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를 처음 만난 곳은 동네 목욕탕에서였다. 탈의장에서 옷을 벗다 말고 나는 한동안 그를 지켜보았다. 그는 한쪽 손으로 벽을 더듬어 가고 있었다. 탈의장 안에 다른 사람은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욕탕 문의 손잡이를 찾아내고는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 욕탕 안은 한산했다. 나와 그 외에 목욕하는 사람이 둘. 그는 다시 손끝으로 벽을 더듬더니 샤워기 아래에 섰다. 손끝으로 물 온도를 가늠 하던 그는 곧장 샤워를 했다. 비누칠을 하고 두 번 거푸 머리를 감는 모습도 보였다. 샤워가 끝난 뒤에는 양치질이 있었다. 들고 온 작은 손가방에서 그가 칫솔을 꺼냈다. 그는 다시 한쪽 손으로 벽을 더듬어 가기 시작했다. 그의 손에 치약이 잡혔다. 그러나 그는 치약을 스쳐갔다. 그가 찾는 것은 치약이 아니..
나무에 잘 오르는 놈은 나무에서 떨어져 죽고, 물 헤엄을 잘 치는 놈은 물에 빠져 죽는다 하니, 무슨 소리뇨? 두 손을 비비고 방안에 앉았으면 아무런 실패가 없을지나, 다만 그러하면 인류 사회가 적막한 총묘와 같으리니, 나무에서 떨어져 죽을지언정, 물에 빠져 죽을지언정, 앉은뱅이의 죽음은 안 할지니라. 실패자를 웃고 성공자를 노래함도 또한 우부(어리석은 사람)의 벽견이라. 성공자는 앉은뱅이같이 방 안에서 늙는 자는 아니나, 그러나 약은 사람이 되어 쉽고 만만한 일에 착수하므로 성공하거늘, 이를 위인이라 칭하여 화공이 그 얼굴을 그리며, 시인이 그 자취를 꿈꾸며, 역사가가 그 언행을 적으니, 어찌 가소한 일이 아니냐. 지어 불에 들면 불과 싸우며, 물에 들면 물과 싸우며, 쌍수로 범을 잡고 적신으로 탄알과..
1 한 사람이 떡장사로 득리하였다면 온 동리에 떡방아 소리가 나고, 동편 집이 술 팔다가 실패하면 서편 집의 노구도 용수를 떼어 들이어, 진할 때에 같이 와--하다가 퇴할 때에 같이 우르르 하는 사회가 어느 사회냐. 매우 창피하지만 우리 조선의 사회라고 자인할 수밖에 없다. 삼국 중엽부터 고려 말일까지 염불과 목탁이 세가 나, 제왕이나 평민은 물론하고 남은 여에게 권하며, 조는 손에게 권하여 나무아미타불한 소리로 팔백 년을 보내지 안하였느냐. 이조 이래로 유교를 존상하매, 서적은 사서오경이나 그렇지 않으면 사서오경을 되풀이한 것뿐이며, 학술은 심, 성, 이, 기의 강론뿐이 아니었더냐. 이같이 단조로 진행되는 사회가 어디 있느냐. 예수교를 믿어야 하겠다 하면, 삼 두락 밖에 못 되는 토지를 톡톡 팔아 교당..
돈세탁 상식 / 엄현옥 견디기 힘든 소음이었다. 녀석은 세상의 모든 고통을 안고 물속에서 덜덜거렸다. 탈수 때면 통증으로 몸을 쥐어짜며 비명을 지르기 일쑤였다. 두어 번 서비스를 받기도 했다. 서비스 기사가 다녀가면 쓸 만했으나, 며칠 후 고질병은 재발했다. 참을 만큼 참았다. 십년지기와의 작별을 서두르기로 했다. 새로 들인 세탁기는 몸체부터 듬직했다. 빛나는 회색빛 사각면체에 뚜껑이 유리여서 세탁조가 훤히 보였다. 탈수 시에도 미미한 기계음만 들렸다. 소리 없이 강한 녀석이었다. 뚜껑에는 손바닥만 한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고딕체로 번쩍거리는 스티커의 제목은 ‘세탁상식’이었다. ‘세’라는 글자 앞에 심플하게 도안한 티셔츠와 물결무늬가 그려져 있어, ‘돈’의 상형 문자처럼 보였다. 그로인해 ‘..
