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눈부시게 환한 햇살이 초록 숲 위로 투망처럼 드리워져 있다. 베란다 창 앞으로 바투 다가와 있는 산은 이제 마악 여름옷으로 갈아입고 있다. 창을 열어두고 다가오는 여름을 바라본다. 팡, 팡. 열어 둔 창으로 테니스공이 라켓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온다. 공 부딪히는 소리 사이사이 테니스를 치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섞여든다. 힘껏 내리친 공이 빗나갔는지 안타까운 탄식이 터지기도 하고 아슬아슬하게 공을 받아쳤을 때의 환호성이 높다랗게 들려오기도 한다. 베란다로 나가 테니스장을 내려다본다. 높푸른 히말라야시다의 호위를 받고 있는 테니스장은 치외법권 지역인양 아늑하다. 알맞게 다져진 맨 흙바닥이 정갈하고 높다란 심판석 의자의 진초록 덮개가 새뜻하다. 연두색 공들이 네트 위를 빠르..
꽃신이라고 말하면 전승문화 기능보유자 갖바치가 만드는 비단 가죽신을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꽃신은 글자 그대로 꽃을 심는 신일 따름이다. 어머니는 여든을 사셨지만 아무도 임종을 못 했다. 혼자 가셨다는 점이 여지껏 마음에 걸린다. 사십구일재를 마치고 형제들은 어머니 손길이 남아 있는 물건을 하나씩 골라가지고 헤어졌다. 물러서 있다가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 어머니의 옥색 고무신 한 켤레를 나는 집어 들었다. 산 지 얼마 안 되는 새 신이었다. 어머니가 보고 싶으면 신을 바라보았다. 처음엔 말끔히 닦아 놓기도 했으나 점점 눈길이 멀어져갔다. 하여간 십여 년을 그냥 가지런히 놓아두었다. 3주기, 5주기, 10주기가 지나고서는 기일조차 제날을 기억하지 못한 해가 있었다. 자식의 ..
남의 글처럼 내 글이 쉬웠으면, 하는 생각을 가끔 한다. 자기가 쓴 것은 동사 같은 뚜렷한 말에서도 그 잘못된 것을 얼른 집어내지 못하면서 남의 글에서는 부사 하나 덜된 것이라도 이내 눈에 걸리어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남의 눈에 든 티는 보면서 어찌 하야 네 눈에 든 대들보는 보지 못하느냐?” 한 예수의 말씀은 문장도文章道에 있어서도 좋은 교훈이다. 자식처럼, 글도 제게서 난 것은 애정에 눈이 어리기 때문인가? ‘여기가 잘못되었소.’ 하면 그 말을 고맙게 들으려고는 하면서도 먼저는 불쾌한 것이 사실이요 고맙게 여기는 것은 나중에 교양의 힘으로 되는 예의였다. 내 글이되 남의 글처럼 뚝 떨어져 보는 속, 그 속이 진작부터 필요한 줄은 알면서도 그게 그렇게 쉽게 내 속에 들어서 주지 않는다. 문장 공부도..
마음이 어지러운 날이면 낚시를 간다. 물고기의 생과 사를 내 손아귀에 거머쥘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기 위해서다.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나의 존재를 확인시켜 줌으로써 위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인지 모르겠다. 그들과 벌이는 숨 막히는 흥정에서 긴장된 순간을 즐긴다. 다른 생명을 주검으로 몰아가는 수심(獸心)이 내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음에 스스로 놀라곤 하지만 잡아야만 뱃속이 편한 것을 어쩌랴. 그 놈을 낚아챌 때 손으로 전해지는 짜릿하고 황홀한 손맛은, 남정네의 발기한 거시기를 손에 잡고 자신감에 찬 기쁨이라고 표현한 친구의 말이 생각난다. 세상에 이보다 더 큰 즐거움이 있을까. 물고기 입질 횟수가 잦을수록 긴장감이 나의 심장을 멎게 하여 몰아의 경지에 이르도록 한다. 낚싯대를 걸어두고 숨어..
