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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마시기 / 최원현 “마셔 보세요!” 김 원장이 내놓은 것은 투명한 유리잔이었다. 묵직했다. 그러나 무얼 마시라는 걸까. 유리컵 안엔 아무것도 담겨있지 않았다. “마셔보세요!” 다시 독촉을 해왔다. “오전에 제가 한 번 마셨으니 가득 차 있지 않을 지도 몰라요.” 컵을 입으로 가져가 ‘훅’ 하고 들이마셔 봤다. 향긋한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것도 같았다. “햇빛이에요” 그녀의 설명이었다. 내가 지금 마신 건 창가에 쏟아지는 햇빛을 받아둔 것이란다. 좀 맹랑하단 생각이 들면서도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재미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햇빛을 내 속으로 들여보내준다? 그러면 내 속에선 어떻게 반응할까. 갑자기 들어온, 아니 한 번도 보지도 느껴보지도 못했던 한 밝음이 어둠 속의 그들에게 순간적으로 다가갔을 때 어.. 2022. 7. 8.
블루로드 / 박정숙 바람이 분다. 어둠을 더듬어 온 바람은 동해의 눈꺼풀을 살며시 올린다. 곤히 잠든 아이를 깨우는 엄마의 손길처럼 살갑게 바다의 몸을 쓰다듬는다. 바다는 칭얼대는 아이처럼 몸을 뒤채면서도 조금씩 깨어나고 있다. 동심의 푸른 바다, 동해를 깨우는 바람에서도 푸른 색감이 묻어나는 듯하다. 남편과 함께 블루로드를 걷는 중이다. 어떤 손이 있어 밋밋하던 길에 푸른색을 입혀 놓은 것일까. ‘푸른’이라는 말이 주는 청량한 어감이 길에 대한 기대치를 한껏 높여준다. 게다가 길 위에서, 하루의 처음을 여는 태양의 장관을 만날 수 있다니. 발걸음이 빨라진다. 길(吉)한 터의 조건 중 하나가 좌청룡우백호라 하던가. 무성한 솔숲과 동해를 양쪽으로 거느린 오솔길이 해안을 따라 끝없이 이어진다. 여명이 깔린 길은 몽환적이기까지 .. 2022. 7. 8.
최정진 시인 최정진 시인 1980년 전남 순천에서 태어났다. 순천대학교를 졸업하고 명지대 대학원 문창과를 나왔다. 2007년 《실천문학》을 통해 등단하였다. 시집으로 『동경』과 『버스에 아는 사람이 탄 것 같다』가 있다. ‘는’ 동인. 기울어진 아이* / 최정진 세탁소가 딸린 방에 살았다 방에 들여 놓은 다리미 틀에서 엄마의 품에 안겨 잠들었다 내 몸의 주름은 구김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엄마는 다림질 밖에 몰랐다 엄마의 품에 안겨 다려지다 어느 날 삐끗 뒤틀렸는데, 세탁소 안에서 나는 구부정하게 다니는 아이라고 불렸다// 다린다는 말은 주름을 지우는 게 아니라 더 굵은 주름을 새로 긋는 문제였다 수선된 옷들이 마지막 누운 곳은 다리미틀 위였다 뜨거운 것과 닿으면 닳은 곳부터 반짝거렸다 오래 입은 옷일수록 심했다 엄마는.. 2022. 7. 7.
구두 / 김응숙 예쁘다 너는. 섹시하다 너는. 한동안 나는 이 거리를 지날 때마다 너를 눈여겨보아 왔다. 그러나 이토록 화사한 너를 만나러 오는 일은 그리 쉽지 않았다. 나의 마음속에는 오랫동안 혹독한 겨울이 머물러 있었다. 봄이 오고 꽃이 피어나도 그 냉기는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마침내 꽃잎이 떨어지기 시작한 오늘, 나는 깊은 호흡으로 애써 그 냉기를 몰아낸다. 그리고 유리문을 열고 너에게로 다가선다. 너는 옛날의 나를 기억케 한다. 너의 몸은 아침에 갓 깨어난 섬세한 꽃잎 같은 피부에 싸여 있다. 송아지 가죽이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촉감은 진저리가 쳐질 만큼 부드럽다. 입안에 침이 고여 혀를 깨물 뻔한다. 너에게서는 비릿하면서도 초콜릿 향 같은 소녀의 살내음이 난다. 그러나 겨울을 견디고 피어난 창밖에 벚꽃처럼 매.. 2022. 7. 7.
이방인의 봄 / 하병주 어지러웠다. 오랜만에 화창한 햇볕을 대하니 너무 눈부시고 현기증이 났다. 그대로 땅바닥에 쭈그려 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잠시 그러고 있다가 일어나면 그만이고 별로 문재 될 것도 없었다. 그런데 나의 그런 모습이 남의 눈에는 크게 걱정스러웠던 모양이다. “왜 그러세요, 도와드릴까요?” 눈을 들어보니 20대로 보이는 아가씨가 나의 팔을 잡고 흔들면서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괜찮다고, 걱정 말라고 몇 번이나 말해서야 그 아가씨는 제 갈 길을 갔다. 회색 바지에 베이지색 코트를 걸치고 머릿결이 뒷목을 덮은 키가 훤칠한 아가씨였다. 나는 한참동안이나 멀어져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아가씨가 내 곁에 머문 시간은 극히 짧은 순간이었지만 내게는 진한 여운을 남겼다. 요즘은 길을 가다가 약자가 .. 2022. 7. 7.
