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 서품식을 지켜본 적이 있다. 맨바닥에 몸을 대고 납작하게 엎드린 사제의 등을 보고 있으니 목덜미에 가래톳이 돋았다. 마주 포갠 손등에 이마를 대고 다리를 곧게 뻗은 모습이 더는 낮아질 수 없는 자세였다. 짧은 순간이 심어 준 긴 여운은 등을 향한 신뢰와 연민으로 깊게 남았다. 정면에서는 빤히 쳐다보지 못하는 소심함에서 비롯된 버릇이기는 하나 나는 타인의 등을 즐겨 바라본다. 길을 걷거나 버스를 기다리면서도 행인의 등에 자주 눈길이 머문다. 어깨를 곧게 펴고 경쾌하게 걷는 젊은이의 등에는 자신감이 넘쳐서 덩달아 기분이 좋다. 손수레를 밀고 가는 노인의 휘어진 등 위로 내리쬐는 칠월의 햇볕이 야속한 날도 있다. 수굿한 등에서는 생각의 깊이를, 쓸쓸한 등에서는 그리움의 깊이를 점쳐 본다. 나부의 그림을 ..
내 나이 이제 일흔이니, 이른바 기성세대다. 아니, 기성세대에서 구세대라 할 것이다. 그러나 구세대는 구세대임으로 겪어야 했던 과거가 있으니, 이는 젊은 세대들이 그들의 삶을 영위하는 데 혹 참고가 될지도 모른다. 70을 살고도 한 시간의 생각거리가 못 되는 인생이나마 여기 적는 것은 다만 '참고하기'를 바라는 뜻에서이다. 나는 1905년에 태어났다. 내가 태어난 집안에는 자녀가 드물었기 때문에, 나의 조부모께서는 나를 백 날 동안 사람에게도 해에도 달에도 보이지 않으시고, 당신들의 방 안에서 무릎에다 놓고 키우셨다 한다. 나는 이 일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나쁜 일이나 하지 않으면서 살려고 생각한다. 이것이 평범한 한 아기를 그토록 소중히 여기신 그분들께 최소한으로나마 보답하는 길이라고 믿는 까닭이다...
널찍한 마당도 아닌데 남쪽 한귀퉁이에 파초 한 그루, 단풍 한 그루, 무궁화 한 그루와 풀 몇 포기가 살고 있는 조그마한 화단이 있어서 겨울을 지낸 마른 가지에 새싹이 돋아나기를 기다리며 풀에는 어서 봄이 되어 꽃이 피기를 기다리며 마루에 앉아서 외로울 때면 저으기 위로도 받으며 말은 없지만 변함 없는 친구처럼 대한다. 그러니까 나무는 식물이라는 경계선을 넘어서 나에게 친근해진다. 어떤 때에는 머리를 흙 속에 파묻고 땅에 거꾸로 서서 팔을 위로 올리고 하늘에 기도하는 경건한 자세같이 보이기도 하여 일생에 한 번도 경건한 마음을 가져 보지 못한 위인보다도 더 고상해 보인다. 그러므로 나는 나무를 창생이라고 느끼는 때도 있다. 창생이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초목에 비유해서 가리키는 말인데, 그 창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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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이란 글자 그대로 붓 가는 대로 써지는 글이다. 그러므로, 다른 문학보다 더 개성적이며 심경적이며 경험적이다. 우리는 오늘날까지의 위대한 수필 문학이 그 어느 것이나 비록 객관적 사실을 다룬 것이라 하더라도, 심경에 부딪치지 않은 것을 보지 못했다. 강렬하게 짜내는, 심경적이라기보다 자연히 유로되는 심경적인 점에 그 특징이 있다. 이 점에서 수필은 시에 가깝다. 그러나, 시 그것은 아니다. 우리는 시를 쓰려 한다. 소설을 지어 보려 한다. 혹은 희곡을 만들어 보고자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때 그 어느 것이나 함부로 달려들려는 무모한은 아니다. 동일한 작자면서도 그 태도가 서로 다르다. 시는 심령이나 감각의 전율된 상태에서, 희곡과 소설은 재료의 정돈과 구성에 있어서 과학에 가까우리만큼 엄밀한 준비..
