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쪽에서 뻗어온 산줄기는 북쪽에 다다라서야 금강산이 되었다. 금강산에서 동쪽으로 흘러내린 산줄기는 해금강에 가 잠겼다. 해빛을 받은 바위들이 굴곡진 뼈대를 그대로 드러냈으며,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거렸다. 7번 국도를 사이에 두고 고성 사람들은 바다와 산기에 삶을 두루 의지했다. 사람들은 전쟁의 폐허가 된 땅에 새로이 터를 다지고 지붕을 얹었다. 남과 북 사이에 군사분계선이 그어졌고, 길이 있되 더는 가지 못하는 길이, 끝나지 않은 분단의 서글픔을 턱밑까지 불러냈다. 고성읍에서 북쪽으로 30여 km만 가면 끝이 아닌 끝에 통일전망대가 있다. 통일전망대로 가는 길에서 '온정리'라는 이정표를 읽는다. 가슴 한구석이 서늘하기도 하고, 아릿한 통증을 일으켰다. 사람들은 통일전망대가 ‘끝’ 이라고 했다. 그러..

태백에서 38번 국도를 따라 삼척으로 가는 길에 해발 720m의 높은 고개를 만난다. 백두대간의 허리에 해당하는 이 고개는 지명대로라면 ‘통리재’가 맞지만, 강원도 사람들은 똬리를 튼 뱀을 닮았다 하여 '때배이재'라 부른다. 삼척 도계리와 태백 통리를 오가던 영동선 열차가 높은 고도차로 한 번에 넘지 못해, 지그재그로 놓인 철로를 앞으로 뒤로 방향을 바꿔 올랐던 고개다. 누구는 삼척의 본 모습이 바다라지만 알 만한 사람들에게 삼척의 본모습은 산이다. 험하기 이를 데 없는 구불구불한 고갯길 정상에 차를 세우니 멀리 도시가 보인다. 벌써 수년째 산중 오지를 떠도는 내겐, 삼척은 험준한 산 아래 하나의 도시일 뿐이다. 산언저리에 자리 잡은 시꺼먼 건물이 생경한 풍경을 연출한다. 삼척은 한때 ‘까막동네’로 불렸..

이른 새벽, 내곡동 동해고속도로 교각 아래서 같은 곳을 맴돌았다. 신복사 터를 알리는 안내 표지가 있었으나 도로와 야산을 두루뭉술하게 가리키고 있었다. 이럴 땐 큰길을 표시하는 거라고 알았던 터라, 믿는 도끼에 발등 제대로 찍힌 격이었다. 간간이 오가는 지역 사람조차 절터에 대해 들어본 적 없다며 고개를 가로저으니 난감했다. 그냥 포기 할까 망설이다 조금만 더 고생해 보자며 마음을 다잡았다. 위성 지도를 열어 대략의 위치를 파악하니 내곡동 소방서 근처 안골이라는 곳이었다. 내곡동의 ‘내곡內谷’ 한자를 살펴보니 안골과 맞닿는다. 소방서 뒤 야산으로 향했다. 초입이 워낙 허름해, 이런 곳에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가 있기나 할까 하는 의심이 뒤따랐다. 차 한 대 겨우 지나갈 만큼 폭 좁은 길을 따라 들어가니 왼..

달빛이 명백했던 밤이다. 부푼 달이 밤새 허공을 휘저었다. 잠을뒤척이다 홀린 듯 부산으로 향했다. 부산의 길은 어지러워서 매번 처음인 듯 낯설었다. 내비게이션이 아무리 최첨단의 정확한 신문물이라 해도, 뒤죽박죽인 거리에서 전후좌우 혼란해지는 판단까지 막을 수는 없없다. 무조건 용기 있게 ‘고go’를 외치던 자만마저 숙지게 했다. 순간의 판단은 수많은 오류와 섞이기 마련이어서, 매번 목적지를 지나치거나 되돌아 나오기를 반복했다. 그곳이 산간이든 오지든, 도심 한복판이든 아무리 반복해도 자라지 않는 길눈은, 생의 바깥에서 건너온 매우 낯선 어제이거나 그제 같다. 동래에서 구포로 넘어가는 고개를 넘다 잠시 멈췄다. 산 아래 펼쳐진 부산의 새벽은 깊다. 이 고개를 부산 사람들은 ‘만덕재’ 또는 ‘만등재’라 부른..

