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 류시화 물속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는 그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 안에는 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있는 이여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 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 흘러서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여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소금 / 류시화 소금이/ 바다의 상처라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소금이/ 바다의 아픔이란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세상의 모든 식탁 위에서/ 흰 눈처럼/ 소금이 떨어져 내릴 때/ 그것이 바다의 눈물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 눈물이 있어/ 이 세상 모든 것이/ 맛을 낸다는 것을//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 류시화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
정선 / 이성복 내 혼은 사북에서 졸고 몸은 황지에서 놀고 있으니 동면 서면 흩어진 들까마귀들아 숨겨둔 외발 가마에 내 혼 태워 오너라 내 혼은 사북에서 잠자고 몸은 황지에서 물장구 치고 있으니 아우라지 강물의 피리 새끼들아 깻묵같이 흩어진 내 몸 건져 오너라 정든 유곽(遊廓)에서 / 이성복 1// 누이가 듣는 음악(音樂) 속으로 늦게 들어오는/ 男子가 보였다 나는 그게 싫었다 내 音樂은/ 죽음 이상으로 침침해서 발이 빠져 나가지/ 못하도록 잡초(雜草) 돋아나는데, 그 男子는/ 누구일까 누이의 연애(戀愛)는 아름다와도 될까/ 의심하는 가운데 잠이 들었다// 목단(牧丹)이 시드는 가운데 지하(地下)의 잠, 한반도(韓半島)가/ 소심한 물살에 시달리다가 흘러들었다 벌목(伐木)/ 당한 女子의 반복되는 임종(臨終..
그 외 아무 생각도 없을 것이다 / 이규리 어미 새가 먹이를 물어 새끼들 부리에 넣어줄 때 한 번에 한 마리씩 차례대로, 새끼는 새끼대로 노란 주둥이를 찢어질 듯 벌리고 기다릴 때 그 외 아무 생각도 없을 것이다 절명이 그렇게 온다면 입을 벌리고 한 생각만 집중한 채 그렇다면 한생을 정확하게 전달했는가 나는, 벚꽃이 달아난다 / 이규리 그는 나를 앞에 두고 옆사람과 너무 화사하다/ 이편 그늘까지 화사하구나/ 죽방렴 사이를 빠져나가는 한 마리 멸치처럼/ 빠른 내 그늘을 눈치채지 못한다/ 나무둥치라 여긴 내 중심은 자주 거무스름하다/ 임산부가 행복하다면 가뜩 낀 기미는 말할 수 없었던 속내일까// 덜컹거리며 꽃길 백 리,/ 어쩌자고 화염길 천 리,// 나는 역방향에 앉아서/ 그가 다 보고 난 풍경을/ 뒤늦게..
소 / 김기택 소의 커다란 눈은 무언가 말하고 있는 듯한데 나에겐 알아들을 수 있는 귀가 없다. 소가 가진 말은 다 눈에 들어 있는 것 같다. 말은 눈물처럼 떨어질 듯 그렁그렁 달려 있는데 몸 밖으로 나오는 길은 어디에도 없다. 마음이 한 움큼씩 뽑혀 나오도록 울어보지만 말은 눈 속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 수천만 년 말을 가두어 두고 그저 끔벅거리고만 있는 오, 저렇게도 순하고 동그란 감옥이여. 어찌해볼 도리가 없어서 소는 여러 번 씹었던 풀줄기를 배에서 꺼내어 다시 씹어 짓이기고 삼켰다간 또 꺼내어 짓이긴다. 소 2 / 김기택 몸무게가 되기 위하여 물이 살 속으로 들어온다/ 살과 뼈와 핏줄 사이 가볍고 푹신한 빈큼들을/ 힘센 무게들이 빽빽하게 채워 버린다/ 차에 매달아 한 시간이나 끌고 다니며 만든/..
