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동차가 멎고 문이 열렸다. 드문드문 비어 있던 빈자리가 순식간에 차고도 사람이 넘쳤다. 차가 다시 움직였다. 미처 자리를 잡지 못한 승객들은 아쉬워 두리번거렸다. 그중에서도 체구가 왜소한 노파 하나가 유독 시선을 모으고 있었다. 키가 작고 깡마른 데다가 허리까지 굽어 더 작아 보였다. 노파는 물에 빠진 사람처럼 허우적거렸다. 손잡이는 너무 높고 옆에도 잡을 것이 없었다. 맞은편 좌석에 앉은 사람들은 자리를 양보할 필요가 없었다. 노파의 턱밑에도 좌석을 차지한 젊은이가 여럿이니 그건 어디까지나 그쪽 사정이었다. 그러나 노파 쪽에 앉은 사람들은 노파를 일부러 보지 못했다. 신통하게도 그들은 모두 신문을 보고 있거나,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겨 있거나, 시선을 불필요한 곳에 두고 있었다. 노파는 더 버틸 수가 ..
![](http://i1.daumcdn.net/thumb/C148x148.fwebp.q85/?fname=https://blog.kakaocdn.net/dn/FNQnI/btqJtlth3Ou/kd9ka3TNd3nmopFWquv3sK/img.jpg)
2020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동상 담장은 안과 밖을 가로막는 벽이다. 그렇지만 담장에는 소통을 위한 틈새도 있다. 언젠가 송소고택을 다녀온 적이 있다. 경북 청송군 파천면 덕천리에 자리한 송소고택은 조선 영조 때 심처대(深處大)의 7대손 송소(松韶) 심호택(沈琥澤)이 건축한 가옥이다. 우리 조상의 후덕한 인심처럼 대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위에 홍살까지 설치해 놓은 거대한 솟을대문이 낮은 담장과 대비 되어 오히려 기이한 모양새다. 마치 입을 크게 벌려 상대를 제압하려는 하마의 입 같다는 생각에 웃음이 새 나왔다. 문 안으로 들어섰다. 문설주에 기대선 행랑채에서 허술한 옷차림의 행랑아범이 머리를 조아리며 손님이라도 맞으러 나올 듯했다. 행랑아범 대신 품이 넉넉한 시골 마당이 평화롭게 손님을 맞이했다...
![](http://i1.daumcdn.net/thumb/C148x148.fwebp.q85/?fname=https://blog.kakaocdn.net/dn/dGNTUy/btqJlqIq2a9/4Ez4hMWY0TzA6Rop1sYay1/img.jpg)
2020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은상 손은 세상과 소통하는 열쇠다. 숨길 수 없는 온도를 담아 타자와 교감하고 세상과 교류한다. 손을 잡고 놓고 오므리고 펴고 엎는다. 악수는 우호의 표시이고 박수는 환영과 응원, 찬사를 표하는 것이며 ‘손에 손잡고’는 마음과 힘을 합한다는 뜻이다. 세상 밖 어떤 힘이 간절할 적에는 두 손부터 모은다. 조용히 합장하고 비손하는 자세엔 신에게로 향한 혼신의 염원이 담겨있다. 호미곶 ‘상생의 손’은 해맞이 축전을 기리는 상징물. 모든 국민이 서로 도우며 살자는 의미를 담았다. 동해안 해돋이 명소와 ‘손’, 생각해 보니 썩 어울린다는 느낌이다. 그런데 엄청나게 큰 청동상(靑銅像)의 손이 하나가 아니다. 육지의 해맞이광장엔 왼손이, 바다엔 오른손이, 그리 멀지 않은 사이를 두고..
![](http://i1.daumcdn.net/thumb/C148x148.fwebp.q85/?fname=https://blog.kakaocdn.net/dn/bee2B1/btqJes0ifc1/E24pOunhMmx7h3cV0XbTX0/img.jpg)
2020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금상 그 빛은 경건하여 천년을 비추고, 그 향은 겸허하여 천 리를 간다. 옛 선비들은 나를 문방사우 중 으뜸으로, 한낱 물건이 아닌 고결한 정신을 가진 인격체로 여겨서 정신 수양의 매개로 삼았었다. 벼루 위에 나를 세우고 온 마음을 모아 혼탁한 정신을 갈아내면 내가 닳아지는 만큼 선비의 정신은 정갈해지고 맑아져서 마침내 높은 경지로 고양되고, 그 고양된 영혼이 나를 통해 글로, 그림으로 승화되는 것이다. 선비의 붓에 묻혀지는 순간의 나는 단순한 먹물이 아닌 정신 수양의 결정체이며 드높이 고양된 인간 영혼의 분신인 것이다. 하나의 먹으로 태어나 인간의 정신 수양의 매개로서, 고양된 영혼의 분신으로서 그것을 쓰고 그려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할 수 있으니 나는 참으로 행복하다..
