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고희를 맞은 친구에게 지팡이를 선물한 적이 있다. 몸도 마음도 부실한 나이. 믿음직한 시종 한 명을 붙여준 기분이었다. 옛날 동양에서는 아무나 지팡이를 짚을 수 없었다. 마을에서 나이가 제일 많은 사람, 조정에서 벼슬이 으뜸인 사람, 모든 이들이 우러르는 사람을 삼달존三達尊이라 했는데, 그 세 가지 조건 가운데 어느 하나를 충족시켜야 가능했다. 서양에서는 중세 이후 기사騎士가 신사紳士가 되면서 칼을 쥐던 손이 대신 스틱을 잡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젊은이들이 지팡이를 짚는 풍습이 생겼던 것이다. 개화기에 서구문물이 밀려들어올 때 이런 유행도 따라 들어왔다. 한때 지팡이를 개화장開化杖이라 부른 것은 그 때문이다. 삼달존에 관계없이 단장을 휘두르는 시대가 된 것이다. 수필가 김동석은 나이 서른에 ..
내가 태어날 때 어머님은 혼자 계셨답니다. 전하여 들은 이야기입니다마는 아버님께서는 맹산 고을에 일이 있어 출타 중이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기 받는 산파 아주머니라도 한 분이라도 와 있었겠지 아무러면 면장댁에 산기가 있는데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을 리가 있겠습니까? 어쩌면 동네 아낙네들이 여러 사람 와서 그 ‘역사의 순간’을 지켜보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나는 혼자 태어났다고 주장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나는 어머님 뱃속에서도 혼자였고, 나올 때도 혼자였음이 명백합니다. 물론 쌍둥이로 태어나는 이들이 간혹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출발부터 외롭지는 않겠다 부럽게 여길 수도 있겠지만 순서는 있는 것이고 나올 때는 역시 하나씩이랍니다. 구약 창세기에서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를 보면 쌍둥..
성철 스님이 지내시던 해인사 백련암 손님방에서 하룻밤 잔 적이 있다. 스님이 입적하시기 10여 년 전 일이다. 당시 잡지사 기자로 일하던 나는 스님께 인터뷰를 요청했으나 허락하시지 않았다. 그 대신 서면 질문을 하면 서면으로 답변해주시겠다고 하셨다. 그래서 그날 밤 나는 무슨 질문을 할까 곰곰 생각하면서 가야산 백련암에서 하룻밤 묵게 되었다. 하안거 해제 전날인 백련암의 여름밤은 깊고 고요했다. 밤하늘엔 보름달이 두둥실 떠올라 있었고 어둠 속에서 들리는 풀벌레 울음도 깊고 청명했다. 큰스님이 가까이 계시는 데서 밤을 맞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내 가슴은 보름달처럼 차올랐다. 물론 잠은 오지 않았다. 어느새 시간이 지나 해인사의 새벽 종소리가 은은히 들려왔다. 벌떡 일어나 스님 주무시는 방을 바라보았다. 스님 ..
이 밤 이제 조금만 있으면 닭이 울어서 귀신이 제 집으로 가고 육보름날이 오겠습니다. 이 좋은 밤에 시꺼먼 잠을 자면 하이얗게 눈썹이 센다는 말은 얼마나 무서운 말입니까. 육보름이면 옛사람의 인정 같은 고사리의 반가운 맛이 나를 울려도 좋듯이, 허연 영감 귀신의 호통 같은 이 무서운 말이 이 밤에 내 잠을 쫓아버려도 나는 좋습니다. 고요하니 즐거운 이 밤 초롱초롱 맑게 괸 수선화 한 폭을 들여다봅니다. 들여다보노라니 그윽한 향기와 새파란 꿈이 안개 같이 오르고 또 노란 슬픔이 냇내 같이 오릅니다. 나는 이제 이 긴긴 밤을 당신께 이 노란 슬픔의 이야기나 해서 보내도 좋겠습니까. 남쪽 바닷가 어떤 낡은 항구의 처녀 하나를 나는 좋아하였습니다. 머리가 까맣고 눈이 크고 코가 높고 목이 패고 키가 호리낭창 하..
