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천지가 붉은색이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넓은 벌판은 온통 자운영(紫雲英) 꽃밭이었다. 그 가운데로 이어진 방죽길을 걸어가는 어머니의 흰색 저고리도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어머니를 졸졸 좇아가는 나의 얼굴이며 온몸은 붉은 자운영 물감을 덮어쓰고 있었다. 꿀과 꽃가루가 유채보다 더 많은 자운영, 그 꽃밭에는 꿀벌들이 윙윙 소리 내며 날아다니고, 흰나비 노랑나비 호랑나비가 숨바꼭질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파란 하늘에 햇살도 눈부신 화창한 봄날, 어머니는 보퉁이 하나는 머리에 이고 다른 하나는 손에 들고 딸네 집으로 나들이에 나섰다. 마흔아홉에 낳았다고 하여 ‘쉰둥이’로 불린 나는 어머니가 가는 길이라면 어디거나 졸졸 따라갔다. 자나 깨나 농사일을 하는 어머니와 50살 나이 차이의 코흘리개 막내둥이와는 ..
신의 눈초리 / 류주현1 -문학의 필요성과 그 사명 문학자는 시대의 증인이고 그 작품은 시대의 중언이기를 소망한다. 한 시대의 특성을, 그 시대를 사는 개성 있는 인간을 잘 묘출해 내서 현재를 관조하고 미래를 설계하는 것은 문학자의 사명이고 문학의 본질적인 권능이다. 인간상이거나 시대사조거나 그 고유한 특성이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는 작품이면 시간이나 공간을 초월하여 오랜 생명을 갖게 마련인데, 그런 경우 작품에서 창조된 사회상이나 인간사는 우리가 혐오하는 양상일 수도 있다. 또는 가장 일상적인 권태로운 소시민의 외면적인 조소에서 시작하여, 차원 높은 내면세계로의 심화를 상징시키는 설득력 있는 꿈의 조형으로 승화되는 예도 있다. 그 어떤 경우거나 문학은 현실적인 토양에서 싹이 돋아난다. 한 시대, 그 ..
고향을 향한 마음 / 송건호1 젊어서는 고향을 등지는 것이 그들의 당연한 생활처럼 생각되고 있다. 학교를 나온 뒤 서울이나 지방 도시에서 하다못해 몇만 원 월급쟁이라도 해야만 고향 사람들의 칭찬의 대상이 되지 집에서 농사를 짓거나 마을 일을 돕는 것으로 그친다면 이러한 청년은 사회에서 낙오된 젊은이로 업신여김을 받기 일쑤다. 남자가 뜻을 세워 고향을 나온 이상 성공을 못 하고는 죽어도 귀향하지 않는다는 결심이 훌륭한 젊은이로 칭찬을 받는다. 그래서 많은 청년들이 장성하면 고향을 등지고 이른바 '성공'을 위해 노력한다. 물론 젊은이들의 이러한 '성공'에의 야망을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고 이러한 야심에 찬 젊은이가 많으면 많을수록 나라의 앞날이 양양해진다는 것도 긴 설명을 필요치 않는다. 그러나 내가 여기에..
수천석두水穿石頭 / 설의식1 중학 시대의 도화, 습자는 으레 을이었다. 그만큼 나는 그림과 글씨에 재주가 없었다. 재주는 없었으나, 취미는 또 무던하여서 서, 화를 즐겼다. 기능의 부족을 감상으로써 보충하려는 심산인지도 모른다. 하여간 이와 같은 심경으로 그림을 모았다. 원래 힘 부족이라 고급품은 생염도 못 하였고 그저 너저분한 고물상을 뒤졌을 뿐이다. 그나마도 만만한 것은 또 구복을 위해서 팔기도 하였다. 두제의 문구가 남아 있는 현판 중의 하나이니 추사의 글씨다. 이것만은 팔 수가 없어서 서재에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글씨 때문만이 아니라, 그 내력에 있어서 심금에 울리는 귀중한 마디가 있는 까닭이다. 한문이나마 이 글을 쓰는 핑계도 여기에 있다. 수천석두--물이 돌머리를 뚫는다. 이 문구의 출현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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