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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태어나자마자 큰집에서 양자로 자랐다. 6‧25 전쟁 통에 큰아버지가 딸 둘만 남기고 돌아가셨으므로 작은집의 장남인 내가 양자로 간 것이다. 그 사실은 할머니의 엄한 함구령으로 내가 다 클 때까지 아무도 나에게 말해 주지 않아서 나는 전혀 몰랐다. 젖을 떼자마자 아버지는 나를 큰어머니에게 넘겨주며, “이놈은 이제 죽든 살든 형수님의 자식입니다.” 하고는 평생동안 두 번 다시 나에 대해서 말씀하지 않으셨다고 한다. 만주 사변으로 할아버지를 잃은 할머니는 스물일곱 살의 나이에 어린 아들 셋을 데리고 고향 울진으로 돌아왔다. 할머니는 길쌈으로 어린 아들 셋을 키우셨다. 그러다가 6‧25 전쟁 통에 맏아들과 둘째를 잃고 막내인 아버지만 할머니 곁에 남게 되었다. 아버지는 농사를 지으셨다. 그때 우리가 사는 ..
모처럼 여가가 생겼다. 툇마루 한쪽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죽물 상자 속에는 내 잡동사니가 수용되어 있다. 그 체적이 해마다 불어나건만 버릴 수도 고를 수도 없어 이날저날 미루어 오던 터였다. 그 속에는 해마다 세밑이면 날아오는 크리스마스카드나 연하장, 거기다 국내외서 이따금 육필로 찾아오는 편지들이 쌓여 있다. 그것들을 한 장이라도 버릴 수 없어서였다. 임시로 그것들을 꾸리어 묶고 꾸러미마다 연도를 표시하는 쪽지를 달았다. 그 상자를 열고 뭉치들을 풀어 놓았다. 한 해의 분량이 자그마치 한 광주리였다. 나는 그것들을 한 장 한 장 다시 펼쳤다. 까맣게 잊었던 사람이 내 귓전으로 다가 와서 멍울진 소릴 한다. 나는 실어증에 걸린 양 멍청했다. 그리고 아물거리는 눈까풀이 축축했다. 묵은 카드, 묵은 편지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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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던한 부부지간에도 가벼운 말다툼쯤은 있게 마련이다. 그것이 도에 지나치지만 않는다면 없는 것보다 낫다는 말도 있다. 실제로도 가벼운 입씨름이 자칫 무미건조해지기 쉬운 부부간에 활력소 구실을 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짓도 오래 지속하다 보면 단골 ‘메뉴’ 같은 것이 생기기 마련인데, 그것이 자존심에 저촉(?)되는 사안일 경우 잘못하면 위험 수위로까지 치닫는 수도 있다. 자식에 관한 문제가 그 중의 하나다. 자식은 어디까지나 부부의 합작품이니만큼, 부모 중 어느 한 사람을 닮거나 두 사람의 특성을 적당히 섞어서 닮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이럴 경우 부모 모두가 조금도 나무랄 데 없는 완전한 인간이고, 자식들 또한 그런 부모를 완벽하게 닮는다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그것은 한낱 이상론에 지나지 않는 ..
손을 뻗으면 닿을 듯 산은 지척이다. 눈을 들어 바라보면 봄은 손짓하고 배낭을 멘 발길은 어느새 산길로 접어든다. 온갖 미세한 소리가 찌든 귀를 씻어준다. 오늘은 어떤 꽃을 만날까? 부푼 기대는 들이며 산을 헤매는 계절병이 되었다. 꽃샘추위가 간간이 봄의 발목을 잡는다. 그러나 먼 곳에서 복수초가 노랗게 봄을 열었다는 소식이다. 긴 겨울동안 조바심을 내던 마음에 봄은 옮겨 앉고 나는 천마산이 부르기라도 하는 듯 내닫는다. 귀 기울이면 나무들의 물 올리는 소리가 들리고 싹눈은 터지기 직전이다. 두터운 낙엽 속에선 이미 작은 속살거림이 시작되고 있었다. 앉은부채였다. 희귀종에 속하는 노란 앉은부채는 철망에 싸여 보호를 받을망정 노란 빛처럼 눈이 부시다. 붉은 앉은부채는 생존경쟁에서 강자에 속하는지 제법 군락..
