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망치질 소리가 들려온다. 바깥에서 형이 두드리는 소리다. 걱정이 된 모양이다. 일을 하다 말고 서둘러 답신을 보낸다. 탕 탕 탕.정화조 차량 탱크 용접 일은 긴장의 연속이다. 안과 밖, 형이 두드리는 망치질은 동생이 무사한지 안부를 묻는 것이고. 내가 두드리는 망치질은 망을 보다 말고 어디 가지나 않았을까, 형을 붙들어 두려는 마음에서다.형과 처음 손발을 맞춘 것은 우리 집 뒤주를 터는 일이었다. 라면을 사 먹기 위해서였다. 긴긴 겨울밤, 꽁보리밥으로 배를 채워서 그런지 몇 번 방귀를 뀌고 나면 이내 배가 고파 왔다.아무리 우리 것이라고 해도 도둑질은 도둑질이었다. 겁이 났다. 뒤주에 들어가려다 말고 형과 신호를 정했다. 누가 나타나면 두 번, 지나가고 나면 한 번 문을 두드리기로 했다.그래도 마음이 놓..
사람의 평균 수명이 크게 늘었다고는 하나, 80세를 넘기기는 지금도 역시 쉬운 일이 아니다. 짧게 제한된 이 시간 속에서 뜻 있고 보람찬 삶을 이룩하고자 사람들은 저마다 설계와 실천에 여념이 없다.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멋있게 사는 것일까? 멋있는 길이 오직 한 줄기로만 뻗어 있는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개인의 소질과 취향 그리고 형편에 따라서 각각 다른 길이 모두 뜻과 보람으로 아름다울 수도 있음직하다. 예술가의 생활은 언제 어느 모로 보아도 멋과 보람으로 가득 차 있다. 명성이 높은 예술가라면 더욱 좋을 것이며, 비록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경우라 하더라도, 심혈을 기울여 창작의 길로 정진하는 모습에는 부러움을 느끼게 하는 귀한 분위기가 따라 다닌다. 참된 예술가는 아름다움을 창조하여 우..

비가 많이 오는 날은 왼쪽 엄지발가락이 살살 아파온다. 퇴근 후에 양말을 벗다 말고 왼발을 살핀다. 엄지발가락이 둘째발가락 쪽으로 휘어져 있고, 엄지발가락의 관절이 밖으로 튀어나와 있다. 뭉툭한 모양새가 나무의 몸에 박힌 옹이 같다. 서러운 제 속내를 소리 없이 꺼내놓기라도 하는 듯 돌출된 관절이 빨갛게 부어 있다. 슬픔이라는 바닥짐을 지고 혼자서 외로이 여기까지 걸어온 무소의 뿔 같기도 하다. 살아온 내력은 이리도 선명히 좁은 틈 비집고 아픔을 내민다.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태권도장에서 대련을 했다. 나의 옆차기 공격을 방어하는 상대방의 주먹에 맞아 엄지발가락이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다. 몹시 아파 절뚝거리며 집으로 왔지만, 혼날까 봐 어머니에게 말조차 꺼내지 못했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말하지 않..

오늘은 동서들이 한자리에 모인다. 형님댁에서 김장을 하기 때문이다. 현관 입구에 들어서니 흥이 실린 목소리들이 화음처럼 울려 퍼진다. 형님은 직접 농사지은 배추를 소금에 절여 소쿠리에 물기를 빼두었다. 커다란 다라이에 젓갈, 고춧가루, 마늘, 찹쌀풀 등 양념을 섞어가며 속 준비에 분주하다. 한쪽에서는 갓, 무, 쪽파 등을 다듬는 손길이 재바르다. 형님은 간은 맞는지 더 넣을 것은 없는지 절인 배추에 양념을 쓱 묻혀 생굴을 얹고 깨를 묻혀 입에 넣어준다. 첫맛은 톡 쏘는 매운맛에 조금 짜다 싶지만 자꾸 받아먹다 보니 은근히 중독성 있는 맛이다. 각자의 입맛에 따라 짜다, 간이 맞다, 맵다 한마디씩 거든다. 미식가인 막내 동서가 이프로 부족하다는 사인을 보내자 눈치 백 단인 형님은 누른 호박과 곶감 달인 물..