![](http://i1.daumcdn.net/thumb/C148x148.fwebp.q85/?fname=https://blog.kakaocdn.net/dn/cU6ksq/btqI7wooVFE/BlZ28szC71DMUjSnvBTKBK/img.jpg)
2020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대상 짙은 햇살이 창가에 와서 빨리 일어나라고 재촉을 하는 아침이다. 팔월 초의 날씨는 여름의 권위를 내세우기라도 하려는 듯 온 힘을 다해 적의를 뿜어댄다. 햇볕은 불덩이를 녹이는 것같이 이글거린다. 잡다한 일상을 접고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경주로 향했다. 여기에도 마치 하얀 불 파도가 출렁이는 것 같다. 박물관 입구부터 햇살을 피하려는 사람들이 그늘을 찾아든다. 이런 것을 보면 자연이 천지 만물의 주인이고, 거기에 따르며 사는 사람들은 손님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신라역사관으로 들어섰다. 소장된 문화재들이 많다. 그중에서 자그마한 항아리에 시선이 꽂혔다. 붉은색과 푸른색과 하얀색의 무늬가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었다. 삼색이 어울리어 안정감을 준 무늬가 곱다. 경..
![](http://i1.daumcdn.net/thumb/C148x148.fwebp.q85/?fname=https://blog.kakaocdn.net/dn/dBfZWk/btqI4d9SlSQ/QtkYcsG6HnDKl2TGIKfXJK/img.jpg)
2016년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객주 문학관에 들어섰다. 농기구가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다. 다들 투박하면서도 고집스러운 그 시대의 사내를 닮았다. 지게 앞에 작대기 하나가 길게 누웠는데, 밑 부분에 뾰족하게 박힌 쇠가 보인다. 지게와 작대기를 보니 평생 짐을 진 아버지의 삶에 가 닿는다. 한국전쟁 때 아버지는 군번도 없이 전장에 배치되었다. 낯선 골짜기에서 전우들이 하나둘 쓰려져도 아버지는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오셨다. 전쟁이 휩쓸고 간 뒤라서 남은 것이라고는 기근과 상처뿐이었다. 많은 식솔이 먹고살려면 산골짜기 비탈이라도 개간해야 했다. 물길을 따라 일구다 보니 천 평이 될까 말까 한 논이 자그마치 쉰하고도 다섯 다랑이나 되었다. 말이 좋아 논이지 기름진 밭보다 못했다. 계곡 가장자리를 따라 만..
![](http://i1.daumcdn.net/thumb/C148x148.fwebp.q85/?fname=https://blog.kakaocdn.net/dn/m7KML/btqI4dvfEPx/BBfCCWFpgzqTpLfzDd9lc1/img.jpg)
2016년 제주 영주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어머니는 큰오빠 곁으로 가기로 했다. 육십여 년을 살던 집을 비우자니 그만큼 더께가 앉은 살림살이가 자꾸 나온다. 부엌을 정리하니 막걸리 사발과 놋그릇을 비롯하여 뭉그러진 나무주걱, 아끼시던 꽃무늬 접시도 나온다. 낡은 장롱을 여니 맏며느리가 해온 상이불이 가지런히 개켜져 있다. 한 쪽에는 사십 대에 꽃구경 갈 떄 입었던 개나리색 한복이 걸려있다. 팔십이 넘고는 먼 길 떠날 때 가벼워야 한다고 조금씩 정리를 한다는 말을 여러 번 들었는데 아직 자리를 지키고 있음은 그 물건에 담은 마음을 비우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이사는 묵은 시간과의 만남이다. 마당으로 끌려나온 물건은 버릴 것이 많았다. 구석 구석에서 나온 사소한 물건들을 붙잡고 눈을 맞추니 갖가지 이야기가 떠..
![](http://i1.daumcdn.net/thumb/C148x148.fwebp.q85/?fname=https://blog.kakaocdn.net/dn/1xLUk/btqI4SSevvM/QqK0HKsq4h1iIeWJhSgqY1/img.jpg)
2016년 대구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두툼한 먹구름이 빠르게 이동한다. 하늘의 허파가 용트림을 하며 짧고 강한 바람을 쏟아낸다. 번갈아 쉬는 들숨과 날숨 사이로 당장이라도 엄청난 비를 퍼부어 댈 것 같다. 비의 숨 냄새가 가슴을 설레게 한다. 비가 오면 내 안 깊숙한 곳에서 정체불명의 힘이 솟아난다. 드물게 몸과 마음이 활력으로 탱탱해진다. 오늘은 비의 예감만으로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다. 달릴 채비를 한다. 막힘없이 달려 보기에는 고속도로보다 더 좋은 곳이 없다. 가까운 인터체인지로 차를 올린다. 목적지는 없다. 비를 맞으며 실컷 달리다 그만 달리고 싶을 때 돌아오면 된다. ‘비 탄다’는 말이 있다. 맑은 날과 비교해 비 오는 날의 심리상태가 유난히 다른 사람을 일컬을 때 쓰는 말이다. 스탕달..
- Total
- Today
-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