또한 모두 맛이 있다 亦皆有味 역개유미 - 정약용(丁若鏞, 1762~1836),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제12권 「나씨가례집어서(羅氏家禮輯語序)」 해 설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오랜 유배 생활 속에서 독서와 저술에 힘을 기울여 자신의 학문 체계를 완성했다. 「나씨가례집어서(羅氏家禮輯語序)」는 다산 초당으로 정약용을 찾아온 나경의 『가례집어』에 써준 머리말이다. 정약용은 ‘나씨가례집어서’에서 책을 만드는 것은 다양한 음식을 만드는 것과 같다고 이야기했다. 비슷한 책이 있다고 해서 10년 동안 정성을 쏟은 책을 내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콩과 조는 하늘이 내린 맛좋은 곡식이다. 그것을 쪄서 술을 만들어도 맛이 있고, 끓여서 떡을 만들어도 맛이 있다. 또 다양한 ..
가을이 산을 내려오고 있다. 대청봉이나 내장산처럼 자지러지는 단풍이 아니지만 산정에만 드문드문 보이던 황갈색이 어느 틈에 중턱까지 퍼졌다. 봄은 기를 쓰고 올라가더니 가을은 이렇게 신속하게 내려오고 있다. 왜 그렇게 빨리 내려오는지 내리막길 조심하라고 주의를 주고 싶다. 산은 올라갈 때보다 내려올 때 더 조심해야 된다는 걸 늙어가면서 알겠다. 조금만 딴 생각을 해도 발을 헛디디게 된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 생각이 난다. 어려서 넘어지길 잘해서 어머니한테 걸을 때는 걷는 생각만 하라는 주의를 여러 번 들었다. 넘어지는 것 말고도 어릴 적의 내 실수는 거의가 다 딴 생각을 하다가 저지른 거였다. 등산로 초입에 커다란 사시나무가 서 있다. 보통 때는 그 나무가 거기 있다는 것도 모르고 지나다녔다. 특별히 눈에..
비 오는 날 멀리서 우체통을 바라보았을 때 그것은 분명 빨간 금붕어였다. 뽀글뽀글 물방울을 뿜어 올리며 물속을 떠도는 어항 속의 금붕어. 진지한 편지를 써본 것이 언제였던가. 기억이 아득하면서도 우체통 앞을 지날 때마다 잊어버린 답장 빚이 켕겨서인지 얼른 지나쳐 버리기 일쑤였다. 그런데 비 오는 날의 우체통은 물속에서 먹이를 잡으려고 자맥질하는 금붕어처럼 사연을 재촉하며 입을 벌름거리는 것이었다. 무심히 지나칠 때 우체통은 아무런 의미도 관련도 없는 것. 그러나 사람들과의 교신을 위해 세워 놓은 안테나를 보며 우체통이 육성이 닿을 수 없는 언어가 저장되는 보석함이라고 느낀 적이 있다. 어떤 마음에서부터 스며들어 와서 고이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지하수처럼 많은 언어가 고여서 흐르고 있을 우체통. 숫자도 ..
그날은 당일로 돌아올 기차표를 끊지 않았다. 큰집에 갈 때면 늘 당일치기로 돌아오곤 했고 제삿날에는 늦은 밤차를 타고 내려왔다. 다음 날의 출근이 조금은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특별한 일이 늘 가로막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자고 와야겠다고 내심 작정했다. 부산으로 내려온 지 어언 스무 해가 넘는다. 그동안 가족 사정도 많이 바뀌었다. 형제들은 하나 둘 분가를 하였고, 무엇보다 집안 대주가 수를 다하면서 집안이 휑하니 빈 듯해져 버렸다. 당연히 어머니 혼자 집을 지키게 되었다. 어머니는 아직은 나다닐 정도여서 자식들에게 의탁하지 않아 마음 편하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면서 가족들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명절의 소동을 묵묵히 지켜보고 계신다. 어릴 때의 일이다. 당시 여름철에는 모기가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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