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원익 시인 198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07년 《문학동네》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있음으로』가 있다. 미래의 책 / 주원익 너무 많은 구름의 문장들을/ 나는 건너왔다/ 책장을 펼치면 나는 소리없는 번개처럼/ 흘러가버린다/ 지금 막 열리고 있는/ 행간 밖으로/ 쓰여지는 순간 나는 완성되고/ 온전히 허물어졌다// 당신은 너무 많은 구름의 문장들을/ 건너왔다 나를 펼칠 때마다/ 당신은 시간처럼 넉넉한 여백이 되었다// 고요하게 타오르는 순간의 페이지들/ 잿빛 구름을 뚫고/ 버려진 왕국의 미래가 펼쳐진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불길 속에서// 나는 보이지 않는 폭풍처럼/ 다가오는 당신의 문장들을 가로지른다/ 내가 책장을 덮는 순간/ 당신은 이미 흘러가버린 침묵// 하늘과..
리산 시인 2006년 《시안》 신인상에 〈장미꽃 무늬가 있는 지극히 개인적인 진단서〉 외 9편의 시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쓸모없는 노력의 박물관』, 『메르시, 이대로 계속 머물러주세요』가 있다. '센티멘털 노동자동맹' 동인 인생이 이렇게 어두워서야 쓰겠나 싶어 / 리산 어두워지는 행성의 저녁에서/ 어두워지는 반도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한 잔 차를 끓이고 있노라면// 밤은 비단처럼 부드러워지고// 한 세월 잊었던 꿈처럼// 지구의 처마 끝에 매달린 고드름이며/ 불곰들 연어를 잡던 풀이 무성한 개울 생각// 있었지 모든 것이 있다고 생각한 날이 있었지/ 모든 것이 사라졌다고 생각한 날이 있었지// 밤새 찻물은 끓어오르고/ 어두워지는 반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인생이 이렇게 어두워서야 쓰겠나 싶어..
김학중 시인 1977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경희대학교 대학원 국문학과에서 현대문학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2009년 《문학사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창세』가 있다. 제18회 박인환문학상을 수상. 벽화 / 김학중 1// 눈먼자가 처음 그 벽에 부딪쳤을 때 벽이 거기 있다는 그의 말을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다. 사람들이 벽을 발견하게 된 것은 눈먼자가 자신의 몸을 뜯어 그린 벽화를 보고 나서였다.// 2// 벽화는 아름다웠다. 거친 손놀림이 지나간 자리는/ 벽의 안과 밖을 꿰매놓은 듯했고 스스로 빛을 내듯 현란했다. 색색의 실타래들이 서로 몸을 섞어 꿈틀대는 그림은 벽에서 뛰쳐나가려는 심장 같았다. 그 아름다움은// 벽의 것인지 벽화의 것인지 분명하지 않았다. 벽화를 본 사람들은 구토와 현기증을 호소했다..
류경무 시인 1966년 부산 동래 출생. 1999년 《시와반시》를 통해 등단. 시집으로 『양이나 말처럼』이 있다. 양이나 말처럼 / 류경무 나는 쉽게 벗겨지는 양말을 가졌다 쉽게 벗겨지려 하는, 양말의 재단사인 나는/ 양말을 위해 두 발을 축소시키거나 길게 늘여보기도 하는데// 나는 양말에 내 발을 꼭 맞춘다 나는 양말이 이끄는 대로 살아왔다 원래 나의 생업은 양말이었지만/ 양말은 너무 쉽게 벗겨지므로 양말은 이제 스스로 양말이 되려고 한다/ 이쯤 되면 양말은 그냥 양말이 아니라 양, 말이라는 전혀 새로운 동물로 변이된 것이어서 언젠가/ 해가 반쯤 저물던 저녁, 양말이 한 마리 야생 숫양처럼 두 발을 까짓것 들어올렸다가/ 온 뿔을 밀어 다른 양말을 향해 돌진하는 걸 보았다 그러니까 양말의 재료는 캐시밀론..
