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 / 문정희 어머니 나는 가시였어요 당신의 생애를 찌르던 가시 당신 떠난 후 그 가시가 나를 찔러요 내가 나를 찔러요 어머니 남편 / 문정희 아버지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 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 내게 잠 못 이루는 연애가 생기면/ 제일 먼저 의논하고 물어보고 싶다가도/ 아차, 다 되어도 이것만은 안 되지 하고/ 돌아누워 버리는/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 이 무슨 원수인가 싶을 때도 있지만/ 지구를 다 돌아다녀도/ 내가 낳은 새끼들을 제일로 사랑하는 남자는/ 이 남자일 것 같아/ 다시금 오늘도 저녁을 짓는다/ 그러고 보니 밥을 나와 함께/ 가장 많이 먹은 남자/ 전쟁을 가장 많이 가르쳐준 남자// 치마 / 문정희 벌써 남자들은 그곳에/ 심상치 않은 것이 있음을 안다/ 치마..
저녁연기 / 오탁번 해가 지는 것도 모른 채 들에서 뛰어놀다가, 터무니없이 기다랗게 쓰러져 있는 나의 그림자에 놀라 고개를 들면 보이던 어머니의 손짓 같은 연기. 마을의 높지 않은 굴뚝에서 피어올라 하늘로 멀리멀리 올라가지 않고 대추나무나 살구나무 높이까지만 퍼져 오르다가는, 저녁때도 모르는 나를 찾아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논두럭 밭두럭을 넘어와서, 어머니의 근심을 전해주던 바로 그 저녁연기였다 저녁연기 같은 것 - ‘시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한 산문시 같은 산문 시는 저녁연기 같은 것이다. 가난하지만 평화로운 마을, 초가집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저녁연기가 바로 시다. 해가 지는 것도 모른 채 들에서 뛰어놀다가 터무니없이 기다랗게 쓰러져 있는 내 그림자에 놀라 고개를 들면 보이던 어머니의 손짓 같은 연..
이별의 노래 / 박목월 기러기 울어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은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한낮이 끝나면 밤이 오듯이 우리의 사랑도 저물었네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 날 밤에 촛불을 밝혀두고 홀로 울리라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만술아비의 축문 / 박목월 아배요 아배요/ 내 눈이 티눈인 걸/ 아배도 알지러요./ 등잔불도 없는 제사상에/ 축문이 당한기요./ 눌러 눌러/ 소금에 밥이나마 많이 묵고 가이소./ 윤사월 보릿고개/ 아배도 알지러요./ 간고등어 한 손이믄/ 아배 소원 풀어드리련만/ 저승길 배고플라요/ 소금에 밥인나마 많이 묵고 묵고 가이소.// 여보게 만술아비/ 니 정성이 엄첩다./ 이승 저승 다 다녀도/ 인정보다 귀한 것 있을락꼬,/ 망령도 응감..
빈 산 / 김지하 빈 산 아무도 더는 오르지 않는 저 빈 산 해와 바람이 부딪쳐 우는 외로운 벌거숭이 산 아아 빈 산 이제는 우리가 죽어 없어져도 상여로도 떠나지 못할 아득한 산 빈 산 너무 길어라 대낮 몸부림이 너무 고달퍼라 지금은 숨어 깊고 깊은 저 흙 속에 저 침묵한 산맥 속에 숨어 타는 숯이야 내일은 아무도 불꽃일 줄도 몰라라 한줌 흙을 쥐고 울부짖는 사람아 네가 죽을 저 산에 죽어 끝없이 죽어 산에 저 빈 산에 아아 불꽃일 줄도 몰라라 내일은 한 그루 새 푸른 솔일 줄도 몰라라. * 임진택 선생이 부르시는 '빈산' 무화과 / 김지하 돌담 기대 친구 손 붙들고/ 토한 뒤 눈물 닦고 코 풀고 나서/ 우러른 잿빛 하늘/ 무화과 한 그루가 그마저 가려 섰다//. 이봐/ 내게 꽃 시절이 없었어/ 꽃 없이..