늪의 종류는 많다. 슬픔, 나태, 후회, 실망, 고통, 침체, 불면, 죽음, 착각…의 늪이 있다. 어떤 단어에 늪만 부치면 될 만큼 늪의 이름은 다양하다. 나는 ‘착각의 늪’에 빠지곤 한다. 편지를 쓰고 나니, 벌써 저녁이다. 우체국 마감시간 전까지 가려고 하니 마음이 급하다. 열흘 앓은 환자처럼 창백한 맨 얼굴로 외출할 수 없기에, 분홍색 립스틱을 칠하니 그나마 얼굴에 화색이 돈다. 청치마에 하얀색 티셔츠를 입는다. 티셔츠의 앞부분과 소매 끝이 오색의 꽃으로 수놓여 있어, 시골집 꽃밭을 떠올려주기에 즐겨 입는 옷이다. 받쳐 입고 수십 통의 편지봉투를 경쾌한 걸음걸이로 집을 나선다. 우체국에 들어서니 남자 직원이 반갑게 맞아준다. 우표를 달라고 부탁하며 직원 앞에 서 있는데 이상한 느낌이 들어 고개를 드..
미세한 날개의 현絃을 부비며 풀벌레가 애를 끓인다. 혹은 낮은 소리는 다시 가깝고 먼 거리의 조화로 신비한 우주의 대합주로 들린다. 이슥한 밤의 무게를 가늠하게 함인가. 어둠에 묻혀 잠시 보이지 않을 뿐 삼라만상은 쉼없이 새 날의 태동을 계속하고 있음을 알려주는지, 영혼은 바람 걸리지 않는 거미줄이 되어 소리의 그네를 타며 잠들지 못하는 희열이 있다. 수삭瘦削해진 풀벌레의 울음이 잦아지는 시간, 정결의례를 거친 부상扶桑의 태양이 감은 머리결을 부드럽게 젖히며 여명을 보내온다. 밤새 진득이 지키지 못한 잠자리를 떨치면 육신은 세고 世故를 벗어난 기쁨처럼 가볍다. 싸아한 대기 속으로 한 걸음 내려 서본다. 먼저 깨어난 보답으로 새롭게 만나는 대상들은 경이롭기만하다. 태고의 신비와 보석처럼 찬연한 아름다움도 ..
대구미술관에서 ‘간송 조선회화 명품전’이 열리고 있다. 간송은 일제강점기 때 문화재가 일본으로 반출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고서화와 골동품 등을 수집한 사람이다. 골동품과 문화재를 수집하는 한편, 석탑, 석불, 불도 등의 문화재를 수집·보존하는 데도 힘을 썼다고 한다. 그의 소장품은 대부분 국보 및 보물급의 문화재로 김정희, 신윤복 김홍도, 장승업 등의 회화 작품과 서예 및 자기류, 불상, 석불, 서적에 이르기까지 한국 미술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고 한다. 지인들 몇몇이 어울려 간송의 명품들을 보기 위해 갔다. 조선 시대 유명 화가들의 작품이 많이 걸려있다. 신윤복의 미인도 앞이다. 그림을 잘 그렸는지 미인도가 품격이 있어서인지 많은 사람이 모여 있다. 마치 신윤복 회화전인 듯 안내 책자의 표지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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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흑구문학상 수상작 칼을 빼 들어 본다. 칼의 무딘 정도를 손끝으로 직감한다. 칼날이 무뎌진 걸 느끼면 칼 가는 줄로 쓱싹 대충 갈아 사용하는 나이다. 그러나 나의 옛집에서는 매 식사 때마다 찬거리를 썰고 다졌던 칼이 도마 위에서 재료들을 미끄러뜨리면 칼을 들고 장독대로 향해 걸어 나가셨던 엄마가 계셨다. 그곳에서 마음에 드는 항아리 뚜껑 하나를 열어 거꾸로 덮어놓으시고는 뚜껑 테두리에 칼날을 쓱싹 문질러 갈아 쓰셨다. 칼날이 더 무디어지면 툇마루 아래 놓아둔 우리 집의 숫돌이 등장하였다. 숫돌은 아버지의 전유물처럼 칼이나 낫을 갈 때만 우리들 앞에 놓여졌다. 아버지의 수고로 칼날은 시퍼렇게 번뜩였다. 그런 칼날을 받아 보며 긴장하여 떨던 엄마는 자주 칼날에 베이셨다. “조금만 덜 갈아 주면 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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