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종일 마음이 쓸쓸하다. 살고 죽는 문제가 비일비재 일어나는 인생길이지만 태어나는 기쁨보다 죽는 슬픔이 내겐 왠지 더 크다. 남의 일로만 여기던 일들이 내 가까이 다가왔을 때 그 놀라움과 허전함은 마음의 갈 곳을 잃어버리곤 한다. 다잡지 못해 헝클어진 일상을 제자리로 돌리기 위해 더 힘든 심적 고통을 겪게 된다. 사회생활이 무너진 요즘에 어쩌다 건너건너 듣는 소식들은 한탄스런 사연들이 눈물을 쏟아내게 만든다. 코로나19로 인해 사망한 사람이 미국에서만 오십만 명이 넘는다. 해도 걱정스럽고 딱한 마음만 들었다. 내 주위에는 적어도 그 대열에 서지 않으리라 믿으며 그러길 간절히 소원했다. 하지만 어제도 그제도 눈에 선한 사람들이 떠나갔다니 믿을 수 없는 현실로 다가온다. 가족 모두가 악기를 다루고 찬양도 잘..
나는 며느리를 딸처럼 생각하고 산다. 시쳇말로 며느리를 딸로 생각하면 바보라지만 그런 말은 해당사항 없다는 듯 흘려듣는다. 곱상한 모습에 상냥한 음성으로 “어머님, 어머님”하고 나타나면 마냥 예쁘고 사랑스럽다. 그런 며느리가 “어머님, 저희들 출발했는데요, 광어회와 국수가 먹고 싶어요.” 주문을 하면 나는 그때부터 가을 논에 메뚜기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기 시작한다. 기장 해변으로 달려가 자연산 회부터 사다 놓은 뒤 멸치장국을 우려내고 갖은 국수 고명을 만든다. 파란 호박을 볶고 계란지단을 부치고 구운 김을 부셔놓고 양념간장을 만든다. 막걸리까지 준비하고 주문서에서 빠진 고구마튀김과 오징어 튀김 준비까지 해둔다. 혹여 집이 지저분하다고 느낄까봐 대청소를 시작한다. 밀대 걸레로 대충 밀던 것을 무릎으로 기..
독도에서 해돋이를 본다는 것은 큰 행운이다. 한반도의 귀중한 혈 육인 독도는 동해에 핀 꽃이다. 한국인의 가슴속에 영원의 꽃으로 피어 있는 독도에서 해돋이를 촬영하는 일은 가슴 설레는 감동이 아닐 수 없다. 2009년 5월 8일 새벽 2시, 한국사진작가협회 남북교류분과 위원 17명을 태운 배는 깜깜한 저동항을 미끄러지듯 빠져나가 동남쪽으로 씽씽 달렸다. 밤바다의 차가운 바람이 우리를 선실로 밀어 넣었다. 공기가 탁하다며 몇몇 회원들은 밖으로 나갔다. 나는 왼쪽 아래 침상에 누웠다. 잠시 눈을 붙였는가 했는데 사이렌 소리와 함께 회원들이 우당탕 뛰쳐나갔다. 나도 반사적으로 카메라를 메고 갑판으로 올라갔다. 먼동이 트며 멀리 독도가 시야에 들어왔다. 춤주는 파도 위에 여명의 독도가 우리를 반겼다. “독도야,..
박분필 시인 경북 울산 울주군에서 태어났다.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유교경전학괴 졸업하고 1996년 《시와시학》으로 문단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 『창포 잎에 바람이 흔들릴 때』, 『산고양이를 보다』, 『물수제비』, 『바다의 골목』 등이 있고 동화집 『hldid 전설의 날개』, 『홍수와 땟쥐』를 펴냈다. 제4회 문학청춘작품상, 2011년 KB창작동화 대상, 제11회 동서문학상 맥심상을 수상했다. 겨울밤 흰 눈 내릴 때 / 박분필 살박살박/ 머리맡 탁상시계는/ 밤마다 깊은 독 속에서/ 시간의 흰 싸라기를 퍼낸다// 그 흰쌀 퍼내는 소리가/ 달빛처럼 고요해질 때면/ 그 밤 내 잠은/ 숯불 속 군밤처럼 달다// 봄을 보낸다 / 박분필 봄을 붙들어 액자에 넣고/ 거실 벽에 걸어두었다./ 가지마다 화안하게/..