작년 늦가을 이래로 새로운 기도터가 생겼었다. 층암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가느다란 폭포 밑에 작은 담(潭)을 형성한 곳에 평탄한 반석 하나가 담 속에 솟아나서 한 사람이 꿇어앉아서 기도하기에는 천성(天成)의 성전이다. 이 반석에서 혹은 가늘게 혹은 크게 기구(祈求)하며 또한 찬송하고 보면 전후좌우로 엉금엉금 기어오는 것은 담(潭) 속에서 암색(岩色)에 적응하여 보호색을 이룬 개구리들이다. 산중에 대변사나 생겼다는 표정으로 신래(新來)의 객(客)에 접근하는 친구 와(蛙) 군(君)들, 때로는 5, 6마리, 때로는 7, 8마리. 늦은 가을도 지나서 담상(潭上)에 엷은 얼음이 붙기 시작함에 따라서 와 군들의 기동이 일부일(日復日) 완만하여지다가, 나중에 두꺼운 얼음이 투명을 가리운 후로는 기도와 찬송의 음파가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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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긴 내가 참 오래 살았지. 아흔을 넘긴 지가 벌써 얼마인가. 그래도 안 죽는 걸 어째. 에미하고 애비는 내 명이 모질다고 하겠지만 숨이 안 떨어지는 걸 인력으로 어쩔 수가 있나. 그래서 이렇게 아침 바람에 바깥 출입이라도 나서는 기 서로간에 수월치. 상늙은이하고 중늙은이가 종일 방바닥만 쳐다보고 앉았으면 뭐해. 남들이사 욕을 하겠지. 그래도 내사 토굴 같은 방구석에 죽은드끼 누워 있는 기 싫어. 숨을 쉬는 단에는 사람 새 섞여 있어야지. 늙었다고 왜 귀를 막고 눈을 감고 사노. 거기다가 하루 한 때씩 바깥에서 줄이는 기 어데고. 관에서 돈을 대 밥이 나온다 카던데 별별 끼 다 나오더라고. 집에 있어 봐야 아적에 먹던 된장이나 대충 더파 가지고 한 술 뜨는 둥 마는 둥 할 낀데. 하여튼 거기서는 가만 앉..
선산에 아버님을 묻은 지 반년이 지났다. 살아 계실 적 못한 효도가 내내 맘에 걸리는 지 남편은 자주 산소를 찾아 손을 본다. 그저께도 산소에 다녀온 남편이 잔디도 파릇파릇 살아나고 주변에 진달래, 조팝꽃이 한창이라고 말했었다. 어제 종일 비가 오더니 오늘은 씻은 듯 공기가 맑다. 베란다 창문을 열고 맨몸의 햇살을 집안으로 들였다. 화분들이 좋아 한다. 몇 년 동안 꽃을 피우지 않던 군자란이 그동안의 내 손길이 미안했던지 무더기로 꽃을 피웠다. 겨울에도 꽃을 놓지 않던 제라늄은 꽃숭어리를 주렁주렁 달고 있고, 사랑초도 꽃대를 쑥쑥 밀어 올리는 중이다. 다른 화분들도 새롭게 저를 키우느라 분주하다. 작년에 너무 작아서 긁기가 힘든 더덕들을 껍질들과 함께 화분 속에 버렸었다. 그 위에 흙을 덮어 올 봄에 상..
성자는 책 읽기 좋아하여 어릴 적부터 책을 읽으니 열다섯에 남화경 읽고 스무살에 대편에 이르렀네 지푸라기 배 동동 띄우고 닷 섬들이 박 둥둥 띄우니 책 마주하여 재삼 감탄하며 고개 들고 숙이는 사이 천하를 다녔어라 백천 자를 연이어 부름에 물 흐르듯 막힘없이 쏟아내니 마치 저 침을 뿜는 사람이 구슬과 안개를 어지러이 쏟아내는 것 같고 마치 저 최고의 대장장이가 쇠를 한 용광로에서 주조하는 것과 같았도다 成子好讀書 성자호독서 讀書自妙年 독서자묘년 十五南華經 십오남화경 二十至大篇 이십지대편 浮浮芥爲舟 부부개위주 汎汎五石瓠 범범오석호 臨書再三歎 림서재삼탄 俛仰撫八區 면앙무팔구 連呼百千字 련호백천자 汩汩如流注 골골여류주 如彼噴唾者 여피분타자 雜下珠與霧 잡하주여무 如彼大冶者 여피대야자 金鐵一爐鑄 금철일로주 -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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