환난이 배움의 기회이다 / 박세채 번역문과 원문 사람이 환난에 처하고 사변을 만남은 바로 배움을 진전시키는 큰 기회이다. 보통사람은 상황에 흔들려 허둥대고 상심하여 그 본심을 잃지 않는 자가 드물다. 人之處患難遇事變 正是進學之一大幾 常人則便被物動 劻勷隕穫 其不失本心者鮮矣 인지처환난우사변 정시진학지일대기 상인즉변피물동 광양운확 기불실본심자선의 - 박세채(朴世采, 1631~1695) 『남계집(南溪集)』 54권 「수필록(隨筆錄)」 갑인년(1674)조 해설 조선후기 문신이자 학자인 박세채는 갑인예송(1674)에 패하여 사판(仕版, 관료 명부)에서 삭제되는 처분을 받았습니다. 그는 나중에 신분이 회복되었고 조정에 나아가 대동법의 확대 실시와 탕평을 주장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습니다. 세상살이가 좋은 일만 만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좋은 일만 있기를.. 2022. 7. 6.
‘한국 수학자 첫 필즈상’ 허준이 교수가 푼 인류 난제는 / 한겨레 ‘한국 수학자 첫 필즈상’ 허준이 교수가 푼 인류 난제는 등록 :2022-07-05 16:52 수정 :2022-07-06 02:11 이근영 기자 국제수학연맹 4년마다 수여하는 ‘수학 노벨상’ 미국에서 출생한 뒤 한국서 초교~석사 마쳐 대수기하학으로 조합론 분야서 다수 난제 해결 허준이(39) 한국 고등과학원 석학교수가 한국계 최초로 ‘수학 노벨상’인 필즈상을 받았다. 지금까지 한국인이나 한국계가 이 상을 받은 적은 없다.대한수학회는 “올해 세계수학자대회에서 한국 수학자 최초로 허준이 한국과학기술원(카이스트) 부설 고등과학원 석학교수 겸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가 수학자 최고의 영예인 필즈상을 수상했다”고 5일 밝혔다. 필즈상은 국제수학연맹이 4년마다 여는 세계수학자대회에서 만 40살 미만의 수학자에게 수여하.. 2022. 7. 6.
서효인 시인 서효인 시인 1981년 전라남도 목포에서 태어나 전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동 대학원 석사과정을 졸업했다. 명지대 문예창작과 박사. 2006년 《시인세계》 신인상에 당선되어 등단했다. 시집으로 『소년 파르티잔 행동 지침』, 『백 년 동안의 세계대전』, 『여수』, 『나는 나를 사랑해서 나를 혐오하고』가 있다. 제30회 김수영문학상, 2017 대산문학상, 제20회 천상병시문학상을 수상했다. 작란(作亂) 동인. 백 년 동안의 세계대전 / 서효인 평화는 전투적으로 지속되었다. 노르망디에서 시베리아를 지나 인천에 닿기까지, 당신은 얌전한 사람이었다. 검독수리가 보이면 아무 참호에 기어들어가 둥글게 몸을 말았다. 포탄이 떨어지는 반동에 당신은 순한 사람이었다. 늘 10분 정도는 늦게 도착했고, 의무병은 가장 멀리 있.. 2022. 7. 6.
방귀 실금 / 권오훈 고향 친구들 부부 동반 모임에 가면 남녀 부동석인 경우가 많다. 아예 다른 테이블에 나뉘어 앉는다. 우선은 스무 명이나 되니 한꺼번에 모두 앉기가 복잡하다. 대화의 주제가 다르다. 시골에서 자라 남녀 간에 내외하던 어릴 적부터의 고루한 습성이 몸에 밴 탓도 있다. 나이 들어감에 따라 여자들의 몸은 예전 같지 않나 보다. 귀갓길에 아내가 여자들 대화 주제는 건강과 질병에 대한 것이 태반이라며 나눈 내용을 옮긴다. 병은 숨기지 말고 자랑하라고 했다. 누구 엄마는 어디가 아프고 어느 병원이 치료를 잘한다며 각자가 자기 질병과 치료 경험을 다투어 얘기한다고 한다. 그중 어느 엄마는 치질 수술과 요실금 수술로 아랫도리 구멍을 모두 손봤다고 해서 웃음보가 터졌다고 했다. 자지러지던 웃음소리가 그 때문이었나 보다. .. 2022. 7. 6.
자음 동화 / 강돈묵 아무리 코로나 팬데믹이라 해도 이웃을 만나지 않고 살 수 있을까. 감염병 때문에 마스크를 쓰고, 사회적 거리두기를 한다 해도 지난날의 삶과 완전히 선을 긋고 살아갈 수 있을까. 재택근무를 하며 사이버 공간에서 일을 처리한다 해도 기존의 업무 처리 방식을 모두 덜어내지는 못한다. 의식 속에서는 여전히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중시하며 가치를 창출하려 한다. 이웃과 함께하고 부대끼며, 기쁨과 노여움 슬픔 즐거움을 찾아 나선다. 사람과 이웃하며 사는 일이 쉬운 듯해도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니다. 하루를 살아내며 우리는 수시로 끝없이 사람과 마주친다. 남자도 만나고, 여자도 만나고, 동지도 만나고, 원수도 만난다. 이때의 만남에서 얼마나 슬기롭고 지혜롭게 이웃을 마주하고 멀리 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가치는 빛난다... 2022. 7.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