2022 경남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그가 움직인다. 손짓춤에 살결 같은 무명천이 내려서고 조리질에 참깨 올라오듯 누런 진흙물이 일어난다. 토닥거리며 매만지고 빠른 장단으로 휘몰아치니 항아리 안에 울돌목 회오리바람이 인다. 강바닥이 뒤집힌 듯한 너울에 정신이 혼미하다. 토해낸 물거품이 모여 수런거린다. 그가 젖은 천을 치켜들고 훑어 내리자 하늘 한 조각 떼어온 양 푸른 쪽물이 주르륵 쏟아진다. 흙을 빚어 태어났다. 잘록한 목선 타고 흘러내린 허리는 어린아이 두어 명을 거뜬히 품을 정도로 넉넉하고 진한 흑갈색 겉옷엔 빗금 몇 개 그어 멋을 부렸다. 풍만한 맵시는 미스 항아리 대회라도 나섰더라면 등위 안에 당당히 들었을 것이다. 닥치는 대로 녹여버릴 듯 맹렬히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살이 타들어가는 뜨거움을 견딜..
2022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수상작 색종이 위에 온 마음을 담는다. 모서리를 맞추어 엄지로 지그시 누른다. 멀리 떨어진 꼭짓점을 맞대고 힘주어 문지른다. 접을수록 좁아지는 종이를 따라 마음도 쪼그라든다. 종이접기는 유년의 나를 다양한 상상의 나라로 데려갔다. 비행기를 타고 구름 위를 올라 손오공을 만나고, 돛단배를 타고 무인도에 발을 디뎠다. 종이 인형에 빨간 저고리와 초록 바지를 입히며 엄마가 된 듯 흐뭇했다. 완성품을 만날 때마다 동심은 꿈속을 걸었다. 그 뒤로 성취감과 자신감이 따라왔다.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색종이는 시야에서 멀어졌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종이가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못해 좌충우돌하며 마음의 종이를 무던히도 접었다. 교과서적인 자를 들이대고 접은 모서리..
[현대경제신문] 스케치 –기린의 생태계 / 유휘량 우린 목이긴 걸// 기린이라 불러// 하필 넌 목이 길구나.// 누가 널 그리고 있는 걸 아니?// 그림자를 졸여 만든 잉크로// 괜찮아./ 너는// 그리는 동시에/ 사라지는 감각이 좋았다.// 따듯한 색은 대체로 몸에 좋지 않았던 그때// 핏줄엔 면역이 없어서, 핏줄에 묶인 몸이 싫다고/ 목에 핏줄 세우며// 새가 새를 잡아먹는 건 이상하다. 완벽한 새장을 만들기 위하여 가시밭에 두 손을 넣어두고 돌아왔다. 그 두 손은 그림자놀이를 통해 새를 밖으로 내보냈다. 그럼에도 기린이 새를 입에 물고 불타는 머리를 흔드는 걸 보면 이상하다. 나무에 열리는 아가미는 싫어하면서 하루에 새 하나씩 꼬박꼬박 먹는 건 이상하다.// 몸을 벗고 남겨진 자신을 봐.// 복도..
[국제신문] 내 침대는 오늘 아침이 봄 / 박재숙 침대에게 몸으로 물을 주는 건, 그에게서 달콤한 봄 냄새가 나기 때문이지 내 주변엔 봄이 너무 많아 침대도 나에겐 봄이야, 그건 아마도 침대를 향한 나의 일방적인 편애일지도 모르겠어// 침대는 해마다 겨울이 알려주는 장례관습 따위엔 관심 없어 꿈과 현실 사이에서 철없이 스프링을 쿨렁거려도 푸른 봄은 여전히 아지랑이처럼 오고 있을테니까// 침대 위에서 휴대폰 속 이미지나 사건들을 클릭하고 닫는 동작은 무의미해 그때마다 끝이 보이지 않던 내일이 침대 커버처럼 단순해질 수도 있다는 걸 명심해// 침대의 생각은 참으로 명료해 홀쭉하게 들어간 배를 쓰다듬으며, 지난밤 겹의 무게 뒤에 펼쳐진 피로를 걷어내고 비로소 자리에서 일어날 힘을 얻지, 그건 내일이 던져줄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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