저무는 빛 / 홍영철 누가 당기고 있나 해가 기울고 있다 누가 떠밀고 있나 해가 떨어지고 있다 당기지 마라 떠밀지 마라 가만히 내버려두어도 우리가 언제 기울지 않았던 적이 있더냐 시계소리 / 홍영철 밤이 깊어갈수록/ 벽에 걸린 시계 소리는 크게 들린다./ 그것은/ 뚜벅뚜벅 어둠 속을 걸어오는/ 발소리 같기도 하고/ 뚝뚝 지층을 향해 떨어지는/ 물소리 같기도 하다./ 그것은/ 어둠을 한줌씩 물리치는 것 같기도 하고/ 어둠을 한줌씩 더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도 눈을 뜨면/ 아무것도 걸어오지 않고 / 아무것도 떨어지지 않는다./ 시계의 바늘은 그저 일정한 간격으로/ 벽 위에서 돌아가고 있을 뿐이다./ 아마 저것은 시계 속의 건전지가 닳아버릴 때까지/ 일정한 간격으로 끝없이 돌아가리라./ 의..
만물은 흔들리면서 / 오규원 만물은 흔들리면서 흔들리는 만큼 튼튼한 줄기를 얻고 잎은 흔들려서 스스로 살아있는 잎인 것을 증명한다. 바람은 오늘도 분다. 수만의 잎은 제각기 잎을 엮는 하루를 가누고 들판의 슬픔 들판의 고독 들판의 고통 그리고 들판의 말똥도 다른 곳에서 각각 자기와 만나고 있다. 피하지 마라 빈 들에 가서 비로서 깨닫는 그것 우리는 늘 흔들리고 있음을. 부처 / 오규원 남산의 한 중턱에 돌부처가 서 있다/ 나무들은 모두 부처와 거리를 두고 서 있고/ 햇빛은 거리 없이 부처의 몸에 붙어 있다/ 코는 누가 떼어갔어도 코 대신 빛을 담고/ 빛이 담기지 않는 자리에는 빛 대신 그늘을 담고/ 언제나 웃고 있다/ 곁에는 돌들이 드문드문 앉아 있고/ 지나가던 새 한 마리 부처의 머리에 와 앉는다/ 깃..
산정묘지1 / 조정권 겨울 산을 오르면서 나는 본다./ 가장 높은 것들은 추운 곳에서/ 얼음처럼 빛나고,/ 얼어붙은 폭포의 단호한 침묵./ 가장 높은 정신은/ 추운 곳에서 살아 움직이며/ 허옇게 얼어터진 계곡과 계곡 사이/ 바위와 바위의 결빙을 노래한다./ 간밤의 눈이 다 녹아버린 이른 아침,/ 산정은/ 얼음을 그대로 뒤집어 쓴 채/ 빛을 받들고 있다./ 만일 내 영혼이 천상의 누각을 꿈꾸어 왔다면/ 나는 신이 거주하는 저 천상의 일각을 그리워하리./ 가장 높은 정신은 가장 추운 곳을 향하는 법./ 저 아래 흐르는 것은 이제부터 결빙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침묵하는 것./ 움직이는 것들도 이제부터는 멈추는 것이 아니라/ 침묵의 노래가 되어 침묵의 동렬에 서는 것./ 그러나 한번 잠든 정신은/ 누군가 지..
덕장 / 임보 파도를 가르던 푸른 지느러미는 뭍에서는 아무 쓸모없는 장식, 대관령의 허공에 걸려 있는 명태는 거센 바람의 물결에 화석처럼 굳어 간다 내장을 통째로 빼앗기고 코가 꿰인 채 일사분란하게 매달려 있는 동태, 등뼈 깊숙이 스민 한 방울의 바닷물까지 햇볕과 달빛으로 번갈아 우려낸다 눈보라에 다 뭉개진 코와 귀는 이제 물결의 냄새와 소리를 까맣게 잃었다 행여 수국의 향수에 젖을까 봐 밤의 꿈마저 빼앗긴 지 오래다 그렇게 면풍괘선(面風掛禪)으로 득도한 노란 황태, 이놈들이 비싼 값으로 세상에 팔려나간다 요릿집의 북어찜, 제사상의 북어포, 술꾼들의 북어국… 겨울, 서울역 지하도에 신문지를 덮고 누워 있는 덕장 아래 떨어진 낙태(落太)들 *면풍괘선(面風掛禪) : 면벽좌선(面壁坐禪)을 패러디한 것임. *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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