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장려상 기둥과 기둥 사이 잠시 멈춰 서서 여유를 바라본다. 여유는 기둥이 만든 액자 속에 살아 있는 풍경이다. 무더위에는 초록 바람을 들이고 눈이라도 내리는 날이면 그 정취가 무엇에도 비길 수 없이 고혹적이다. 기둥은 공간을 등분하여 균형을 잡아주고 공간을 터 풍경과 풍경을 이어주는 시각적인 효과를 나타냄으로써 시원한 멋을 낸다.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선 아름드리 기둥은 그 사이를 걸어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한다. 담양의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경복궁 근정전 회랑, 남이섬 은행나무 길을 걸으면서 그들과 한 호흡일 때 평온해진다. 나를 일원으로 받아들이고 걸음에 호응하리라는 믿음 때문이다. 지붕을 떠받치며 바닥과 천장을 이어주는 것이 기둥이다. 둥글거나 각지거나 곧추서거나 ..
난 글을 쓸 때 쉼표를 거의 안 쓴다. 지루해지지 않는 문장을 낳으려고 노력하다보니 만들어진 습관이다. 그러다 보니 간혹 인정미가 없어 보인다. 기계처럼 글을 조작하는 느낌이 없지 않아 있다. 밀고 당기는 탄력성이 있는 글이 되기를 원하는데 고집스럽게도 내 글쓰기는 일방적이다. 알면서도 안 되는 논리에 붙잡혀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이런 내가 싫어서 탈피해보고자 시도를 하는 날은 한 줄도 완성하지 못한다. 그만큼 무서운 게 습관이란 것을 손과 눈으로 확인한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내 글쓰기가 퍽퍽했던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과도할 정도로 쉼표를 사용했다. 능숙하지 못했던 것도 있지만 적당한 자리가 어딘지 몰라서 헤매다 결국은 남발했다. 무조건 쉬고 보자는 의미에서이다. 쓰는 내가 힘이 드니 독자들도 당연히 ..
등목하러 엎드린 아버지 옆구리에 지네 한 마리 꿈틀거린다. 발이 수십 개인 이 다족류多足類는 왼쪽 옆구리에서 길게 복부 쪽으로 늠실늠실 기어가고 있었다. 갈비뼈 사이로 숨었다 나타나는 불그스레한 자국은 언뜻 보기엔 문신 같아 보였다. 이젠 저도 늙었는지 색깔이 흐릿하다. 지네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 때문인지 나는 그 상처를 오래 쳐다보지 못했다. 젊은시절 읍내 체육대회에 나가 씨름으로 황소를 타 왔다던 근력은 이제 찾아볼 수가 없다. 집 앞에는 큰 못이 있다. 동네 초입의 못은 마을의 젖줄 같은 것이었다. 가뭄이 들 때는 그 못의 물을 끌어대어 농수로 사용했다. 못둑의 갈대 덤불에서는 지네가 자주 출몰했다. 몸통은 대나무처럼 마디로 되어 있고 마디마디 다리가 한 쌍씩 있었다. 껍질은 갈색이거나 검은 색으로..
너무 깊은 슬픔은 눈물이 되지 못한다. 말을 입어 시가 되지도, 소리를 입어 노래가 되지도 못한다. 몸 속 어디, 뼛속이거나 자궁이거나 췌장 담낭 깊은 속에 날 선 유리로, 깨진 사금파리로 박혀 영혼의 압통점을 무자비하게 가격한다. 사람의 내면에 슬픔의 안개가 가득하면 눈빛으로 온 몸으로 슬픔의 아우라가 뿜어져 나온다. 슬픔에도 반감기가 있어 봄 햇살에 천천히 바래지거나, 가을 빗소리에 녹아나오거나, 깊은 밤 뒤척이는 베갯머리에 어둠침침한 꿈으로 묻어나기도 하지만, 끝끝내 증발하지 못한 슬픔의 흰 뼈들은 육신과 함께 순장되어 흙속에 파묻힌다. 살아있는 것들의 모든 소리를 한꺼번에 삼켜버리는 흙, 세상에 흙처럼 무정한 것은 없다. 흙에 덮이면 모든 것이 무효다. 순간의 기억도, 투쟁의 역사도 속절없이 무화..
