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범부일지凡夫逸志’란 책을 받았다. 희수 기념문집으로 낸 책의 뒤표지에 실린 사진 한 컷이 시선을 끌었다. 사진은 그늘진 전각을 배경으로 텅 빈 마당을 혼자서 걸어가고 있는 저자의 뒷모습이다. 성근백발에 키가 훤칠하고 몸집은 다소 우람한 편인데, 등과 어깨는 약간 수굿이 굽었으나 어디엘 가도 아직은 꿀릴 게 없다는 당당한 기개가 엿보인다. 다만 발뒤꿈치에서부터 시작된 작달막한 그림자만이 ‘인생살이란 결국은 허황한 놀이’란 다소 코믹한 모션으로 주인을 따라가고 있다. 저자도 그런 기미를 알아차렸는가, 사진에 대한 설명을 이란 글속에다 밝혔다. 오대산 월정사에서 ‘단기 출가수업’을 받을 때 누군가가 뒤에서 걸어가는 모습을 몰래 찍어 간직해 두었다가 5년이 지난 뒤, 출가동문회원들끼리 모인 자리에서 ..
번역문 구더기는 똥을, 말똥구리는 말똥을, 낙타는 소금을, 생쥐는 측간을, 닭은 지네를, 고양이는 뱀을, 뱀은 파리를, 좀벌레는 책을 좋아한다. 이 모든 것이 본성이다. 저 여러 사물들에게는 응당 자연스레 생긴 취미가 있어 각자 기약하지 않아도 절로 이르게 된다. 사물의 본성은 본래 옅은데 기욕(嗜欲)이 그것을 짙게 만드니, 나 또한 시(詩)에 있어서 그러하다. 나는 일여덟 때부터 시를 배웠는데 오래도록 빠져들어 미친 듯 좋아하여 밤낮을 잊고 침식을 폐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어른들은 병이라도 날까 걱정하여 금지시켰지만 번번이 틈을 타 인적 드문 곳에 숨어 몰래 읊조렸다. 걱정이라고는 오직 남들보다 뒤처지는 것일 뿐, 무엇이 즐거워서 그렇게까지 하는지를 알지 못했다. 원문 蝍蛆嗜糞, 蛣蜣嗜馬通, 橐駝嗜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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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각자의 색깔이 있다. 세상을 살아가는 마당에는 장사꾼, 정치꾼, 노름꾼 등이 있고, 문학마당에는 시인, 소설가, 수필가 등이 있다. 한 가지만으로는 신에 차지 않아 두 가지 혹은 세 가지를 겸한 사람도 있다. 나는 수필 한 가지만으로도 숨이 차서 헐떡이는데, 정말 부러운 재주꾼들이다. 다시 말해 색깔은 개성이다. 색깔은 다른 개체와 구별되는 그 개체의 특성을 말한다. 문학에서 개성은 매우 중요하다. 이는 그 작가만의 색깔과 냄새를 말한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문단의 현실은 어떠한가. 이것이 저것이고, 저것이 이것으로 꼭 같은 색깔과 냄새로 우리의 식욕을 떨어뜨리고 있다. 양(量)의 팽만(膨滿)으로 시중의 종이 값만 올리고 있지 않나 싶다. 참외는 노랑이고, 수박은 파랑이다. 맛에 앞서 색깔의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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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미인대회에서 받은 트로피 다 버렸어.” 지방에 사는 여동생 집에 전화했더니 예전에 멋모르고 미인대회에 나갔던 것을 후회한다고 했다. 미스코리아 예선전인 미의 대전에서 왕관을 받아 영광스러운 일인데, 시간이 흐를수록 부끄러움으로 남는다니. 나는 좀 당혹스러웠다. 하이라이트를 받는 무대 위의 미인이 아닌, 순수하고 소박한 미인이 되고 싶다 했다. 자신만이 갖는 개성미, 그 개성미가 무엇인지 이제사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공감이 가는 얘기였다. 그날, 난생 처음 미인대회가 열리는 대회장에 나가 출전한 후보들을 보며 진, 선, 미의 영예가 누구에게 돌아갈 것인가, 맨 앞좌석에 앉아 있으면서도 판가름 못했었다. 이왕이면 내 동생에게 그 왕관이 돌아가길 바라는 마음에서 나는 유심히 그들을 눈여겨..
