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뜬다. 어제처럼 오늘도 해가 뜬다. 어둠이 사방에서 위세를 부리는 시간에도 해는 산을 넘는다. 새벽안개가 피어오르는 개울을 가뿐하게 건너고 담쟁이가 걸린 돌담을 훌쩍 넘는다. 집 가까이 다다르면 진중하게 마루를 건너 방 문턱으로 다가선다. 마침내 우리 곁으로 바짝 다가선다. 그렇게 하루 진객이 나타나면 태영의 도시에 사는 주민들은 '오늘도 오시는구나'라고 경탄하면서 두 손을 내민다. 나팔꽃이 나팔을 부는 새벽이 그 무렵이다. 그래서 태양은 걷지 않고 달린다. 컴컴한 밤의 제국을 단숨에 무너뜨리듯 동쪽 하늘부터 점령해나간다. 붉은 깃발을 휘날리고 금빛 북을 치는 돌격대를 앞세우고 한 달음질로 밀려온다. 그 앞에서는 삐죽 솟은 포플러나무 그늘도 순식간에 항복하고 닭 무리며 누렁이 무리들도 제 집 앞에 ..
우린 강이 보이는 호젓한 산길에서 우연히 만났다. 이유는 각기 달랐지만 그녀는 강을 향해 내려오고 있었고 나는 그 비탈길을 오르고 있었다. 때마침 가까운 곳에 작은 찻집이 있어 멋쩍은 마음을 용케 개킬 수 있었다. 여러 날을 망설이며 미적거렸지만 불가항력이었다. 불같이 이는 사랑에 혼신을 다했다. 하지만 모든 걸 거슬러야만 했던 시간들, 늘 숨이 막혔다. 무시로 솟구치는 그리움은 피 맛을 본 야수처럼 감당할 수 없었다. 자꾸 맨발로 뛰쳐나가는 욕망의 가닥들을 하나하나 쑤셔 넣은 채 있는 힘껏 꿰매며 지냈다. 그래 봤자 거개가 헛수고란 것을 알면서 말이다. 자칫 방심하는 순간, 봉합해 놓은 곳이 터지는 낭패를 번번이 겪으면서도 마른 침을 삼키며 다시 부풀어 터지길 기다렸다. 안 된다, 이젠 정말 안 된다고..
기해년 겨울 타국의 역병이 이 땅에 창궐하였는 바, 가솔들의 삶은 참담하기 이루 말할 수 없어 그 이전과 이후를 언감생심 기억할 수 없고 감히 두려워 기약할 수도 없사온데 그것은 응당 소인만의 일은 아닐 것이옵니다 백성들은 각기 분(分)하여 입마개로 숨을 틀어 막았고 병마가 점령한 저잣거리는 숨을 급히 죽였으며 도성 내 의원과 관원들은 숨을 바삐 쉬었지만 지병이 있는 자, 노약한 자는 숨을 거두었사옵니다 병마의 사신은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를 가려 찾지 않았사오며 절명한 지아비와 지어미 앞에 가난한 자의 울음과 부유한 자의 울음은 공히 처연 했사옵고, 그 해 새벽 도성에 내린 눈은 정승댁의 기왓장에도 여염의 초가지붕에도 함께 내려 스산하였습니다 하오나 폐하 인간의 본성은 본디 나약하나 이 땅의 백성들은 ..
얼마 전에 장안평에서 오래된 돌절구를 하나 사 왔다. 몇 달 전부터 눈여겨 두었던 것이라 싣고 오는 동안 트럭의 조수석에 앉아서도 뒷문으로 자꾸만 눈이 갔다. 예쁜 색시 가마 태워 오는 신랑의 마음이 이러지 싶었다.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흠흠!' 하고 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마음에 살며시 와서 안기는 것이 그렇게 살가울 수가 없다. 잘빠진 안성유기 술잔처럼 오붓하고 반만 핀 튤립같이 우아하다. 얼핏 보면 범상한 것 같아도 실은 그렇지 않다. 앞쪽 운두는 살짝 낮추고 뒤쪽은 그만큼 높였다. 앞을 낮춘 것은 앞턱에 절구공이 부딪치는 것을 막을 요량인 것 같고, 뒤를 높인 것은 확 속에 든 곡식이나 가루가 밀려서 넘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한 배려에서 나온 듯싶다. 그 때문에 약간 기우뚱하..