2020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장려상 꿈자리가 뒤숭숭해도 이 자리에 오지 않는다. 도시락밥도 4주걱은 담지 말란다. 아침 일찍 여자의 방문은 금한다. 출근길 아녀자가 가로질러 가면 그날은 일찍 퇴근을 서두른다. 또 남편의 신발은 항상 방 안쪽으로 향하게 놓는다. 어떤 힘든 일이 있어도 아내의 아침 잔소리는 절대적 부정을 낳으니 가능하면 웃는 얼굴로 배웅을 하여야 한다. 탄광촌 광부들의 생활 금기 사항들이다. 언제 지하에 묻힐지 모르는 앞날의 운명을 어떤 보이지 않는 힘에 의지해보려는 뜻이기도 하다. 이 항목들이 있기에 그들에겐 위로가 되었는지 모른다. 다행히 장애물을 겪지 않으면 분명 안전한 하루가 될 것이란 기대를 가질 수 있으니까. 또 힘의 원천이 되었을 것 같다. 서로서로 조심하는 자세는 물론이..
사람이란 대체로 묘한 존재다.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우선 묘하고,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무엇때문에 사는지도 모르면서 살아가는 것이 묘하고, 그러면서도 무엇을 생각하려고 하는 것이 묘하고, 백인백색(百人百色)으로 얼굴이나 성미가 각각 다른 것이 또한 묘하다. 모르면 약이요 아는 게 병인 데도 아는 체하는 것이 묘하고,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건만 다 뛰려고 하는 것이 묘하다. 제 앞에 죽어 가는 놈이 한없이 많은 것을 뻔히 보면서도 저만은 영생불사(永生不死)할 줄 아는 멍텅구리가 곧 사람이요, 남 곯리는 게 제 곯는 것이요, 남 잡이가 저 잡인 줄을 말끔히 들여다보면서도 남 잡고 남 곯려서 저만 살찌겠다는 욕심쟁이가 사람이다. 산속에 있는 열 놈의 도둑은 곧잘 잡아도, 제 마음속에 있는 한..
첫눈에, 그녀였다. 처녀 때 그대로의 가냘픈 몸피, 짧게 커트한 곱슬머리, 일자 눈썹 밑에 맑게 반짝이는 눈. 40년 세월은 간데온데없었다. 또박또박 걷던 걸음을 드티며 그녀가 누군가를 두리번거리며 찾았다. 눈을 빛내며 조바심하듯 찾는 사람이 나라는 사실이 순간, 직감으로 다가섰다. 뒤를 따라 오감이 진동자처럼 떨렸다. 식대를 지불하느라 일행 뒤에 처져 식당 안에 남아있던 나는, 숨이 멎었다. 그냥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손끝 하나 까딱 못하고 서서 앞 유리창을 통해 망연히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오래오래 바라고 기다리며 꿈꾸던 유연한 해후의 순간이 바로 지금임을 나는 금세 알아차렸다. 와락 달려나가고 싶은 건 마음뿐 몸은 바위덩이라도 된 듯 움직여 주질 않았다. 목이 탔다. 피하듯 얼굴 마주치는 일 ..
작년 이맘때 봄바람이 사그라질 즈음, 할아버지가 쓰러지셨습니다. 의사는 노환으로 인한 신경 쇠약이라고 했습니다. 봄이 가고 여름이 오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인 듯 말했습니다. 할아버지는 발을 헛디뎌 쓰러질 때 엉덩이뼈를 다치셨습니다. 뇌를 다친 것도 아닌데 기력과 기억을 점점 잃어 가셨습니다. 다른 신체 기능도 도미노처럼 삐걱삐걱 쓰러져 갔습니다. 나는 그것이 여든아홉 생을 보내는 자연의 순리인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움직이지 못하시더니, 두 명 밖에 안 되는 자식 이름을 잊고, 먹는 것마저 줄었습니다. 결국 할아버지는 요양원으로 가셨고, 가족들은 마음의 준비를 했습니다. 그날도 나는 요양원으로 갔습니다. 요양원은 지나치게 깔끔해서 갈 때마다 낯설었습니다. 할아버지는 6인실 병실에 계셨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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