절벽 앞에 서고 말았다. 만약 한두 걸음만 앞으로 옮기면 수십 길 낭떠러지로 추락하고 만다. 그 뒤는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절벽의 높이를 가늠하고 우회할 길을 찾자면 앞으로 더 나아가야 하는데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낭패감과 당혹스러움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오직 물러나 되돌아가는 방법밖에 없었다. 앞으로 더 가지 말라는 신호가 몇 번이나 있었다. 아내와 딸이 뭔가 낌새가 이상하다고 가볍게 말했다. 그때마다 너무 작은 데까지 쓸데없는 신경을 쓴다고 핀잔을 주었다. 봄기운이 대지에 퍼지기 시작하는 2월 말 어느 날 세 사람이 동네 인접한 곳으로 산행을 나섰다. 목표 지점을 좀 길게 잡았다. 중간에 한 번 쉬었으나 두 시간 정도 산길을 걸으니 얼마간 힘들기도 했다. 거의 목적지 가까이에 왔을 무렵이었다. 등..
뻐꾹새가 한나절을 피를 토하듯 운다. 뻐꾹 뻑뻐국 뻐꾹, 그 소리가 온 산을 채우고도 남아 메아리를 만든다. ‘이리 오너라, 네 어미가 여기 있다.’ 간절함이 뼈에 사무친다. 어쩔 수 없이 남의 손에 키운 자식이지만 어미 품으로 찾아오라고 애달피 운다. 요사이 나는 햇살이 아까워 주말이면 남의 땅 한 귀퉁이에 씨를 묻고 풀을 매는 재미를 붙였다. 기승을 떨치는 잡초와 실랑이를 하다보면 세상사 복잡한 일이 모두 부질없이 여겨진다. 덥다 싶으면 한줄기 바람이 지나가고, 심심하다 싶으면 새들이 제각각의 노래로 귀를 즐겁게 한다. 오늘도 밭고랑에 앉아 마음밭에 무성히 돋은 잡초를 뽑듯 김을 매는데 뻐꾸기소리가 가슴을 쳤다. 심상치 않은 울음이었다. 어렸을 적 이모와 뙈기밭에 콩잎을 따러 갈 때면 들리던 뻐꾸기소..
때로 우리는 낯선 땅을 밟고 그곳의 분위기에 젖다보면 잠시 나를 잊을 때가 있다. 강, 달 배, 숲, 시가 있는 풍경, 분강촌汾江村의 하루가 그러했다. 마치 5백 년을 거슬러 올라간 듯한 신비스러움을 느꼈다.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에 있는 농암(聾巖) 종택은 퇴계 이황(李滉)의 스승이신 이현보 선생의 생가로 그의 17대손이 살고 있었다. 둘레에 아름드리 소나무가 운치를 더해주는 예스런 기와집, 따스한 온돌방에서 문풍지 우는 소리에 잠을 설쳤지만, 새벽 대기는 폐부를 찌르는 상쾌함이었다. 이곳에서 아침식사를 마치고 근처 청량산(淸凉山)으로 향했다. 2월 하순의 산은 황량했지만 세상사에 찌든 등산객들을 포근히 안아주었다. 훤히 뚫린 시야, 가물가물 안개처럼 서리는 나목 잔가지 끝 너머로 봄소식은 다가오는가. ..
스탠포드 캠퍼스에선 후버타워의 종이 시간마다 쟁기질했다. 처음 울릴 때부터 조신스러웠지만 그 여운도 길고 아련했다. 마치 보리밭 긴 긴 이랑 끝으로 사라지는 나른한 뻐꾸기 울음 같았다. 그 종소리가 여섯 번 울리면 배가 고팠다. 그리곤 주섬주섬 책상을 정리하곤 연구실 문을 나섰다. 찰그락 잠기는 소리가 기다란 복도를 흔들었다. 연구실 뒷마당에서 내 자전거를 끌고 나왔다. 고물 자전거는 삐그적거렸다. 캠퍼스 동남쪽엔 작은 구릉이 있었고 그 구릉엔 교수들의 주택이 마을을 이루었다. 종교학 교수의 집 차고 옆에 달린 행랑방을 빌려서 한여름을 나기로 했다. 허름한 목조 건물인데다 동쪽과 남쪽이 빽빽한 정원수라서 짙은 잎 냄새에 꼬리한 곰팡내까지 배여 있었다. 자전거를 몰면서 널찍한 캠퍼스를 가로지를 때 내 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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