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겨울여행을 위한 검색 전에는 남해에 ‘유배문학관’이 있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하긴 올해 개관 2주년을 맞았으니 그럴 만도했다. 목적지였던 은 겨울 숲의 쓸쓸함만 주었을 뿐, 다랭이마을의 민박보다도 의미 있었던 시간은 유배문학과의 만남이었다. 남해 외곽 남변리에 위치한 문학관은 황량하게 넓고 광활했다. 마침 추적추적 겨울비마저 내리고 있어 시설규모의 방대함에 비해 사람 발길이 뜸해 매우 한적한 분위기였다. 유배객들이 형틀에서 감옥으로, 다시 유배지로 압송되는 과정을 체험하는 동안 그들 고통이 출렁이는 물결 타고 내 안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유배지의 한없는 고독가운데서도 임금과 가족을 그리며 문학의 꽃을 피운 숭고한 혼들이었다. 늦은 밤 외딴섬의 호롱불 하나, 선비의 한과 넋은 오롯이 작품..
눈길을 확 잡아끄는 그림이었다. 그림에 대한 설명 또한 마음을 끌어당기는 글이었다. 그날부터 신문을 기다렸고 그 연재를 스크랩하기 시작했다. 오래되어서 그것이 몇 장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한 번도 빠짐없이 정성스럽게 스크랩했었던 기억이 아슴푸레하다. 직설적이지 않으면서도 지나치게 추상적이지 않아서 좋았다. 적당한 숨김과 나타남이 교차하면서 무언가 깊이 있는 울림이 마음을 파고들었고 다시금 그림에 대한 미련을 불러일으켰다. 차곡차곡 쌓인 스크랩을 어릴 때 갖고 놀던 자잘한 소꿉 도구 같은 보물처럼 아꼈다. 그러다 책으로 묶여 나온 ‘화첩기행’ 소식을 듣고 한걸음으로 서점을 찾았다. 책의 무게가 스크랩 무게보다 묵직해 보였다. 새 소꿉 도구가 생기면 예전 것은 미련 없이 버리던 어린 시절이 버릇이 그대로..
사람 사는 게 천차만별이다. 하루하루를 즐기며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고통을 참으며 내일의 행복을 꿈꾸는 사람도 있다. 오로지 부귀영화를 쫓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덕을 베풀고 남을 위한 봉사에 생을 바치는 분들도 적지 않다. 기대했던 사업에 실패하는 경우도 있고, 가볍게 출발한 사업이 큰 성공을 이뤄 명성을 떨치기도 한다. 그래서 살맛나는 세상이라 하는가 보다. 아쉬움이 있다면 세월이 멈추지 않고 흐른다는 사실이다. 모든 일에는 준비시간이 필요하고, 기다림 또한 필요하다. 허지만 기다려 주지 않는 세월을 어쩔 것인가. 소중한 현재의 시간을 아껴 알찬 삶을 사는 수밖에. 할 수만 있다면 서로서로의 힘이 되어, 영혼이 젊고 푸르게 사는 것이리라. 산들바람 부는 어느 날, 반가운 친구 K의 전화를 받았다..
김필영 시인, 평론가 1954년 전남 영광군 출생. 필명 소화모(笑花慕). 월간 《시문학》에서 시, 평론 등단, 《스토리문학》 수필 등단. 제8회 푸른시학상, 제3회 스토리문학상 수상. 빈여백 동인. 시사문단 작가협회 회원. 문학공원 동인. 계간 스토리문학 편집위원. 계간 시산맥 편집위원. 계간 시산맥 고문. 한국 시문학문인회 회장. 시집으로 『나를 다리다』, 『응(應)』, 『 詩로 맛보는 한식 』, 『우리음식으로 빚은 詩(시로 맛보는 한식 개정판)』 와 감상평론집 『그대 가슴에 흐르는 시』, 동시집 동시집 『두근두근 콩콩』, 일반서 『주부편리수첩』 등이 있다. 응 / 김필영 정겨운 대답, 위쪽과 아래쪽이 원이다/ 두 개의 동그라미 속에/ 마음 하나씩 들어있다/ 둘로 나뉜다 해도/ 절대로 각이 질 수 없..
가끔 나의 존재를 생각하면 속이 상한다. 관공서에서 나랏일 한 공적도 없고 기업체를 이루어 사원을 먹여 살린 공덕도 없고, 더구나 후배 양성할 자격도 갖추지 못했기에 내세울 게 없다. 단지 자영업으로 내 가족 건사한 것뿐인데 그마저도 접고 있으니 삶의 의미가 사라진 듯하다. 애완견과 화초를 키우며 자연에 묻혀 지내다 문득 선방 요사채를 불사할 때의 일이 떠오른다. 그때 나는 사찰의 원주보살 소임을 맡고 있었다. 대선사께서 수행하시던 선원에 불사가 시작되자 신도들의 열성은 불같이 일어났다. 대들보는 오백만 원, 기둥은 삼백만 원, 문짝과 상방, 중방, 하방, 값은 일백만 원, 도리 값은 오십만 원인이었다. 그에 비해 천정을 바치고 있는 서까래 값은 십만 원으로 매겨졌다. 차전놀이에서 장수를 떠받드는 형국의..
그 일을 생각하면 나는 지금도 아릿한 자괴심을 달랠 수가 없다. 장난꾸러기 아이들의 속임수에 넘어가서 십오 분도 넘게 수업을 앞당겨 끝냈던 어리석음. 열심히 수업을 진행하고 있는데 사무실에서 계속 전화벨이 울리다가 끊기고 다시 울리고 그러기를 오 분 이상 반복됐다. 수업 중에 전화를 받지 않는 것은 상식이다. 하지만 고집 세게 울리는 벨 소리가 심상치 않다 싶어 아이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받았다. 의외에도 대수롭지 않은 내용이라 기억도 안 나는데, 수업 중이라고 해도 상대방은 같은 말을 자꾸 되풀이하며 시간을 끌었다. 그렇다고 무례하게 끊을 수도 없었다. 교실에 돌아오니 아이들은 벌써 책가방을 꾸리고 있었다. “왜들 이러니?” “끝났어요. 시계 봐요.” 아이들이 항의 비슷하게 일어서서 손가락으로 시..
박일만 시인 전북 장수 육십령에서 태어났다.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법학과를 졸업하고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과정(詩)을 수료하였으며, 2005년 《현대시》를 통해 등단했다. 문예창작기금(2회), 제5회 송수권시문학상, 제6회 나혜석문학상을 받았으며, 시집으로 『사람의 무늬』, 『뿌리도 가끔 날고 싶다』, 『뼈의 속도』, 『살어리랏다』 등이 있다. 한국작가회의, 한국시인협회, 전북작가회의 회원이다. 경기도의회 전문위원을 정년퇴직하고 현재 '논개정신'에 관해 집필하고 있다. 두타행 / 박일만 시끄럽던 우기를 견딘 몸이다/ 축생의 지하를 청산하고 땡볕 속에 나섰다/ 발자국을 총총히 새기는 애벌레/ 제 몸속 습기를 뽑아 길을 놓는다/ 세상을 짚어가는 필사의 솔기/ 걸친 가사도 짊어진 바랑도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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