아이고, 시상에, 간밤에 꿈자리가 와 그래 시끄럽덩고. 무시라, 구리이가 글키 큰 건 첨 밧쓴께. 한 놈이 방으로 기 들오디만 고마 내 모가지를 팍 물고 내빼뿌는 기라. 증말루 실코 무서븐 기 배암인데. 을매나 식겁했던지 이불에 땀이 푹 다 젖었더라꼬. 억수로 기분 나뿌대. 마, 일나자마자 꿈 해몽을 안 차자밨나. 아이쿠, 머라카노? 이기 웬 떡잉기요. 복권 사라 카네. 근디 복권을 우째 사능고? 사바야 알제. 일 안하고, 맨날 빈둥빈둥 나자빠져 디비 자거나, 깰바꼬 요행만 바래는 사람이 복권 사는 줄 알았디마, 내가 그 짝 날 판인기라. 안 사고 지나갈라 카이 염팡 당첨될 꺼 가꼬, 사러 갈라 카이 또 와이래 부끄럽노. 모티라도 있으마 숨고 싶다. 혹시 복권 살 때 아는 아지매라도 보마 “아이고 저..
저녁노을이 출렁이며 창을 넘어온다. 저물며 빚어내는 선연한 빛이 동살보다 눈부시다. 들녘에 선 대추나무 가지가 휘늘어졌다. 주렁주렁 매달린 저 열매처럼 자식들이 여럿이면 무엇하나? 할아버지는 오늘도 자신의 몸집보다 더 커다란 휠체어에 할머니를 앉히고 조심조심 산책을 한다. 저녁들판에 낮게 깔린 노을이 황혼에 든 두 노인의 어깨 위로 곱게 번진다. 저물녘의 풍경이 평온하다. 가을 들을 물들이고 나무를 물들이는 것이 어찌 지는 해의 손길뿐이랴. 저무는 해가 천천히 숨을 고르는 동안 휠체어를 미는 할아버지의 손길도 잠시 멈춘다. 할아버지는 노을빛으로 물든 할머니의 얼굴을 슬쩍 어루만지더니 어깨 위에 흘러내린 머플러를 다시 여미어 준다. 할아버지 역시 이곳 요양병원에 입원 중인 환자이다. 당신의 육신 또한 ..
회사에 여고를 갓 졸업한 신입 사원이 들어왔다. 키도 작고 얼굴도 복숭아처럼 보송송하다. 어쩌다 사원들끼리 우스갯소리라도 하면 뺨에 먼저 꽃물이 번진다. 한번은 실수한 일이 있어서 나무랐더니 금방 눈물을 방울방울 떨어뜨렸다. “우유를 더 좀 먹어야겠군.” 혼잣말을 하면서 돌아서다 말고 물어 보았다. “올해 몇 살이지?” 그러자 신입 사원은 손수건으로 눈 밑을 누르면서 가만가만히 대답하였다. “스무 살이에요.” 여자 나이 스무 살……. 소녀에서 성인으로 턱걸이를 하는 저 나이. 무엇이거나 그저 우습고 부끄럽기만 한 저 시절. 나는 문득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각키웠다. 우리 어머니가 하늘의 별로 돌아 신 나이가 바로 저 스무 살이었던 것이다. 열일곱에 시집와서 열여덟에 나를 낳고 ..
층층으로 된 5톤 트럭에 닭들이 한가득 실려 간다. 닭장 문은 바깥쪽으로 단단히 잠겨 있다. 농장 주인이 닭장 트럭에 마구 집어 던졌을 때의 모습인 양, 꺾인 날갯죽지를 미처 정리하지도 못한 어정쩡한 자세로 좁은 철장에 꽉 끼어 있다. 사력을 다해 파닥거려 보지만, 움직이지 않는 편이 더 낫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지. 앞으로 어떤 운명에 처하게 되려는지, 불안한 차체의 흔들림과 함께 이런 갑작스런 외출이 그저 낯설고 황망할 뿐이다. 트럭이 비탈길을 휘돌아간다. 중심을 잃을 때마다 시간의 속도를 발톱으로 제어해보려는 닭들은 간헐적인 신음소리를 낸다. 하지만 속도는 잡지 못하고 애꿎게 뽑힌 제 몸의 겉 털만 철망 사이에 어설프게 꽂힌다.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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