경주 남산에 수많은 골짜기가 있다. 어느 곳으로 오르든 신라의 흔적과 마주하게 된다. 그중 가장 큰 골짜기는 용장골로 길이가 3km에 달한다. 신라시대 용장사茸長寺라는 절이 있었다 하여 ‘용장골’로 불리며, 아직도 탑이 남아있어 ‘탑상골’로 불리기도 한다. 남산은 해발 500m도 안 되는 산이지만 발길 닿고 눈길 머무는 곳마다 석불이요, 석탑이요, 절터다. 이 골짜기만 해도 용장사 외에 20여 개의 절터가 있다. 불교가 왕성했을 시절엔 목탁 소리와 염불 소리가 끊일 날 없었을 것이다. 일연은 『삼국유사』에 서라벌을 ‘사사성장寺寺星張 탑탑안행 塔塔雁行’이라고 묘사했다. '절과 절은 하늘의 별처럼 펼쳐졌고, 탑들은 기러기 행렬처럼 늘어섰다‘고 했을 만큼 불교가 융성했던 시절이었다. 용장골을 오르는 동안 물소..

합천댐과 황매산 자락을 중심으로 들어앉은 집들이 아름다운 풍경을 이룬다. 굽어진 길을 따라 무작정 오르다 보면 어느새 모산재의 기암들이 장엄하게 눈길을 뺏는다. 영암사 터는 황매산(해발 1천108m) 남쪽 자락인 모산재(해발 791m) 아래 정동 쪽을 향해 있다. 모산재 주변 바위 능선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영험한 기운을 쏟아내며 절터를 호위한다. 모산재 바로 아래 마을인 합천 가회면은 화전민들이 터를 잡고 살았던 곳이다. 한때는 빨치산의 활동 거점이었을 만큼 깊은 골짜기였지만, 지금은 길이 좋아져 골짜기라는 말이 무색하다. 절터엔 아무도 없다. 새벽의 정적만 사방에 깊이 깔렸다. 공기가 무겁다. 바람에 비 냄새가 섞여 있다. 곧 비가 쏟아지겠다. 엷은 어둠 속에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얼마나 해를..

간밤에 비가 퍼부었다. 이른 새벽 비는 그쳤고, 고층에서 내다보는 도시는 안개에 휩싸여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바람이 불면 앞산이 힐끗 보였다 사라졌다. 바람과 안개가 적절히 섞여 나를 홀렸다. 속세의 번잡한 아침이 오기 전에 서둘러 도시를 빠져 나갔다. 경부고속도로 문수·옹천 IC를 빠져나와 들길을 달렸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낯선 길이지만, 여느 시골과도 같은 익숙한 풍경이기도 햇다. 써레질을 마친 논 군데군데 모판이 나와 있는 것을 보고, 모내기 철이란 걸 알았다. 풀내음이 났다. 그러고 보니 풀들이 제법 웃자랐고 숲은 한창 물이 올랐다. 멀지 않은 산들이 묵직했다. 구름인 듯 안개인 듯, 산허리쯤에 걸려 좀처럼 걷히지 않았다. 마음이 바빠졌다. 구름 속에 들기 위한 조급함이었다. 구름이 일..

물길에도 오지가 있다. 한반도의 남쪽 울진에는 물길 오지라 불리는 왕피천이 흐른다. 경북 영양군 수비면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울진군 온정면에 걸쳐진 금장산 골짜기와 만나, 이산 저산 이 골짝 저 골짝으로 숨어들어 몸을 불리며 왕피천이 된다. 세차게 흐르는 여울 아래 소용돌이치는 소沼가 여럿 있고, 소를 지난 물은 더 굳세게 아래로 휘몰아친다. 수달, 까막딱다구리, 딱새, 황어, 은어 등 이름마저도 맑고 깨끗한 생명이 목숨 붙이고 살아간다. 왕피천엔 어떠한 세상 소리도 없는, 오직 바람소리, 물소리, 새소리만 들린다. 사람 발자국 소리는 민망하기까지 하다. 낙동정맥 굽이굽이 돌고 돌아, 한껏 몸집이 커진 왕피천은 적막강산 고독과 사색을 품고 동해로 흘러간다. 늦가을이면 왕피천엔 연어가 돌아온다. 모천회귀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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