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집을 세 채 가지고 있다. 평소 집을 관리하는 일이 내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산다. 사람들은 이런 나를 두고 입을 댄다. 참 욕심이 많다느니, 고생을 사서 한다느니. 하나 정도는 처분하고 홀가분하게 살라고 부추기기도 한다. 그러나 모르는 말씀이다. 나의 집들은 모두 맞물려 있어 한 채를 포기하면 나머지도 힘없이 무너지게 된다. 그러니 하나도 포기할 수 없고 소홀히 할 수도 없다. 몸과 마음과 영혼이 긴밀할 때 삶이 탄탄해지듯 나의 집들이 그렇다. 첫 번째 집은 지금 살고있는 아파트이다. 식구들은 집을 소유하는 것에 걱정이 많았다. 응당 모두 기뻐할 줄 알았는데 나의 기대가 빗나갔다. 대출이 많았던 것이 문제였다. 안정된 직장 없이 빚을 갚아간다는 게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모든 것에는..
세상 아내들은 자기가 하는 말을 남편들이 귀담아듣지 않는다고 늘 불평이다. 그러나 실은 그렇지 않다. 건성으로 들어 넘기는 것 같아도 출근할 때 던진 아내의 한 마디는 종일 남편의 뇌리에 박혀 있게 마련이다. 반짝이는 동전처럼. 여기 내가 아는 어떤 분의 실화 한 토막을 소개하고자 한다. 참깨 한 섬 값이 5만 원 하던 시절의 이야기다. 깨장수 허씨는 대문을 열고 나오다 말로 잠시 하늘을 쳐다본다. 아무래도 한 줄금 할 것 같은 하늘이다. 안에 대고 소리를 친다. "여보, 우산." 잠시 뒤 아내가 검정 박쥐우산을 들고 나왔다. "우산 잊지 마세요." 아내가 당부했다. 금년 들어 벌써 두 번이나 우산을 잃어버렸으니 아내가 걱정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허씨는 듣는 둥 마는 둥 행하니 골목을 나섰다..
외할머니 눈썹은 초생달처럼 둥그런 데다 부드럽게 송글송글 겹쳐진 편이었다. 어머니의 눈썹은 외할머니의 초생달 같은 눈썹을 산산(散散)이 짝 뿌려 놓은 듯 눈두덩이까지 부드러운 털이 더욱 송글송글한 편이었으나 인생을 호소(呼訴)한 듯한 고운 눈빛은 하나의 대조(對照)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한 모계(母系)를 닮은 것을 내가 깨닫게 된 것은 여학교를 갓 나오던 해였다. 그 무렵부터 나는 얼굴에다 화장을 하기 시작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무엇보다도 화장용 크레이언으로 눈썹을 그리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스스로 숱이 작은 눈썹에 대하여 어떤 열등감을 느꼈든가, 눈썹이 솔밭처럼 짙은 딴 여성을 부러워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발관에 가서 면도를 할 때마다 눈썹을 지우지 말아..
겨울의 시인들은 모두 감기에 걸려 있다. 그래서 그들이 시를 쓰는 것은 바로 그들의 기침 소리이기도 한 것이다. 겨울밤에는 문풍지를 울리는 바람 소리나 강에서 얼음 죄는 소리만이 들려오는 것은 아니다. 가만히 엿듣고 있으면, 어디에선가 기침 소리가 들려온다. 기침 소리는 허파의 가장 깊숙한 밑바닥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이다. 그 소리는 아직도 허파 속에 생명이 숨 쉬고 있다는 선언이며, 겨울잠에서 깨어나라는 경고의 목소리이다. 기침 소리는 무슨 음악처럼 박자나 화음이나 음계 같은 것으로 울려 오지 않지만, 혹은 언어처럼 명사와 동사 그리고 그것을 수식하는 형용사와 부사 같은 문법(文法)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어떤 미열과 고통 그리고 미세한 바이러스를 거부하는 분노 같은 힘들이 묘하게 어울려 ..