그녀는 한쪽 다리가 불편하다. 오른발을 내디딜 때는 몸이 한쪽으로 기우뚱한다. 장애등급을 받은 그녀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있다. 거기다 이혼한 시동생과 아이들 뒷바라지한 지 8년이 되었다. 동네 어른들은 그녀를 효부라고 한다. 그 말이 칭찬처럼 혹은 놀림처럼 들린다. 어느 날 밤, 그녀가 마트에 조카들 간식을 사러가다 옆집 아주머니를 만났다. 옆집 아주머니는 이제 아이들한테 심부름을 보내고 그녀의 건강부터 챙기라고 했다. 몸이 불편한데도 불구하고 밤 껍질을 깎는 부업을 해서 살림과 시어머니 칠순잔치에 보탠 것을 아는 아주머니는 그녀가 애처로웠던 모양이다. 집에 돌아간 그녀는 시어머니에게 옆집 아주머니가 했던 말을 그대로 이야기했다. 불같은 성미의 시어머니가 어찌 마음을 다스렸는지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최근 학교 앞에 삼계탕 식당이 생겼다. 찹쌀이 듬뿍 들어간 삼계탕은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다. 그런데, 닭죽이라는 이름의 상품이 있어서 어떤 내용인지 물어보았다. 삼계탕에 들어가는 닭을 모두 잘게 뜯어서 풀어 만든 것이라고 한다. 혹시나 싶어서 시켰는데 기대했던 바대로였다. 맛있었다. 닭죽은 나에게 추억을 되살려 주었다. 우리 집은 대가족이었다. 할아버지, 할머니에 아버지 어머니 5남매 9명이 기본가족이었다. 복날 근처에는 몸보신을 해야 한다고 하면서 여름에 두 차례 세 차례씩 꼭 닭죽을 해먹었다. 어머니는 영해시장에 가셔서 생닭을 한 마리 사 오신다. 물을 팔팔 끓여서 닭을 물에 담그면, 닭의 털이 쉽게 떨어진다. 나신이 된 닭을 삶은 다음 살코기를 잘게 만든다. 쌀에 닭고기를 넣어서 죽을 만든다. 특별..
무거운 마음으로 고향집으로 달려갔다. 태풍 때문에 담장이 무너져 내렸다. 대문을 달고 있었던 좌우 담장 약 20미터가 사라진 상태이다. 건물이 훤히 보이는 것이 무언가 나사가 빠진 것 같은 느낌이다. 담장을 다시 쳐야 할 터인데, 장남인 형이 있으니 형과 상의해서 결정할 사항이다. 저녁을 친구들과 먹고 9시경에 샤워를 하고 어머니 방에서 자려고 하는데, “야야”하고 부르신다. 어머니는 만면에 아이 같은 순진무구한 웃음을 띠고 계셨다. 웃으시면서 말씀을 이어가신다. “담장 무너진 한 쪽에 조립식 건물 조그마하게 짓지 못하나, 애비야”. 나는 답을 했다. “예, 전에도 어머니 편하시게 모시려고 우리가 조립식 건물 짓는 것을 논의했습니다”.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고, 너가 자주 축산집에 오니, 지금 여기가..
대나무는 뿌리를 수직으로 뻗지 않고, 옆으로, 옆으로 뻗어가서 죽순들을 밀어올림으로써 자기 영역을 한없이 넓히는 식물이다. 농민은 이웃의 솜대 밭에서 자기네 밭으로 뻗어온 뿌리들을 파서 내던져 버린 다음, 다시는 그 뿌리가 뻗어 건너오지 못하게 하려고 자기네 밭과 대밭의 경계에 무릎이 잠길 만큼의 기다란 참호를 팠다. 인근에 사는 시인은 그 대나무 뿌리 여남은 개를 가져다가 자기 서재의 서편 창문 앞 울타리에 줄줄이 심었다. 밤이면, 서쪽으로 기우는 달빛으로 말미암아 서창에 드리워질 수묵화 같은 대나무 그림자를 완상할 생각으로, 또 속이 텅 비고 올곧게 살아가는 대나무 속으로 내가 들어가고 내 속으로 대나무가 들어오게 할 생각으로. 그리고 사철 내내, 바람에 사각거리는 그들의 싱싱하고 풋풋한 속삭임과 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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