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막 안에 앉아 있을 수 없는 달, 사슴이 뿔을 가는 달, 또는 들소가 울부짖는 달ㅡ인디언이 부르는 7월의 다른 이름들이다. 1년을 반으로 접어 나머지 절반을 새로 시작하는 7월은 살아있는 그 어떤 것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 초록은 보다 원숙해지고 열매는 더욱 단단해지며, 곤충이나 동물은 부지런히 짝짓기를 하고 알을 낳고 허물을 벗는다. 1년 중 생명력이 절정에 이르는 시간, 바로 7월이다. 지하철이 답답한 터널을 빠져 나오자 오후의 햇빛이 객차 구석구석을 비추었다. 꾸벅거리며 조는 사람들 머리 위에도 햇빛이 머문다. 나는 눈이 부셔서 뒤로 한 발 물러섰다. 사람들 물결에 밀려 계단을 오르고 내리는 사이 내 몸을 지탱하는 발은 굽 높은 구두 속에서 조여들고 있었다. 힐을 신고도 잘 뛰어다니던 때가 ..
들녘에 피어나는 들국화는 피고 싶어서 핀다. 꽃더러 왜 피느냐고 묻지 말라. 살아있음의 가장 확실한 모습임을……. 내가 수필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다. 어느 시인은 나에게 “가슴으로 오는 소리를 듣고, 가슴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라고도 하고, 어느 분은 “혼魂으로 쓰는 글"이라고 한다. 삭여 보면, 본능적인 욕구의 표현행위로 보는 것이 아닌가 싶다. 작가가 작품을 쓸 때 그는 곧 자신의 생명을 피우는 작업이라 생각한다. 수필이라는 나의 꽃은 암울했던 시기에 구원의 손길로 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가가 된다거나 지면에 발표하려는 꿈을 갖지 못하고 살아가는 과정에서 부딪히는 고통이 글을 쓰게 하였고, 그렇게 함으로써 살아날 수 있었다. 누구에게 기대어 위로 받고 싶거나 스스로 무너질 때 차오르는 비애를 기..
산골의 아침은 제주도에서 온 배가 닿은 항구만큼 시끄럽다. 어스레한 박명 속에서 감자밭이 모습을 드러낼 즘 뻐꾸기, 산비둘기, 방울새, 곤줄박이 이름도 알 수 없는 새들이 뽕나무 가지 사이에서 뭐라고 뭐라고 조잘거린다. 도시 사람들은 산골에 살면 촉촉한 감정이 되살아나 낭만이 뚝뚝 떨어질 거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먹을 것도 마냥 있고 하늘도 마냥 푸르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밤꽃이 자지러지게 피면 아무 데나 똥을 싸는 새들이 슬슬 나의 부아를 돋운다. 새들과 쌈박질하면서 여름을 보내는 엉덩짝 펑퍼짐한 아줌마가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좀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빨래에다 방정맞은 초랭이처럼 똥을 싸놓고선‘나 잡아봐라.’삐융 날아간다. 머리를 찧고 싶다. 산뜻이 저기 박달나무에 둥지를 틀면 여북 좋을까만 내 집 ..