설행(雪行) / 복효근 분명 무엇인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올라간 산정 허무만이 눈보라로 몰려 올뿐 아무 것도 없어 더 믿을게 없어 앞서 간 사람의 발자국만이 경전처럼 눈부셨습니다 몇몇의 발이 부르트고 관절이 삐꺽이고 추위에 귓불이 얼었을지라도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었으므로 더 잃을 것도 없어 비로소 서로가 나침반이 되었습니다 가슴에서 가슴속으로 길을 내어주던 눈보라속에서 내 모든 그대가 이정표입니다 길입니다 당신이 슬플 때 나는 사랑한다 / 복효근 내가 꽃피는 일이/ 당신을 사랑해서가 아니라면/ 꽃은 피어 무엇하리/ 당신이 기쁨에 넘쳐/ 온누리 햇살에 둘리어 있을 때/ 나는 꽃피어 또 무엇하리/ 또한/ 내 그대를 사랑한다 함은/ 당신의 가슴 한복판에/ 찬란히 꽃피는 일이 아니라/ 눈두덩 찍어내며 그대..
냄비 / 문성해 할인점에서 고르고 고른 새 냄비를 하나 사서 안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때마침 폭설 내려 이사온 지 얼마 안된 불안한 길마저 다 지워지고 한순간 허공에 걸린 아파트만을 보며 걸어가고 있었는데 품속의 냄비에게서 희한하게도 위안을 얻는 것이었다 깊고 우묵한 이 냄비 속에서 그 동안 내가 끓여낼 밥이 저 폭설만큼 많아서일까 내가 삶아낼 나물이 저 산의 나무들만큼 첩첩이어서일까 천지간 일이 다 냄비와 무관하지 않은 듯하고 불과 열을 이겨낼 냄비의 세월에 비하면 그깟 길 하나 못 찾는 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품속의 냄비에게서 희한하게도 밥 익는 김처럼 한 줄의 말씀이 길게 새어나오는 것이었다 깨지지 않는 거울 / 문성해 빗방울들 손과 손을 맞잡고 질펀하게 누워 있다/ 검은 거울을 만들고 있다/ 거울임..
이 순간 / 피천득 이 순간 내가 별들을 쳐다본다는 것은 그 얼마나 화려한 사실인가 오래지 않아 내 귀가 흙이 된다 하더라도 이 순간 내가 제9교향곡을 듣는다는 것은 그 얼마나 찬란한 사실인가 그들이 나를 잊고 내 기억 속에서 그들이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순간 내가 친구들과 웃고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 얼마나 즐거운 사실인가 두뇌가 기능을 멈추고 내 손이 썩어 가는 때가 오더라도 이 순간 내가 마음내키는 대로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은 허무도 어찌하지 못할 사실이다. ※ [국립중앙도서관 디지털 도서관 블로그] 순수 서정의 대가 피천득, 그리고 그의 시 순수 서정의 대가 피천득, 그리고 그의 시 순수 서정의 대가 피천득, 그리고 그의 시 “나의 생활을 구성하는 모든 작고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한다.”... blo..
성공이란 무엇인가 / 랠프 월도 에머슨 자주 그리고 많이 웃는 것 현명한 이에게 존경을 받고 아이들에게 사랑을 받는 것 정직한 비평가에게 찬사를 듣고 친구의 배반을 참아내는 것 아름다움을 식별할 줄 알며 다른 사람에게서 최선의 것을 발견하는 것 건강한 아이를 낳든 한뙈기의 정원을 가꾸든 사회환경을 개선하든 자기가 태어나기 전보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놓고 떠나는 것 자신이 한때 이곳에서 살았음으로해서 단 한 사람의 인생이라도 행복해지는 것 이것이 진정한 성공이다 랠프 월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 1803~1882)은 미국의 사상가이며 시인이다. 이 시는 저서 〈자기 신뢰self reliance〉에 수록되었다. 이 저서는 버락 오바마(제44대 미국 대통령)의 애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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