번 역 문 옛사람은 학문을 하면서 모두 자기에게 절실하게 하였으니, 자기에게 절실하게 하는 것이 바로 학문을 하는 요령입니다. 만약 자기에게 절실하게 하지 않으면, 이는 성경현전(聖經賢傳)을 한바탕의 설화(說話)로 삼는 것일 뿐입니다. 원 문 古人爲學, 蓋皆切己, 切己乃爲學之要也. 如不切己, 是將聖經賢傳爲一場話說而已也. 고인위학, 개개절기, 절기내위학지요야, 여부절기, 시장성경현전위일장화설이이야. - 윤선도(尹善道, 1587-1671), 『고산유고(孤山遺稿)』권2 「진시무팔조소(陳時務八條疏)」 해 설 이 글은 고산(孤山) 윤선도가 임진년(1652, 효종3)에 올린 상소인 「진시무팔조소」의 한 문장이다. 진시무팔조소란 ‘지금 임금이 힘써야 할 여덟 가지 일에 대해 아뢴 상소’라는 뜻으로, 이 문장은 이 중..
어항 물갈이를 했다. 열대어들이 죽고 말았다. 수면 위로 떠오른 물고기들이 나를 원망하는 것 같다. 뜰채로 건져 쓰레기통에 버리고 창밖을 기웃거린다. 딸아이가 돌아올 시간이다. 오랜 객지 생활의 외로움을 물고기 키우는 재미로 대신한다는 말에 마음이 켕긴다. 상경한 날부터 집안일에 옷매무새까지 내 잣대를 대고 눈칫밥을 먹이자 "바야흐로 엄마의 눈치시대가 도래했다."며 흘끗거렸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어 안절부절못하는 내 모양새를 남편이 본다면 "참, 당신은 눈치가 없어서 탈이야."라며 또 눈치 없이 끼어들 게 뻔했다. 나는 눈치에 둔감한 편이다. 아니, 너무 예민한지도 모르겠다. 눈치가 나보다 힘이 더 세서 굽실거릴 때도 많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세상이다 보니 눈치를 보는 횟수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낯..
오늘 밤에도 귀뚜라미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가을도 깊어 밤이면 창문을 닫고 잠들 만큼 기후도 선선해졌는데, 그 귀뚜라미가 베란다 어느 구석에서 아니면 책장 뒤에 아직도 살고 있다면 가냘픈 울음소리라도 들려줄 것 같은데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들리지 않는다. 지난여름 책을 정리하다 책장 구석에서 튀어나온 한 마리 귀뚜라미를 발견하고 놀랍고 반가워 손안에 잡아들고 싶은 기분이었다. 베란다로 뛰어나간 귀뚜라미는 이내 화분들 속으로 자취를 감추어 버렸지만 그날 이후 고향에 돌아간 사람처럼 공연히 마음이 부풀고, 올 가을에는 견고한 아파트 공간에서도 귀뚜라미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아 마음이 들뜨기까지 했었다. 그 한 마리 귀뚜라미를 생각하며 그 뒤 두 달이나 아파트에 소독을 하지 않았다. 징그러운 바..
봄을 시작으로 산야에는 참으로 많은 풀꽃들이 피어난다. 노란 꽃다지에서 시작하여 보랏빛 제비꽃, 흑장미 빛의 할미꽃, 꽃분홍이란 말보다 연산홍 꽃빛이 더 어울리는 패랭이꽃, 진달래꽃 빛의 앵초꽃, 연분홍과 흰색이 어우러진 밥풀꽃, 금낭화, 노란 산괴불주머니꽃, 짙은 보라의 붓꽃, 황금빛 원추리꽃, 하얀 방울 같은 둥굴레꽃, 분홍과 보라가 어우러진 엉겅퀴꽃 등 참으로 다양한 빛깔에 다양한 꽃들이 피어난다. 나는 그런 꽃들이 피어나는 수채화 빛 산야에서 보내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지금도 제비꽃을 보면 그 곁에 주저앉아 앙증맞은 꽃으로 반지를 해 끼고 싶어진다. 어린 시절 제비꽃이 가득한 풀밭에 앉아 제비꽃 반지를 만들었다. 꽃대공을 뽑아 올려 꽃잎 밑부분에 주머니같이 붙어 있는 부분을 조금 자르고 꽃줄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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