빈큼들을/ 힘센 무게들이 빽빽하게 채워 버린다/ 차에 매달아 한 시간이나 끌고 다니며 만든/..
벚꽃 엔딩 /정창준 봄바람 휘날리며 흩날리는 벚꽃잎이, 벚꽃잎이, 벚꽃잎이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가까스로 넘기자마자, 분분한 해고의 순간, 바람을 핑계로 계약직의 생애가 저문다. 나무의 열매를 나눠 가진 적 없는 죄 없는 꽃잎들이 골목 끝으로 몰려 웅성거리다가 무심한 시선에 다시 한 번 쓸려 나간다. 다시 계약직의 무성한 잎들이 채용되었다. 아버지의 발화점/ 정창준 바람은 언제나 삶의 가장 허름한 부위를 파고들었고/ 그래서 우리의 세입은 더 부끄러웠다. 종일 담배 냄새를/ 묻히고 돌아다니다 귀가한 아버지의 몸에서 기름 냄새가 났다./ 여름 밤의 잠은 퉁퉁 불은 소면처럼 툭툭 끊어졌고 물 묻은/ 몸은 울음의 부피만 서서히 불리고 있었다./ 올해도 김장을 해야 할까. 학교를 그만둘 생각이예요./ 배추값이 오..
1. 한 줄을 쓰기 전에 백 줄을 읽어라 - 좋은 글 쓰려면 먼저 술·연애와 친하세요 지루한 일상 너머 소통과 상상 가능 시집은 언제든 연습할 수 있는 ‘악기’ 맛난 음식 많이 먹어야 요리도 잘해 좋은 글을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독(多讀)·다작(多作)·다상량(多商量), 곧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하라는 이 세 마디의 가르침은 10세기 중국 북송 때의 문인 구양수가 남긴 말이다. 자그마치 천 년 동안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때로 글쓰기를 가르치는 사람에 따라서 이 세 가지의 순서를 편의대로 바꾸기도 한다. 어떻게 하든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세 가지를 한꺼번에 하기엔 실로 벅차기 짝이 없다. 시간도 많지 않다. 나는 시를 쓰려는 당신에게 색다른 세 가지를 주문하려고 한다. 첫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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