고개 마루턱에 방석소나무가 하나 있었다. 예까지 오면 거진 다 왔다는 생각에 마음이 홀가분해진다. 이 마루턱에서 보면 야트막한 산 밑에 올망졸망 초가집들이 들어선 마을이 오른쪽으로 넓은 마당 집이 내 진외가로 아저씨뻘 되는 분의 집이다. 나는 여름방학이 되어 집에 내려오면 한 번씩은 이 집을 찾는다. 이 집에는 나보다 한 살 아래인, 열세 살 되는 누이뻘 되는 소녀가 있었다. 실상 혼수를 따져 가며 통내외까지 할 절척(切戚)도 아니지만 서로 가깝게 지내는 터수라, 내가 가면 여간 반가워하지 아니했고, 으레 그 소녀를 오빠가 왔다고 불러내어 인사를 시키곤 했다. 소녀가 몸매며 옷매무새는 열 살만 되면 벌써 처녀로서의 예모를 갖추었고 침선이나 음식솜씨도 나타내기 시작했다. 집 문 앞에는 보리가 누렇게 패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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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회 경북일보 문학대전 수필 금상 젖은 빨래는 묵직하다. 머금은 물이 버티지 못하고 아래로 떨어진다. 누군가의 눈물처럼 흐른다. 지속적으로 떨어지는 물방울은 주변을 물바다로 만들기도 한다. 그렇게 범람 했던 자리라도, 시간이 흐르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물기가 마른다. 내 눈물도 그랬을까. 산후조리 중이었다. 산후도우미 아주머니는 9시에 출근이라, 아침에는 남편이 집안일을 도와줬다. 아이가 일찍 깨면 분유를 타서 가져다주고, 쌀을 씻어 안치고, 쓰레기까지 말끔히 정리했다. 그 날은 다른 날보다 바빠 보였다. 나는 5살 첫째와 태어난 지 한 달도 안 된 둘째의 사이에 누워 뒤척였다. 남편은 욕실에서 한참을 나오지 않고 텀벙대는 물소리만 들렸다. “자기야, 뭐해?” 내 물음에 그는 바로 응답했다...
실존과 초월, 주체와 타자, 안과 밖, 정신과 몸, 모든 경계에 이를 때 우리는 문을 통해 넘나들고 때로 양존하는 순간을 맞기도 한다. 그래서 세계는 온통 문이다. 그 문들을 통해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가는 길 또한 무수히 많다. 우리는 수많은 문을 통과하며 살아가지만 똑같은 문은 없다. 같은 문을 통과해도 그 경험은 매 번 다르다. 매 순간 변화하는 세계의 사물들은 비슷한 것 같아도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긴 생의 여정에서, 크고 작은 통과제의를 거칠 때마다 문을 통하지만 우리는 자신이 드나들었던 문들을 일일이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그 길을 지나며 변화하고 나아갈 뿐이다. 때론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던가. 사립문(대문) 동짓달 깊은 밤, 꿈결인 듯 잠에서 깨어나다 사립..
피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반드시 극복해야 할 대상이다. 겹겹이 쌓인 산허리 중에 그나마 쉬운 곳에 길을 냈으나 편히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몇 굽이 돌고 돌아 가쁜 숨 몰아쉬며 가풀막을 힘겹게 올라야 넘을 수 있다. 재를 처음 넘어 본 것은 초등학교 2학년 초, 설구산에 온통 붉은 꽃물이 들었던 시기였다. 어머니 손을 잡고 타박타박 걸었다. 노산의 늦둥이로 태어나 체구는 작고 병약해 두 번의 강을 건너고 재를 넘는 십리 장터를 다녀오는 것은 무리였다. 소풍을 앞두고 옷이랑 신발을 사준다는 달곰한 유혹이 없었다면 재를 오르다 벌렁 드러누웠을 일이다. 기억 속의 주치재는 높기만 했다. 그런데도 이 재를 넘어야 영월이나 제천, 원주를 갈 수 있었고 주천 중학교는 물론 장터에 가느라 곡식을 이고 진 사..
깊이를 가늠할 수 없었어요. 신령스러움이 느껴졌지요. 세상의 가장 복잡한 번뇌와 가슴 안쪽 고갱이의 사랑을 버무려 보석을 만든다면 아마 그런 빛깔이 아닐까 싶더군요. 졸여지고 졸여진 유장한 세월이 두 개의 눈에서 고요로 깊었어요. 외로움이나 그리움의 포물선을 중용으로 벼린 달관의 모습이라고나 할까요. 친정에 들를 때였지요. 동네 입구 당산나무 아래 구순의 노인이 차창으로 인사하는 나를 올려다보며 걱정했답니다. 납작한 돌을 괴고 앉은 채로요. 차고 물맛이 좋은 방앗간 집 우물이 곧 메워질 것이라는 겁니다. 뜬금없었지요. 동네 우물 없어진 지가 언제인데……. 골짜기 깊숙이 들어앉은 탓에 오랫동안 외면 받았던 친정 동네가 요즘은 전원주택지로 인기가 치솟고 있어요. 외지인들이 들어와 헌집을 부수고 높은 곳엔 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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