2020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장려상 제2라는 말이 슬쩍 거슬렸다. 그래도 내친김이라 차는 한티재를 거쳐 어느새 팔공산 터널을 통과하고 있다. 말로만 듣던 군위 석굴암은 대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석굴암이라고 하면 신라 경덕왕 때 만들어진 경주 석굴암이 먼저 떠오른다. 하지만 그보다 1세기 전에 만들어진 석굴암이 군위군 부계면 남산리에 있다. 군위 삼존석굴은 국보 제109호로 지정된 통일 신라 초기의 석굴암이다. 경주 석굴암이 먼저 발견되어 유명해지는 바람에 제2석굴암이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 형이 동생이 돼버린 셈이니 군위 석굴암으로서는 억울할 법도 하겠다. 사물의 이름은 대상의 정체성을 나타낸다. 삼존석굴에 알맞은 새로운 이름이 붙여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삼존석굴은 팔공산 비..
달은 그저 달일 뿐이지만 보는 것은 똑같은 달이어도, 마음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법 所見同一月 人情自殊視 소견동일월 인정자수시 - 이수광(李睟光, 1563~1628), 『지봉선생집(芝峯先生集)』16권 「견월사(見月詞)」 해 설 달은 예로부터 무한한 영감을 불러일으킨 상상력의 원천이었다. 인류가 달에 착륙한 지 반세기가 지난 지금, 달이 지구의 둘레를 도는 천체라는 사실은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상식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에 얽힌 여러 가지 이야기들은 여전히 우리를 신비의 세계로 이끌고 간다. 계수나무 아래에서 떡방아를 찧는다는 달 토끼는 전래동화에 단골손님으로 자주 등장한다. 불사약을 훔쳐 먹고 달나라로 도망가서 두꺼비가 되었다는 항아(恒娥)의 이야기는 『회남자(淮南子)』에 전해 온다. 달에..
2020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장려상 청량대운도는 봉화의 청량산을 옮겨놓은 진경산수화다. 무려 넓이가 46m, 폭이 6.7m나 되는 세계 최대의 그림이다. 야송미술관에 걸린 이 풍경화는 이쪽에서 저쪽까지 살펴보려면 적어도 100보의 걸음을 떼야 겨우 진경을 눈에 담을 수 있는 대작이다. 이원좌 화백이 2m의 장대 끝에 붓을 매어 혼신으로 점을 찍고 선을 그어 완성했다는 청량대운도, 그 속에 나는 지금 한 점이 되어 서 있다. 그림은 청량교를 막 지나는 모자의 모습으로부터 시작한다. 젊은 어머니와 어린 자식 하나가 손을 꼭 잡고 다리를 건너고 있다. 모자가 무슨 깊은 사연을 안고 깊은 산길을 가려 하는가, 얼핏 산마루턱에는 청량사 절 지붕이 보이는 것도 같다. 두 모자가 거길 가려는가. 나는 어른들의 ..
제6회 천강문학상 수필부문 우수상 새벽이면 세상의 아버지들은 바다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간다. 짭조름한 바람에 아침 햇살이 반짝이면 부두에 매여 있던 배들도 뚜우뚜우 뱃고동 소리를 내며 출항을 서두른다. 세상물살에 등 떠밀리듯 떠내려가던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던 기억이 갯벌처럼 질척인다. 언 손을 비비며 고향 하늘을 바라보시던 아버지의 향수를 헤아려 주듯 바다 갈매기가 끼룩끼룩 가슴을 후린다. 장지문으로 새어나오던 아버지의 한숨이 자식들의 귓전을 맴돌다 스러졌다. 마당에서 두엄더미를 해작거리던 수탉 한 마리를 본 기억이 있다. 갑자기 몰려온 검은 구름이 비를 퍼붓자 날개 젖은 수탉은 횃대에 오르지 못하고 담 밑에 웅크리고 있었다. 그 수탉은 마치 싸움에서 패배한 패잔병 같았다. 축 처져서 푸드득거리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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