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전라매일 신춘문예 당선작 건조했던 나의 귀가 수족관을 채우는 맑은 물소리에 촉촉해진다. 병원 관리원이 복도에 있던 유리 속 세상을 대청소중이다. 호스를 타고 들어온 투명한 물줄기들이 수족관으로 콸콸 쏟아지고 물이끼로 불투명했던 유리 안쪽 세상이 말갛게 깨어난다. 붕어, 잉어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주저앉았던 수초가 다시 일어선다. 느릿느릿 우렁이들이 서로 몸을 비빈다. 입원 중인 엄마를 면회하고 돌아오는 길에 슈퍼에 들었다. 작년에 결혼해 임신한 딸이 입덧이 심해서 새콤한 무생채를 해볼 참이다. 막상 무를 사 오기는 했는데 무생채를 만드는 일이 아득하다. 커다란 무를 썰려니 칼이 잘 들어가지 않는다. 칼을 힘주어 누르니 중간에 단단히 꽂혀 칼날이 빠지지 않는다. 아삭아삭 씹히는 무가 이렇게 단단했..
집 구조가 사람 냄새를 느끼게 했다. 간판이 없었다면 그저 오래된 할머니 댁 같은 분위기였다. 검은 바탕에 ‘천사 갈비찜’이라고 쓰인 흰 글귀가 마치 현수막처럼 가로로 길게 늘어서 있었다. 겉보기에는 평범해 보여도 맛은 빈틈이 없었다. 한동안 그 맛이 입안에서 요동쳤다. 태양도 녹아내리는 무더운 여름날 그 집을 다시 찾았다. 찜 종류는 매콤한 맛과 간장 맛 두 가지뿐이다. 밑반찬이라고는 매운맛을 조절해 주는 깻잎과 쌈무, 알알한 기운을 개운하게 해주는 시원한 콩나물국 그리고 고소한 참기름에 간간한 맛이 밴 김 가루가 전부다. 더 필요하다면 직접 가져다 먹는 셀프바가 준비돼 있다. 우동 사리나 라면 사리도 다투어 대기 중이다. 무엇보다 이미 만들어져 나오기에 먹는 데만 집중할 수 있어 편하고 좋다. 내부 ..
좋아하고 맛있다고 생각하는 음식을 이야기할 때 대부분의 사람은 추억과 관련이 있는 음식을 꼽는다. 어머니의 손맛이 배인 음식이 객관적으로 가장 맛이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어릴 적부터 먹었던 익숙한 맛이기 때문에 세상 그 어떤 음식보다 맛있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거기에다 행복한 추억까지 가미가 되면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넘사벽이 되고 만다. 호모 에렉투스는 인류를 아프리카에서 벗어나 세계로 퍼져나가게 한 주인공이다. 불을 발견함으로써 어두움과 짐승에 대한 두려움을 이기고 새로운 세계를 향해 나아갔던 그들의 용기. 어두운 동굴을 벗어나 첫걸음을 떼었던 도전의 순간이 오늘날 우리를 이곳에 있게 한 이유일 것이다. 그 유전자의 힘으로 인류는 새로운 도전을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
먹구름이 몰려온다. 번개를 동반한 천둥이 시끄럽게 다녀간다. 우레의 꼬리를 물고 빗발이 창문을 후려친다. 하늘도 삼복더위를 피하고 싶었는지 결국 작달비를 퍼붓고 만다. 거센 빗줄기에 창밖 풍경이 뿌옇다. 괜히 내 마음마저 흐려놓는다. 칼국수 생각이 굴뚝같다. 하얀 수건을 쓴 시어머니가 대청에서 만들어 주던 누른 국수 한 그릇이 오늘따라 더 그립다. 기분 전환이 필요했다. 머리 모양을 바꿀까, 친구와 수다를 떨까 고민하면서 집을 나섰다. 빗줄기는 여전히 세차다. 속이 허전하고 기분이 우중충할 때는 먹는 게 최고라는 결론을 내렸다. 시동을 켠 채 망설이다 평소 즐겨 먹던 다전손칼국수 집으로 차를 몰았다. 윈도 브러시가 내 마음처럼 바삐 움직인다. 라디오에서 가야금 소리가 흘러나온다. 빗소리와 가야금의 동당거..
