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담계곡을 내려오며 / 윤제림 1. 꼬리를 치며 따라붙는 여자 너 잘 걸렸다, 불알 밑에 힘을 돋우며 손목도 잡아보고, 쓸어안아도 가만있는 여자. 입에는 샛하얀 거품을 물고 쉴새없이 재깔이며 눈웃음도 치며 속치마도 잠깐 잠깐 내보이며 산길 이십 리를 같이 걸어내려온 여자. 2. 인간의 여자라면 마을길 이십 리쯤 더 내려왔을 텐데요. 그 여자는 한 걸음도 더는 따라오지 않습니다요, 못된 년, 망할 년 욕이나 다 나왔지만요. 내 탓이지요 뭐. 그녀의 말은 한 마디도 못 알아들었으니까요. 말도 안 통하는 사내 따라 나설 계집이 어디 있겠어요. 말귀만 좀 통했으면 집에까지 데려올 수도 있었을 텐데요. 외할머니 / 윤제림 - 박경리 선생의 사진을 보며 세상 모든 외할머니의 얼굴을 한 할머니 한 분이, 치악산 가을..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칼릴 지브란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그리하여 너희 사이에 하늘 바람이 춤추게 하라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사랑으로 구속하지 마라 그보다 너희 영혼들의 기슭 사이에 바다가 출렁이게 하라 서로의 잔을 채우되 하나의 잔만 마시지는 말라 서로 빵을 주되 한쪽의 빵만 먹지 말라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즐거워하되 서로 혼자 있게 하라 마치 현악기의 줄들이 하나의 음악을 울릴지라도 줄은 서로 홀로이듯이 서로 심장을 주되 서로의 심장에 머물러 있지 말라 오직 생명의 손만이 너의 심장을 담아둘 수 있다 함께 서 있으라 그러나 너무 가까이 있지는 말라 사원의 기둥들이 서로 떨어져 있고 참나무와 삼나무는 서로의 그늘 속에서는 자라지 못하듯이
섬 / 정현종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방문객 / 정현종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 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그대는 별인가 - 시인을 위하여 / 정현종 하늘의 별처럼 많은 별/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은 모래/ 반짝이는 건 반짝이는 거고/ 고독한 건 고독한 거지만/ 그대 별의 반짝이는 살 속으로 걸어들어가/ "나는 반짝인다"고 노래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지/ 그대의 육체가 사막 위에 떠 있는/ 거대한 ..
사평역에서 /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 잎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
우산 접듯 반만 접기로 한다 요즘 [아내]가 하는 걸 보면 섭섭하기도 하고 괘씸하기도 하지만 접기로 한다 지폐도 반으로 접어야 호주머니에 넣기 편하고 다 쓴 편지도 접어야 봉투 속에 들어가 전해지듯 두 눈 딱 감기로 한다 하찮은 종이 한 장일지라도 접어야 냇물에 띄울 수 있고 두 번을 접고 또 두 번을 더 접어야 종이비행기는 날지 않던가 살다 보면 이슬비도 장대비도 한순간, 햇살에 배겨 나지 못하는 우산 접듯 반만 접기로 한다 반에 반만 접어 보기로 한다 나는 새도 날개를 접어야 둥지에 들지 않던가 오만원 / 박영희 시 세 편을 보냈더니 오만원을 보내왔다/ 어중간한 돈이다/ 죽는 소리해서 응해줬더니/ 독촉 전화 잦은 에 26,000원 보내주고/ 그 길로 시장통에 가 아내의 머리핀을 고른다/ 이것도 버릇인..
산에 대하여 / 신경림 산이라 해서 다 크고 높은 것은 아니다 다 험하고 가파른 것은 아니다 어떤 산은 크고 높은 산 아래 시시덕거리고 웃으며 나즈막히 엎드려 있고 또 어떤 산은 험하고 가파른 산자락에서 슬그머니 빠져 동네까지 내려와 부러운 듯 사람 사는 꼴을 구경하고 섰다 그리고는 높은 산을 오르는 사람들에게 순하디 순한 길이 되어 주기도 하고 남의 눈을 꺼리는 젊은 쌍에게 짐즛 따뜻한 숨을 자리가 돼 주기도 한다 그래서 낮은 산은 내 이웃이던 간난이네 안방 왕골자리처럼 때에 절고 그 누더기 이불처럼 지린내가 배지만 눈개비나무 찰피나무며 모싯대 개숙에 덮여 곤줄박이 개개비 휘파람새 노랫소리를 듣는 기쁨은 낮은 산만이 안다 사람들이 서로 미워서 잡아 죽일 듯 이빨을 갈고 손톱을 세우다가도 칡넝쿨처럼 감기..
윤동주 시인 출생~사망 1917.12.30~1945.2.16 학력 연희전문학교 문과 수상 1999년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선정 20세기를 빛낸 한국의 예술인 경력 1948 미발표 유작을 첨가,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발간 1939 소년에 동요 '산울림' 발표 1939 조선일보에 산문 '달을 쏘다' 발표 자화상 (1948.)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단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이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
- Total
- Today
-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