조영석 시인 1976년 서울 출생. 연세대 국문과, 서울예대 문창과 졸업. 2004년 《문학동네》 신인상. 시집으로 『선명한 유령』, 『토이 크레인』이 있다. 초식(草食) / 조영석 바람이 불고 부스럭거리며 책장이 넘어간다./ 몇 시간째 같은 페이지만을 노려보던 눈동자가/ 터진다. 검은 눈물이 속눈썹을 적신다./ 그는 빠르게 진행되는 바람의 독서를 막는다./ 손가락 끝으로 겨우 책장 하나는 잡아 누르며/ 보이지 않는 종이의 피부를 더듬는다./ 그곳은 활자들의 숲, 썩은 나무의 뼈가 만져진다./ 짐승들의 배설물이 냄새를 피워 올린다./ 책장을 찢어 그는 입 안에 구겨넣고 종이의 맛을 본다./ 송곳니에 찍힌 씨앗들이 툭툭 터져나간다./ 흐물흐물한 종이를 목젖 너머로 남기고 나서/ 그는 이빨 틈 속에 갇힌 활..
권현형 시인 1966년 강원도 주문진 출생. 강릉대 영문과 졸업. 경희대 대학원 국문과 석사, 박사 과정 수료. 1995년 《시와시학》 통해 등단. 시집 『중독성 슬픔』, 『밥이나 먹자, 꽃아』, 『포옹의 방식』이 있다. 2006년 한국 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 수혜. 2009년 제2회 미네르바 작품상, 시와시학 젊은 시인상 수상.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숙명여대 등에 출강. 싸이나 / 권현형 눈망울 선한 남자가 앉아 있습니다/ 내 기억의 사진관/ 어둑어둑한 암실 의자 위,/ 막 열린 입구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조카 아이 하나를 달고 온/ 분홍 스웨터 속 시리도록/ 흰 목을 훔쳐 봅니다/ 목조 계단을 급히 오르느라/ 숨 가쁜 처녀의 발그란 뺨을 따라/ 몰래 얼굴 붉히며/ 애타는 청춘처럼 새까만 커피에..
조용미 시인 1962년 경북 고령에서 태어나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1990년 《한길문학》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일만 마리 물고기가 山을 날아오르다』, 『삼베옷을 입은 자화상』, 『나의 별서에 핀 앵두나무는』, 『기억의 행성』, 『나의 다른 이름들』, 『당신의 아름다움』등이 있다. 제16회 김달진문학상, 제19회 김준성문학상, 제20회 고산문학대상, 제24회 동리목월문학상을 수상했다. 백모란 / 조용미 저 모란은 흰색과 붉은색의 양가감정을 가지고 있다/ 저물녘 극락전 앞에 내가 나타났을 때 모란은 막 백색의 커다란 꽃잎을 겹겹이 닫고 있었다/ 학의 날개 같은 꽃잎 안에 촘촘한 노란 수술을 품고 노란색 수술은 무시무시하게 붉은 암술..
윤이산 시인 1961년 경북 경주 출생. 경주 문예대학, 계명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09년 《영주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물소리를 쬐다』가 있다. 계간 《문학청춘》 기획위원. ‘시in’ ‘응시’ 동인. 선물 / 윤이산 늙은 두레상에 일곱 개 밥그릇이/ 선물처럼 둘러앉습니다/ 밥상도 없는 세간에/ 기꺼이 엎드려 밥상이 되셨던 어머닌/ 맨 나중 도착한 막내의 빈 그릇에/ 뜨거운 미역국을 자꾸자꾸 퍼 담습니다/ 어무이, 바빠가 선물도 못 사 왔심니더/ 뭐라카노? 인자 내, 귀도 어둡다이/ 니는 밥 심이 딸린동 운동회 때마다 꼴찌디라/ 쟁여 두었던 묵은 것들을 후벼내시는 어머니/ 홀몸으로 감당해야 하는 비바람이 귓속을 막았는지/ 추억으로 가는 통로도 좁다래지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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