땡그랑 댕 댕 맑은 소리가 절간의 고요를 깨운다. 동그란 소리가 물수제비처럼 사방으로 퍼져나가는데, 저 파장에 공명하지 못하는 까닭은 내면의 지평이 시끄러운 탓이다. 닭 울음소리가 아침을 깨워 지게를 지고 나서는 보행의 나날, 게으르지 말라고 밭이 있고 목마르지 말라고 샘이 있어 삶이 척박하지는 않다. 알몸 가릴 무명 몇 필 얻을 수 있기에 춥지도 않다. 외롭지 말라고 이웃이 있어 내 하늘에게 버림받지 않았음도 안다. 하지만, 가끔 하늘을 보면 알 수 없는 허기를 느낄 때가 있다. 사람 사는 세상은 요란하다. 마찰음, 파열음, 충돌음, 문명의 소음은 하루도 쉬지 않고 일상을 흔들어댄다. 빠앙 참을성 없는 소리에 귀가 멍하고 끼이익 놀래는 소리에 오금이 저린다. 쿵쾅쿵쾅 묵직한 소리에 심장이 두근거리고 부..
슬픈 발광이다. 열흘 뒤면 풀숲 어딘가에 아무렇게나 쓰러져 생의 마지막을 맞으리라. 우주 안에서 미천하기로는 저나 나나 매양 한가진데 별걱정 다 본다는 듯 반짝이는 엉덩이를 눈앞에 들이민다. 저수지 둑을 한참이나 서성이다 겨우 찾아낸 녀석이건만 저를 쳐다보던 내 눈빛만 괜히 머쓱해진다. 생의 절정기를 맞은 반딧불이가 여름밤을 간질이고 있다. 어린 시절, 사내 녀석들은 반딧불이의 꽁지를 떼어내 이마에 문지르곤 했다. 번득이는 얼굴로 달려드는 여름밤의 시답잖은 귀신들은 하나도 무섭지 않았지만, 사내아이들이 우-하고 달려오면 계집애들은 와-하고 도망가 주었다. 나는 놀이에 엮인 무언의 약속 때문이 아니라 얼굴에 짓이겨진 반딧불이가 가엽기도 하고 섬뜩하기도 해서 치를 떨며 도망 다녔다. 오랜만에 만난 예민한 옛..
모든 것은 미운 눈으로 보면 밉게 보이고 고운 눈으로 보면 한없이 곱게 보이기 마련인가. 직업 탓인지는 몰라도 돼지에 관한 한 내 눈에는 예쁜 짓만 보인다. 돼지라면 뭐든지 좋다 보니 멱딴다는 울음소리도 우렁차게 들리고 그 냄새 또한 거슬리는 일이 없다. 친정엄마처럼 분만을 돕고 청소를 해주다가 나도 모르게 쓴웃음 지을 때가 있다. 사람들을 바라볼 때도 돼지를 보듯 좋은 점만 보고 있는지, 이런 마음으로 사람을 사랑하고 있기나 한지 때로 내 자신이 의문스러워진다. 돼지의 여러 예쁜 점 중에서도 우선 무욕無慾의 경지가 돋보인다. 제 배가 차면 그뿐 남의 것을 넘보지 않는다. 온갖 불행의 시초는 더 가지려는 데서 비롯되지 아니하던가. 다음으로 그 정직성이 돋보인다. 먹은 만큼 자라고 사랑 받은 만큼 돌려준다..
“어깨의 압통이 심한 환자였다. 나름대로 열심히 '구멍'을 찾았다. 손톱으로 눌러가며 침 끝을 목표지에 제대로 갖다 대고 쏘았다. 곧 통증은 줄었다고 하는데,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래서 과감하게 뺐다. 다시 더듬더듬 그곳에서 1mm 떨어진 지점에 침을 쏘고 증상을 물어보니 통증이 조금 더 줄었다고 한다. 이 조그만 차이가 환자의 증상에 큰 변화를 나타냈다. 하지만 그때는 그걸로 만족해 버렸다. 다시 정확한 혈 자리를 찾아 한 번 더 시침했더라면 그 분의 증상이 훨씬 개선되었을 텐데 조금 후회가 된다. 진료소에서 침을 놓을 때도 이런 경우가 허다하다. 그만큼 취혈의 중요성을 실감하는 예다. 대가리를 땅에 꼬라박고 정성을 들이면 환자의 만족도가 다르다. 이제는 그 1mm의 차이를 위해 열심히 대가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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