이봉주 시인 △1957년 춘천 서면 출생. △한림대평생교육원 시창작반 수료 △2015년 강원문학 전국신인상공모 신인상 당선 △불교신문 신춘문예 당선 △빛글문학회 동인 △낭만문학상 수상 폐사지에서 / 이봉주 부처가 떠난 자리는 석탑만 물음표처럼 남아 있다// 귀부 등에 가만히 귀 기울이면 아득히 목탁소리 들리는 듯한데// 천 년을, 이 땅에 새벽하늘을 연 것은/ 당간지주 둥근 허공 속에서 바람이 읊는 독경 소리였을 것이다// 천 년을, 이 땅에 고요한 침묵을 깨운 것은/ 풍경처럼 흔들리다가/ 느티나무 옹이진 무릎 아래 떨어진 나뭇잎의 울음소리였을 것이다// 붓다는 없는 것이 있는 것이다, 설법 하였으니/ 여기 절집 한 칸 없어도 있는 것이겠다// 그는 풀방석 위에 앉아 깨달음을 얻었으니/ 불좌대 위에 풀방..
이서빈 시인 영주 출생. 옥대초등학교와 방송통신대 국문학과를 졸업. 201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문학시대》 신인문학상 수상, 계간 마네르바작가회 이사, 한국문협 인성교육위원, 국제펜클럽 회원. 중랑문화원 ‘남과 다른 시 쓰기’ 창작교실 강사. 저서로 시집 『달의 이동 경로』, 『바람의 맨발』, 『함께, 울컥』 민요시집 『저토록 완연한 뒷모습』이 있다. 균(菌) / 이서빈 균들은 몸을 잃은 불구다/ 입만 있는 생물체, 먹어 치우기만 하는 포식자/ 먹고 있을 때는 증상을 느끼지 못하도록 조심하지만/ 다 먹힌 자리는 상처가 생기거나 곪는다./ 인간의 곪아가는 상처는 균의 배설이다// 꽃이 만개 하려는지 열이 오르고 몸은 파르르 떨린다./ 병원에 갔는데 균은 보이지 않는다./ 오래 굶었던 것들 동시다발..
불로동은 20번 버스의 종점이었다. 종점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 버스가 마지막으로 서는 곳이다. 그런데 불로동에서도 더 들어가야 하는 곳들이 있었다. 팔공산 동화사나 파계사 인근으로 가는 사람들은 한 시간에 한 번씩 오는 버스를 불로동 종점에서 기다려야 했다. 그래도 불로동을 종점으로 불렀다. 우리 집은 승차권 판매점을 하고 있었는데 그 시골 사람들은(지금은 대구시에 편입되었지만, 당시에는 경상북도 군위군이었음) 당연히 우리 가게에 진을 쳤다. 특히나 오 일마다 서는 장날이면 시골에서 가져온 각종 채소와 과일을 팔고 옷이나 이불 그리고 생선 같은 먹을거리를 사서 돌아가는 사람들로 붐볐다.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고 난 다음 해였고 나는 겨우 11살이었는데 장날이면 오는 사람이 많아 어머니는 혹시나 손이 탈까..
도시가스 회사에서 가스 자가 검침을 해 달라는 문자가 왔다. 코로나19로 인하여 매월 말일에 집 안에 있는 계량기 검침을 하여 문자로 보내야 하는데, 백수가 과로사한다더니 하는 일 없이 바빠 그걸 깜빡 한 모양이다. 달력을 보니 오월로 접어든 지 며칠이 지났는데도 사월이 그냥 매달려 있다. 사월을 죽 찢었다. 떠나간 사월과 낯설어 반가운 낯선 오월을 번갈아 본다. 4월은 4일이 청명이고 20일이 곡우다. 그리고 5월 5일이 입하이니 이로써 또 한해의 봄이 다 가고 있음을 실감한다. 네게 주어진 봄날이 얼마나 많이 남아 있을지 모르지만, 그중 하나의 봄이 이렇게 지나가고 아홉 달을 기다려야 남은 봄이 다시 온다고 생각하니 괜스레 기분이 울적하다. 그리고 오랜 기억 하나 되살아난다. 이맘때면 시골에서는 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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